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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군주
276.
“욕 다했으면 그만 가자. 시끄러워 죽겠다.”
“오빠, 욕이라니 무슨 소리예요?”
“너희 셋이 쏙닥인 거 내 욕한 거 아니야?”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시네요. 정말 못 말려.”
“내가 뭘?”
“있지도 않은 얘기했잖아요.”
“거짓말하고 있네.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말하는 거 다 봤거든.”
“쳐다보면 욕하는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쳐다보는 눈빛이 그랬어.”
“정말 눈치 없어. 바보·멍텅구리·쪼다·천치·말미잘·해삼!”
“볼기짝 맞고 싶어?”
“여기서 때리게요? 제 엉덩이 다른 사람들이 봐도 돼요?”
“이게 정말... 아오오. 관두자.”
“메롱!”
혀를 내밀고 놀려대는 하연이와 싸워봐야 나만 우스워져 고개를 돌리고 앞으로 걸어갔다.
이길 수 없을 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 달려드는 건 바보나 할 짓이었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초대 국가 주석이 된 마오쩌둥(모택동, 毛澤東)은 16전법을 사용했다.
敵進我退(적진아퇴), 敵退我追(적퇴아추), 敵避我打(적피아타), 敵駐我擾(적주아요)
적이 진격하면 아군은 퇴각하고, 적이 후퇴하면 아군은 추격하고, 적이 피곤하면 아군은 타격하고, 적이 머무르면 아군은 교란한다.
사랑싸움도 위와 다를 것이 없었다. 하린이와 하연이가 강하게 나오면 뒤로 잠시 물러나 관망하고, 움츠러들면 강하게 치고 나가고, 지치면 조이고, 조용히 내 얘기를 들으면 어르고 달래면 됐다.
「오빠, 은하 언니 친구 신청해야지.」
「알았어.」
“은하야.”
“응?”
“친구 신청하면 받아.”
“그게 뭔데?”
“그냥 받아.”
“알았어.”
- 모모님이 은하님께 친구를 신청했습니다. 동의하면 ‘예’, 동의하지 않으면 ‘아니오’라고 말해주세요.
“예!”
- 모모님과 하린님은 친구가 됐습니다. 귓속말을 원하시면 ‘하린 귓속말’ ‘모모 귓속말’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치시면 됩니다. 귓속말은 같은 국가 안에서는 거리에 상관없이 대화할 수 있습니다.
“하연아, 은하 후드 로브 입혀줘.”
“다른 남자들이 언니 쳐다보는 게 그렇게 싫으세요?”
“그런 거 아니야. 은하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그래서 그런 거야. 그러면 우리 신분까지 노출될 수 있어.”
“거짓말하지 마세요. 오빠 눈에서 레이저 나오기 직전이에요.”
“레이저라니?”
“화나서 눈이 벌게요.”
“먼지가 눈에 들어가서 그런 거야.”
“게임에서 눈에 먼지 들어갔다고 눈이 빨개져요? 그걸 핑계라고 대시는 거예요?”
“그.그럴 수도 있잖아.”
“변명이 너무 궁색하네요. 화가 나서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데, 한다는 변명이 먼지라니... 쯔쯔쯔쯔.”
“마음대로 생각해. 네가 생각하는 거 아니니까.”
“그냥 맞으면 맞다. 좋으면 좋다 말하면 안 돼요? 그러면 끝날 일을 왜 아니라고 끝까지 우겨요? 평소에는 아주 쉽게 인정하면서, 가끔가다 아무 일도 아닌 일에 왜 그러는 거예요?”
“.......”
하연이 말처럼 은하 얼굴과 몸을 더듬는 눈알을 몽땅 파버리고 싶었다. 머리를 난도질해 기억까지 없애고 싶었다.
그러나 귀족이라도 황제가 있는 수도에서 함부로 사람을 죽이면 처벌을 면할 수 없었다. 눈이 뒤집힐 만큼 화가 끓어올랐지만, 참아야 했다.
‘이런 감정이 올바른 걸까?’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다른 남자가 은하 옆에 있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생각만 해도 화가 솟구쳐 참을 수가 없었고, 화가 나 잠도 오지 않았다.
말만 그렇게 한 것이지 속마음은 은하를 평생 곁에 두고 만지고, 안고, 사랑하고 싶었다.
