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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재능-8화 (8/116)

00008  신인 소설가 Joker U  =========================================================================

지혁은 은서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요점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좁힐 수 있었다.

당분간 지혁은 현재의 체제를 유지할 것이라는 것이 첫 번째. 검정고시를 준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느 정도 돈이 모이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는 이야기. 설령 이번 해에 검정고시를 패스하지 못하더라도 내년이 있다는 설명.

은서는 납득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은서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은서는 공부를 놓은지 좀 되었다. 물론 게임을 하는 와중에도 남는 시간동안 간간히 문제집도 뒤적이고 하는 것 같았지만, 마음이 딴데 가있는 데다가 별 의미도 없는 시간이었을 것이 뻔하다. 남들보다 뒤쳐진 1년을 메우기 위해서는 이번 겨울방학 시즌에 바짝 공부를 해둘 필요가 있다. 진도를 빼기 위해서 필요한 일. 지혁은 오전에 은서와 같이 외출해서 문제집을 사들고 왔다.

은서는 군소리없이 곧장 공부를 시작했다. 지혁은 최대한 배려해주었고, 점심도 직접 차려주는 등 은서를 옆에서 보좌해주고 있었다. 물론 본인 역시 컴퓨터로 소설의 반응을 살피거나 웹서핑을 하는 등 나름대로 알찬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핸드폰이 진동했다.

- 요새 머하누?

지혁은 갑작스럽게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자 안부를 묻는 말투가 눈에 들어온다.

- 지금 통화 되냐?

“…….”

지혁은 고민하다가, 결국 된다는 말을 써넣었다.

우웅-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지혁은 하루 내내 공부에 완전히 몰입해있는 은서를 힐끗 쳐다보았다가 문 밖으로 나와서 전화를 받았다.

- 야, 니는 어떻게 된 게 연락이 없노?

“햄. 오랜만이에요.”

지혁은 피자집 알바를 좀 오래 했었다. 이승현은 그때 같이 일하던 지혁보다 두 살 많은 형이었다. 물론 마지막으로 연락했었던 것은 대략 한 달쯤 전인 것 같다. 그만두고 한 달 정도는 계속해서 대화를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연락이 끊겼던 것이다.

- 먼저 연락도 해주고 하면 좀 좋나?

물론 이 말이 진심은 아닐 것이다. 지혁의 사정을 잘 아는 그는 알바가 끝나고 종종 밥도 사주고 했을 정도로 성격 좋은 사람이었다. 붙임성도 좋지 않고 집안사정 때문에 인연을 만들만한 여력도 없었던, 흔한 친구 하나없는 지혁과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것만해도 알 수 있다. 이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승현의 공이었다.

“죄송합니다.”

- 새끼, 농담이담마. 어디고? 이제 니도 스무살 됐으니까 술이나 한 잔 하자.

지혁은 간당간당한 지갑사정을 떠올렸다.

“아, 죄송해요. 제가 지금 돈이 없네요.”

친한 사이이기에 이런 궁색한 말도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 들려온다.

- 괜찮다. 그….

“아뇨. 제가 계속 얻어먹기도 좀 죄송해가지고요.”

- …우리 사이에 뭐 그리 눈치를 보노. 나중에 배로 갚으면 되지.

“배로 갚기 싫어서 그러는 거에요.”

물론 장난으로 한 말이다. 다만 별로 나가고 싶지 않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여러모로 도움도 많이 받았고, 차별없이 대우해주는 것에서는 존경심도 생겼다. 내가 인복이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감사한 인연. 그렇기에 지혁은 꼭 보답하고 싶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혁은 이미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으니.

- 글나.

어쨌든 오늘은 보고 싶지 않다. 앞으로 한 달 정도만 있으면 수입이 들어오게 되니. 그때 떳떳한 마음을 가지고 만나고 싶었다. 안그래도 그때가 되면 지혁이 먼저 전화를 하려고 했던 사람이 바로 승현이었다.

승현도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안다는 듯 목소리에 체념의 기운이 담겨있다.

“예. 다음에는 제가 먼저 연락드릴게요.”

- 알았다 그럼. 꼭 연락해라이.

“네. 들어가세요.”

뚝.

전화를 끊은 지혁은 이를 갈았다.

고깃집 알바는 페이가 그다지 쌔지 않았다. 두 개의 알바를 했지만 지혁이 주로 한 것은 편의점 알바였다. 시간의 대부분을 잡아먹는 것도 그것이었고. 그러나 지혁은 아직 신고를 해둔 상태일 뿐 편의점 알바비를 지급받지 못했다. 만약 그것을 원만하게 받아내기만 했더라도 이런 식으로 만남을 거절하지는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하늘이 무너져도 제값을 받아내고 말테다.’

8일치의 알바비까지 모조리 받아내야 속이 좀 시원해질 것 같았다. 지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몸을 돌렸다.

“아, 깜짝이야.”

그리고, 열린 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은서를 발견하고는 몸서리를 치며 뒷걸음질했다.

‘혹시 들었나?’

지혁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는 말했다.

“은서야 공부하다말고 왜 나와….”

“오빠, 이거.”

은서가 문을 조금 더 열면서 밖으로 나와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지혁이 쳐다보니, 하얀색 봉투였다.

“이게 뭐야? …설마.”

“응. 내가 지금까지 게임으로 번 돈. 계정도 오늘 팔았어.”

지혁은 봉투를 열어보았다. 카드와 통장, 보안카드가 들어있었다.

“소설로 번 돈. 아직은 빼서 쓸 수 없는 거지?”

