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3 자각 =========================================================================
치이익. 치익.
은서는 지혁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다가 겨우 진정했다. 냄비에 끓인 물을 컵에 따르려니까 거품이 올라오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싸구려 냄비가 오래되기까지 하니 생기는 일. 이런 것은 익숙했기에 지혁은 개의치않고 물을 컵에 따랐고, 컵 두 개를 들고서 방으로 간 뒤에 하나를 은서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흔한 녹차 하나 없었기 때문에 그냥 끓인 물일뿐이었지만, 따듯했다.
그저 끓인 물. 지혁은 신과 마셨던 차를 떠올렸다.
“어떻게 된 거야?”
지혁은 물을 홀짝이면서 컵을 들어 올린 상태로 물었다.
“모르겠어. 오빠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갈 수가 없었어. 어떻게든 가야한다는 생각밖에 안하던 그때, 왠지 걸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용기를 내봤더니 걷는게 가능했고….”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다는 건가. 지혁은 은서의 말을 들은 순간 빙긋빙긋 웃던 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서웠어. 나는 이제 멀쩡해졌는데, 오빠마저 내 곁을 떠나는게 아닐까 하고….”
“병실은 매일매일 왔던 거야?”
은서가 울먹이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돈이 없으니 뭘 사오지는 못했을 것이고, 계속 병실에만 있을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병원비를 내려면 돈이 필요하다. 거기로 생각이 미친 순간 집으로 돌아와서 게임을 시작했을 것이다.
할 수 있는게, 그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눈물을 흘리면서 키보드를 누르고 있었을, 동생의 모습이 선하다.
“미안해. 갑자기 쓰러지고 걱정이나 끼치고. 의사선생님이 …이제 괜찮대.”
“응….”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잠긴 목소리에, 지혁은 동생을 쳐다보고서는 머리에 손을 얹고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세수하고 와.”
고개를 끄덕인 은서는 말없이 화장실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혁은 방바닥을 내려다보았다.
‘…….’
좌절. 죽음. 기회.
< 나와의 만남은 축복과도 같지만, 조심하라구. 막상 다 가지게 되면 은근히 허무할 수도 있어. 그때가 돼서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신중히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얻는게 많은 것이 좋은건 아냐. 그렇게 망가지는 애들도 많이 봐와서 하는 말이야. >
어렴풋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은 같다.
모든 것을 가진 인간은 다 지겨울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그건 지혁의 입장에서는 너무 배부른 이야기였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들어도 지겹기만 할 다른 세상의 일.
‘잘 살거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동생의 두 다리가 나은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이제는 의심할 수도 없다. 신의 말은 진짜였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얻었던 혜택은 머릿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지혁은 많은 이들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보란 듯이….”
잘 살아줄 것이다.
* * *
< 재능. 그것은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종류도 많지. 모든 것을 잘할 수 있는 재능을 사간 녀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무려 1만포인트나 투자를 해서 모든 분야에서 최고에 오를 수 있을만한 재능을 바랬던 녀석은 없었어. 뭐, 애당초 그런 포인트를 가진 녀석도 없었지만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건 너무 재미없잖아. >
< 어쨌든 니 선택이니까 존중할게. 애당초 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쓸데도 없잖아? >
< 다만 여기서 말하는 재능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어. >
< 일단 재능은 말 그대로 재능이야.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노력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물론 너는 워낙 많은 포인트를 투자했기 때문에 다른 녀석들보다 익히는 속도도 빠를 거야. 물론 성장가능한 수준도 월등히 높지. >
<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평행세계에 관한 언급을 했었던 것은 기억하고 있겠지? >
< 너희들이 말하는 무협세상이라는 것도 실존해. 원래는 없었지. 그러나 너희들의 설정이 흥미로웠고, 말했듯 그래서 그대로 만들어 본거야. >
< 하지만 분명히 무협세상의 인간들과, 현대의 인간들은 달라. 그들은 무공이라는 것을 사용하기 위해서 ‘기’라는 것을 익혀야 하고 그것은 내가 그 차원에 집어넣은 설정이야. 하지만 니가 살던 지구의 현대인들은 애당초 기를 쓸 수 있는 신체가 아니야. 그렇게 만들어진 거지 그냥. 사실은 너희 세상에는 애당초 기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거든. >
< 1만 포인트는 엄청난 수치라고 볼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그 막대한 포인트를 투자해 가면서까지 재능을 추구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차원을 막론하고 모든 재능을 가지게 된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해. 본래의 유지혁이라면 당연히 무공을 익힐 수 없는데도, 너는 가능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 >
<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은 차원이 존재하는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차원에 존재하는 모든 재능을 얻었다는 것 정도는 되어야 1만 포인트의 값어치가 있는 거겠지. >
< 그것은 그야말로, >
< 악마의 재능. >
< 됐어. 이것으로, 너는 뭐든지 잘할 수 있게 될거야. 뭐든지라는 것은, 원래는 할 수 없는 것들도 가능하게 될거란 말이기도 하지. 이걸로 남은 포인트는…. >
“…….”
