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마의 재능-1화 (1/116)

나는 무엇이든 빠르게 익히고, 누구보다 잘한다.

그게, 신과의 계약조건이었다.

00001  Prologue  =========================================================================

“이리 와서 앉아.”

갑작스러운 소리에 눈을 뜬 그는 뜬금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내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의 앞에는 연갈색의 단색으로 이루어진 투박한 식탁이 위에는 검은색과 하얀색으로 구성된 체크무늬가 인상적인 찻잔이 놓여있었다.

“뭐, 뭐야?”

“뭐긴 뭐야 지옥이지. 넌 죽었고.”

놀람을 수습하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당황이 가득 담긴 음성을 더듬더듬 내뱉자 찻잔의 찻물을 홀짝이던 사내가 그 즉시 답해온다. 그 말에 남자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두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칙칙한 아저씨랑은 같이 마시고 싶지 않는 거야? 그럼 바꿔주고.”

슈아아악.

마치 공간 전체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느낌이었다. 쾌속으로 달리는 기차의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처럼, 세상 전체가 흐릿해지고 곧이어 보이는 정경이 변화한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거야. 앉으라구.”

그리고 들려온 음성은,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청아했다. 목소리만으로도 설렐 것 같은 미성의 주인은, 상아색 정장을 빼입은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방금전까지 남자였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자가 되어있다?

“…….”

그 여성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 유지혁은 그제서야 배경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상이 온통 백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저 하얘서, 그들이 존재하고 있는 장소를 제외하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하얀색 일색이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을법한 이질적인 공간. 거기다가 방금 전까지 칙칙해보이던 탁자는 고급진 유리로 되어 있었고, 찻잔에는 꽃무늬가 가득했다.

지혁은 그제서야 방금 여인, 아니 40대 중반쯤 되어보이던 아저씨가 했었던 말을 떠올렸다.

[ 뭐긴 뭐야 지옥이지 넌 죽었고 ]

그 순간 그는 혼이 빠진 사람처럼 천천히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았다.

스윽.

그리고 그 순간, 그가 앉은 자리 앞의 테이블의 유리 위로 찻잔 하나가 그림처럼 떠올랐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물은 분홍빛깔이었다.

“마셔.”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현상을 겪었기 때문인가, 머리는 단숨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전, 죽은 겁니까?”

“뭐, 그렇지. 일단 차부터 마셔. 마음이 차분해질거야.”

지금도 충분히 차분하다고는 생각되지만, 지혁은 순순히 여성의 말을 따라 찻잔을 들어올렸다. 한가로이 찻잔을 기울일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그러고 있었다.

후룩.

마셔보니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냥 끓인 물인데.’

그 순간이었다.

“맞아. 그냥 끓인 물이지.”

유지혁은 깜짝 놀랐다. 그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타이밍이 너무나도 절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신기하게도 곧장 납득할 수 있었다. 차의 효능이 대단한 것인지, 그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야할 지금 이 상황에서도 평소처럼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게 가능한 건 이 차에 여러 가지 기능이 있기 때문이야. 단순히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억제되고 냉철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는 이것은 루칼타라는 곳에서만 존재하는 프리아 잎사귀로 달여낸 것이거든.”

여성은 진심으로 차를 소개하는 것이 즐겁다는 듯 유쾌하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해나갔다. 수다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건 맛 혹은 효능의 이야기일 뿐이고, 진짜 중요한 건 차에 너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는 거야. 내면이 중요하다는 얘기지.”

기억?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마치 원래 있었다는 듯 무언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인간 유지혁으로써의 기억.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 당연했어야 하는데, 잠깐 정신이 나가서 잊고 있었던 것처럼 생생한 내 삶의 편린들.

“유지혁. 나이 20살. 9년전 교통사고로 부모님과 막내 여동생이 죽고 남은 것은 자기보다 두 살 어린 여동생 유은서뿐. 그마저도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동생은 하반신 마비. 거기다 본인은 선천성 질환으로 주마다 병원에 들러야했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려서부터 일을 했다. 그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내 손에 죽어버렸군.”

그의 프로필을 읊는 여성의 어조는 평이했다. 그러나 마지막 말은 그를 흠칫하게 했다.