“…응.”

“거기 있는 돈을 쓰고, 나중에 다시 채워주면 되지 않을까? 나도 학교에서 쓸 용돈은 있어야지.”

그녀의 배려가 느껴졌다. 그냥 무작정 준다고 하면 또 실랑이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기라도 한 것인지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것이 느껴진다. 은서의 말에 지혁은 말없이 은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은서가 민망한 듯 고개를 슬쩍 돌렸다.

스윽.

지혁은 슬며시 움직여서 은서를 꼭 안아주었다.

“고마워. 잘 쓰고, 꼭 다시 채워넣을게.”

“응. 그리고 방금 거절한 것도 가서 놀고 와.”

역시 들었나. 관심없는 척, 공부를 하는 척 하더니만 지혁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살금살금 문가로 다가오기라도 했었던 모양이다.

지혁은 순순히 대답했다.

“알았어.”

어차피 꼭 집에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은서야 원래 요리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니까 저녁은 알아서 챙겨먹을 것이다. 오랜만에 승현을 보고 싶기도 했고.

지혁이 수락하자 은서가 자랑하듯 말했다.

“나 1년동안 정말 열심히 모았어.”

알고 있다. 사실 은서가 자신보다도 가지고 있는 돈이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은 늘상 해왔었다. 은서는 지난 1년간 깨어있는 시간은 내내 지루하게 사냥만 하고 있는 모습을 보였었으니까. 그러나 지혁은 그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원하지도 않았고, 그걸 은서 본인을 위해 쓰기를 바랬다.

“2700만원?!”

그러나 막상 모여있는 돈을 보고 있자니, 은서의 1년이 가지는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나는 오빠가 이제라도 대학교에 진학하길 바랬거든. 1년만 더 모아서 5천만원이 되면 오빠한테 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버렸네.”

2700만원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지혁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건가. 은서는 다리가 다 나았음에도 애당초 학교를 갈 생각 자체를 안했던 것 같다. 다리가 나았기에 더욱더, 이번에는 지혁을 위해서 자기가 노력할 차례라는 마음을 먹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 은서라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으이구 바보야. 오빠는 괜찮다니까.”

“그럼 나도 괜찮다 뭐.”

지혁은 졌다는 듯, 니 말이 맞다는 듯 실소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은서가 말했다.

“그래도 오빠는 이제 하고 싶은 일도 찾은 것 같고… 그러니까 나도 내 인생 살아보려고.”

아하. 지혁이 소설을 쓰고 성과를 내고 있는 것, 그리고 소설에 대해 자랑질(?)을 해댄 것에서 은서는 지혁이 본래 소설가가 되길 희망했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지혁은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돈을 벌면서 시간을 들여 나를 설득하려고 그랬구나? 다시 공부하게?”

들켰다는 듯 혀를 내밀며 웃는 모습을 보니 못 말리겠다 싶다. 숨을 크게 내쉬며 웃은 지혁은 은서의 머리를 강하게 휘저어서 흐트러트리고선 봉투를 든 채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외투를 챙겨 입으면서 화장실에 달려있는 작은 거울로 간단히 외모를 점검하고 있는데, 쭈뼛쭈뼛 다가온 은서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드는 것이 보였다.

“오빠, 근데 말이야.”

“걱정 마. 검정고시야 어차피 볼 생각이었으니까.”

지혁의 말에 은서의 표정이 환해지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은서는 지혁이 소설로 돈을 벌고 있고 소설 쓰는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자기 앞가림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말은 즉, 아까 지혁을 낚아먹으려고 함정을 파두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결국 지혁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오빠 갔다 올게.”

“응. 조심히 다녀와.”

드르륵.

지혁은 은서의 이름이 새겨진 카드를 지갑에 잘 넣으며 문을 나섰다.

- 어. 왜?

“형. 그냥 오늘 봐요. 제가 쏘겠습니다.”

- 진짜?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뀌셨을까? 밀려있던 월급이라도 들어왔나?

밀려있던 이라는 말을 들으니, 알바비로 지혁을 골치아프게 하고 있는 편의점 사장놈이 떠오른다. 지혁은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말했다.

“가서 말씀드릴게요.”

지혁의 목소리에 담긴 자신감을 읽었는지, 승현이 여유롭게 말한다.

- 그래. 그럼 …에서 보자.

“네.”

지혁은 승현이 목소리 하나는 정말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통화를 종료했다.

세상은 점점, 어둡게 물들어가고 있다.

휘이잉.

밤바람이 차다. 그러나 지혁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갈수록 점점 진해진다.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과 함께 상쾌함이 느껴진다. 양팔을 옆으로 쫙 펼치며 심호흡운동을 하듯 자세를 잡은 지혁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쉬며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일단은… 고맙습니다.’

지혁이 신에게서 얻은 것은 너무나도 크다. 지금 이 순간, 그 사실을 더욱 더 강렬하게 실감하게 된다. 그저 앞으로 좋은 일만 있겠구나, 순풍만범(順風滿帆)한 인생이겠구나 생각했던 것이 전부였었는데 이제 막 날개짓을 시작하려는 시점부터 밀려오는 행복들이 지혁의 내면을 가득 채우는 것 같다.

< 너무 고마워하지는 말라고. 어차피 나한테는 별 것 아닌 일이기도 하니까. >

신의 말이 귓전을 웅웅 울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실제로 했었던 말도 아니고, 음성이 전달된 것도 아닌데 꼭 말을 해온 것 같은 느낌이다.

‘가자.’

지혁은 달리듯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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