하고 싶은 것은 명확하다. 많은 것을 알고 싶고, 많은 것을 익혀보고 싶다.
그래서 한 선택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신은 그게 가능하다고 했다. 포인트의 대부분을 투자하는 결정이었지만, 과감하게 선택했다. 후회하지도 않는다. 더 좋은 선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이 이것이라는 확신은 분명히 있다.
‘돈을 벌어야 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만 한다. 그게 가장 먼저다.
지혁은 옆을 힐끔 쳐다보았다.
은서가 새우처럼 웅크려서 잠들어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 좁은 방안은 둘이 살기에는 협소하다. 물론 지금껏 그런 생각을 해온 적은 별로 없었지만,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는 상황에서는 조금 다르다.
‘돈. 돈. 돈.’
돈. 일단은 그것부터 시작이다. 충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만한 돈을 벌어들이는 것. 그것이 최우선 과제다.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이든 그 분야에 있어 최고가 될 수 있을만한 재능을 손에 쥐었다. 신의 재능. 두려울 것은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게 너무 많으니까 고민이 된다.
그러나 지혁은 곧이어 그러한 생각을 떨쳐버리기로 했다. 정답은 없고, 빨리가야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쉬워 보이는, 또는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하나 고르기만 하면 된다. 아무거나.
그때, 지혁의 눈에 꺼져있는 구형 컴퓨터의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정했다.
은서를 내려다보던 지혁은 슬며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눈을 감은 지혁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은서의 다리가 갑자기 나았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꿈이 아니었고, 했었던 약속은 허상이 아니었다.
지혁은 자신을 신이라고 자칭했던 존재와 만났던 장소를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룸(Room).’
파아앗.
눈을 감고있지만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감각은 선명하다. 천천히 눈을 뜨니,
마치 원래 그랬다는 것처럼… 화장실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하얀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 여길 주지. 이곳은 좀 특별해. 멈춰있는 시간 속에서, 멈추지 않는 공간. 여기에서 보내는 시간은 다른 어떤 차원에서는 적용이 안 돼. 니가 이곳에서 100년의 시간을 보내고 현대로 돌아간다고 한들, 그곳에선 조금의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는 뜻이야. >
< 물론 변화는 일어나지. 운동을 하면 몸이 단련되고 근육이 붙겠지. 공부를 하면 지식을 쌓을 수 있을 테고. 근데 또 희한하게, 이곳에서는 늙지도 않아. >
< 맞아. 사실 너는 포인트가 좀 많아서, 무분별하게 사용하게 되면 내 입장은 좀 난감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어. 근데 1만 포인트를 써가면서까지 재능을 샀으니, 그냥 기특하게 여겨서 보너스로 지급해주는 거라고 생각해. 물론 다른 것들은 돈을 내야 돼. 내가 주는 것은 이 공간뿐. 오고가는 행위와 잠을 자기 위한 침대, 먹을 것 등부터 그 이외에 부가적인 요소들. 그런 건 포인트로 사야 돼. >
< 오케이. 올 때의 시동어는 이곳을 연상하면서 ‘룸’이라고 속으로 외칠 것.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원래의 장소로 돌아갈 때는 떠나왔던 장소를 생각하며 룸. >
< 니가 원하는 것은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면 만들어내 줄거야. 추상적인 주문도 괜찮게 설정해주지. ‘요리와 관련된 책’을 원한다고 하면 생겨날 거고, 근사한 집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것 역시 바로 만들어질 거야. 써보면 금방 적응할거니 이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자구. >
“…일단 집부터 만들어야겠지.”