“먼저 내 소개를 해야겠군. 나는 너를 죽인 장본인이자, 너를 이곳으로 소환한 존재야. 저승사자… 정도로 얕보여도 상관은 없지만 그건 그냥 누군가의 망상이 만들어낸 잔재일 뿐이고 나는 그냥 나야. 니 기준으로 보면 전지전능한 존재. 그 정도로 해석이 되겠네. 심플하게 그냥 신이라고 생각하던지.”

당신은….

‘어라…?’

말이 나오지 않아.

마치 잉어처럼 입을 뻐끔뻐끔 할 수는 있어도 음성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말을 할 수 있었는데 실로 황당한 일이었다.

지혁의 의문은 자칭 신이 해결해주었다.

“일단 임의로 말을 못하게 해뒀어. 해줘야할 말이 좀 많아서 도중에 끊고 싶질 않아. 물론 나는 속으로 말해도 들을 수 있으니 큰 의미는 없지만… 말하는 도중에 딴지를 걸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해둬.”

신은 딸깍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새삼 그가 마시고 있는 차의 색이 눈에 띄었다. 하얀색. 쌀뜨물처럼 새하얀 색의 액체가 담겨있었다.

“이 세상엔 많은 차원과 행성이 존재하지. 사실 나도 몇갠지 몰라. 상상 속의 세상도 많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도 터무니없이 많아. 니가 살아온 그루아… 그러니까 ‘지구’가 속한 차원도 그 중 하나에 속하지. 너는 그곳에서 24년의 시간을 살고 내 부름을 받기 위해 죽게되었다. 이런 얘기야.”

그야말로 무자비한 폭력이다. 부르기 위해서 죽인다니. 눈앞의 여성이 정말 말대로 신적인 존재라면 한낱 인간 한명의 생명 따위를 앗아가는 일에 별다른 느낌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당사자의 입장으로는 기가 찰 일이었다.

“애당초 미련도 별로 없었겠지만 너의 목숨이 그렇게 대단한 가치가 있지는 않았어. 니 삶이 불행하기 때문이 아니야. 인간의 일생이라는 건 그 정도의 가치일 뿐이거든.”

지혁은 멀뚱거리며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지혁을 힐끔 쳐다본 그녀가 양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좋아. 일 얘기를 해보자고. 너는 선택할 수 있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지구에서의 삶을 연장해 나갈 것인가.”

새로운 삶?

“나는 누군가가 죽는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야. 그런데 너는 지금 나를 만나고 있잖아. 그 이유는 내가 너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야. 반대로 말하자면 나는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엔 그 어떤 존재와도 만날 일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권태롭지.”

설마 심심해서 자신을 불렀다, 뭐 이런 말이라도 하려는 걸까.

“맞아. 나는 심심했거든. 그래서 정말 이것저것 다 해봤어.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야. 차원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차원 하나를 그대로 복사해서 몇 가지 설정을 바꿈으로 인해 두 차원간의 차이가 어떤 과정으로 벌어지는가도 확인해보고.”

어차피 말을 할 수도 없었지만,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세상이 생겨버렸지. 평행세계라는 느낌이랄까. 지구만 하더라도 수백개의 세계가 존재해. 같은 지구라도 내가 몇 가지 설정만 추가하면 모습이 확 바뀌거든.”

지혁은 그녀의 설명을 경청했다. 중요한 얘기만 한다고 했다. 신이라면 분명 지혜로울 것이고, 지금 하는 이야기는 앞서 했던 것처럼 사담이나 잡담 등이 아니라 중요한 정보라는 뜻이 된다. 앞으로 자신이 가야할 곳이 그가 만든 평행세계라거나 뭐 그런 전개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였다.

쿵.

유리탁자 위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군데군데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회색빛깔의 돌. 헌데 돌의 모양이 조금 이상하다.

‘11855?’

돌은 마치 누군가가 조각이라도 한 것처럼, 숫자의 형태로 되어 있었다.

“이건 니가 보유한 포인트야. 자세한 건 귀찮으니까 생략하고, 그냥 니가 쓸 수 있는 포인트라는 것만 알아둬.”

말을 마친 신은 목이 타는 것인지 찻잔을 다시 들어 올려 한 모금 머금었다.