신이 했던 말들을 상기하던 지혁은 작게 중얼거리며 하얀색 노트북을 머릿속으로 연상했다. 그러자 노트북이 스르륵 생겨났다.
문뜩 호기심이 생긴 지혁은 게임을 깔아보았다. 그러나 접속을 해도, 다른 유저들의 캐릭터는 멈춰있을 뿐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혼자서만 붕 떠있는 느낌이 섬뜩했던 지혁은 게임을 종료했다. 솔직히 이제껏 살아오면서 게임따위를 하고 있을 정도로 한가했던 적은 없었다. 게임에 대해 무지하다보니까 관심이 크게 없었기에 게임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집이나 뽑자.”
집을 뽑는다는게 좀 웃긴 일이지만, 지혁은 곧장 인터넷 창에 이것저것 검색을 해보기 시작했다. 많은 집들을 찾아냈고, 그 중 가장 괜찮은 것이 있었다.
이걸로 하자.
결정을 내린 지혁이 속으로 집을 원하는 연상하니, 눈앞으로 사진 속의 집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와….’
지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집은 해변가 근처에 있었는데, 단순히 집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진속의 풍경도 그대로 옮겨졌다. 하얗기만 하던 공간은 현실과 동일한 느낌이었고, 파도가 치는 모래사장 너머에 자리한 집 근처의 야자수가 바람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짱짱한 햇빛이 빛나듯이 반짝거리는 하얀색 벽과 식물들이 자라 생기가 넘치는 정원까지 인터넷에 올라있는 사진 속의 집과 완전히 빼다 박았다.
‘언젠가는 이런 집에서 살 수 있겠지?’
이곳은 그저 환상속의 공간 정도일 뿐이지만, 현실에서도 이런 호화저택에서 살아가는 날이 있을 것이다. 지혁은 그런 포부를 안은채로 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너무 좋았다. 새로 지어진 집처럼 광이 나는 거실과 2층으로 향하는 계단, 몇 개인지 세기도 힘든 방문 등이 영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집임을 실감하게 했다.
‘…….’
그리고 그 순간, 지혁은 떠나기 전에 보았던 현실의 집이 떠올렸다. 더 정확히는, 좁은 공간에 웅크려서 자고 있던 은서가 떠올랐다.
계속 그런 곳에서 살게 둘 수는 없다. 나만 이렇게 행복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든 지혁은 밖으로 나가서 아까 소환했던 노트북을 가지고 들어왔다.
“해보자구.”
지혁은 만족할 때까지 이곳에서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집에서 컴퓨터를 보자마자 떠올린 것이 하나 있었다.
지혁은 지금부터, 그것을 해보려고 한다.
‘…….’
사실… 신을 처음 만났을 때, 설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지혁은 아직도 돌아가신 부모님과 막냇동생을 그리워하고 있었기에. 그러나 신은 그것이 불합리한 일이라는 사실을 차분하게 설명했고, 지혁은 납득했다. 아마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재능은 충분해.’
시간도 많고, 환경도 좋다. 이제는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떼돈을 벌어 은서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돈 걱정 하지 않고, 과거를 잊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소중한 가족을 위해서, 그는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해보는 거야.’
지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