“니가 살아나려면, 여기있는 포인트를 모두 사용해야만 해. 1포인트도 빠짐없이.”

그렇게 말한 여성은 찻잔을 내려놓고서 지혁을 쳐다보았다.

“지금부터 포인트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그녀는 장난스럽던 모습과는 다르게 지금까지 중에서 제일 진지한 모습이었다. 지혁은 거기서 포인트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인식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게 이 포인트의 진가라고 할 수 있어. 니가 다시 지구로 돌아갔을 때 100억원을 가지고 시작하길 원한다고 하면 바로 들어주지. 지구로 돌아갔을 때 그림같이 잘생긴 남자로 환생하는 것도 가능해, 원한다면 성별을 바꿔줄 수도 있어. 그리고 이 경우엔 너의 동생을 비롯한 모든 인간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원래 그랬었다는 설정이 적용되지. 지구의 모든 인간들이 너의 생김새가 바뀐 것에 이상함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뜻이야.”

그녀의 말이 끝난 순간 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만약 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포인트의 활용가치는 무궁무진한 셈이다.

‘실현하기 힘든 일일수록 많은 포인트를 필요로 하겠지.’

11855라는 포인트가 얼마만큼의 일을 해낼 수 있느냐가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당연한 수순이지만 포인트는 그러한 요구조건에 따라서 소모되고 너의 생각대로 부탁에 따라 소진되는 양에 차이가 존재해. 여기의 11855라는 것은 임의로 니가 보유한 포인트를 알아보기 쉽게 구분해놓은 거야.”

예상대로 까다로운 부탁일수록 포인트가 많이 들어가는 시스템인 듯하다.

“방금 말했던 것으로 예를 들자면, 100억원을 받는다는 조건은 1포인트. 성형은 5포인트, 성별을 바꾸는 것도 5포인트… 정도겠군.”

‘…?’

100억원을 주는 것이 1포인트라고? 게다가 다른 것들 역시 그것에 비해 높을 뿐이지 들어가는 포인트는 굉장히 낮았다. 그렇다면 성형은 500억의 가치가 있다는 걸까?

아니, 그냥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인간의 기준을 통해 신의 언행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신이 내어준 차의 기능 때문인지 지혁은 굉장히 냉정하게 그 사실을 자각하고서는 관련된 생각을 멈추었다.

여하튼 이게 사실이라면, 11885라는 포인트는 어마어마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

그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지혁은 신을 쳐다본 뒤에 눈을 깜빡였다.

“시간은 건드릴 수 없어.”

마치,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어. 죽은 니 가족을 살릴 수도 없고, 그들이 살아있던 시절의 유지혁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 니가 지구로 가길 원한다면 너는 지구에서 새 삶을 찾아갈 수 있겠지만, 그건 니가 죽고난 다음부터 시작될 일이야.”

신. 독심술을 사용하는 것. 그것을 넘어, 신은 지혁의 내면 깊은 곳에 잠들어있는 간절한 바램 단 하나도 놓치지 않은 것 같았다. 그에게 있어 소원이라는 것은, 죽은 가족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유지혁으로 살아가는 건 가능해. 넌 아직 완전히 죽었다는 판정을 받은 것은 아니거든. 기적적으로 영원할 것 같은 잠에서 깨어나, 본래 살아야했던 인생을 찾기를 원할까봐 다소 강제적으로 불러들일때는 항상 그렇게 여지를 남겨놓지. 실제로 본래의 삶을 이어가는 경우도 많고. 너는 내가 일방적인 폭력을 휘두른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까지 매정하지는 않단 말이지.”

신의 말이 이어졌으나, 들려오지 않는다. 아니, 들리기는 하지만 아무런 느낌도 생기지 않는다. 이전의 삶을 보다 좋은 환경에서 이어나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곳에 소환된 것은 대단한 축복인데도.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열망이 빠르게 식었기 때문에.

그것은 허탈함을 넘어 공허함에 가까웠다.

그런 지혁을 힐끗 쳐다본 여성은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문제가 있어.”

그녀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서, 기울이기 직전에 말했다.

“이러한 조건이 있을 때, 너는 주어진 포인트를 다 쓰기 힘들 것 같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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