이율배반적인 내 모습이 너무 싫었지만, 다른 누군가가 은하를 안고 만지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아닌 척 행동하는 내 모습이, 은하에게 쌀쌀맞게 구는 내 모습이 추하다 못해 역겨웠다.
“나 먼저 간다.”
“오빠, 온 김에 밥 먹고 가자.”
“집에 가서 먹어. 밖에서 먹는 음식 별로야.”
“계속 이럴 거야?”
“알았어.”
하린이가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썼다. 화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화난 것으로 내가 억지를 부려 생긴 일로 더는 짜증을 부릴 수 없었다.
잘못했다고 판단하면 바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면 상대도 크게 기분 나빠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는 게 싫어, 사과하는 것을 지는 것으로 잘못 생각해 억지를 부렸다.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는 말처럼 쓸데없는 자존심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했다.
나는 대범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옹졸한 사람도 아니었다. 잘못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재빨리 숙이고 꼬리를 내린 후 하린이가 잡아끄는 대로 종이 인형처럼 휘청거리며 따라갔다.
포털이 있는 곳은 수도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값비싼 고급 식당이 근처에 여럿 있었다.
하린이가 잡아끈 식당은 돈 많은 평민과 준 귀족들이 주로 이용하는 식당으로 귀족들만 찾는 식당만은 못해도 의자도 안락하고, 식탁도 깨끗하고, 음식도 정갈하게 나왔다
두툼한 스테이크와 신선한 채소 샐러드, 고소한 크림스프, 달콤한 아이스크림, 상큼한 포도주 등으로 가볍게(?) 점심을 먹었다.
자리에 앉자 하린이와 하연이, 은하는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은지 2시간 동안 입을 쉬지 않고 놀리며 수다를 떨었다.
음식도 입에 맞는지 하나씩 맛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음식값을 지불할 때는 셋 다 이마에 고랑을 깊이 파며 불만 가득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은화 50개라니 너무 비싸다. 은화 20개면 충분한 거 아닌가?”
“은하 언니, 10개면 적당해요. 20개도 바가지예요.”
“무슨 소리야. 5개면 딱이야. 안 그래 오빠?”
“5개가 아니라 1개도 아깝다. 이런 걸 돈 주고 사 먹다니... 집에 가서 밥 먹자고 했잖아.”
“오빠는 집밥에 너무 길들여졌어. 솔직히 집밥보다는 여기 음식이 더 맛있어.”
“맞아요. 이건 정통 유럽식이잖아요. 이도 저도 아닌 집밥보다는 훨씬 나아요.”
“그렇게 집밥이 맛이 없어?”
“맛있어요.”
“그런데 왜 그래?”
“싫다는 게 아니라 오빠 입맛에 맞춰 음식을 만들어 서양식도 아니고, 한국식도 아닌 이상한 요리가 됐다는 뜻이에요. 스튜만 해도 부대찌개인지 구분이 안 되잖아요.”
조르주 준 남작에게 영지를 넘겨받고 한동안 음식이 느끼하고, 텁텁해 먹는 게 고역이었다.
내가 그런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걸 안 레이첼이 채소를 많이 넣고, 양념도 칼칼하게 하면서 하연이 말처럼 이도 저도 아닌 퓨전 음식이 됐다.
그러나 나는 마음에 쏙 들었다. 큼직한 고기와 채소가 왕창 들어간 칼칼한 스튜, 기름을 최대한 빼고 겉을 바삭하게 구운 두꺼운 스테이크, 달지 않고 톡 쏘는 맛이 가미된 소스, 달걀과 함께 먹는 바삭한 베이컨과 매운 고추, 해산물을 잔뜩 넣고 매콤하게 볶은 리소토, 담백하면서 고소한 빵까지 레이첼의 식단이 너무 좋았다.
하린이가 직접 해주는 김치 찌개, 된장 찌개, 꽁치찌개, 콩나물무침, 멸치 고추 볶음 등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The Age of Hero에선 절대 먹을 수 없는... 학교와 대기업 식당에선 학생과 직원들을 위해 일부 한국 음식을 팔지만, 밖에서는 먹을 수 없음... 음식이었다.
그리고 나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린이와 하연이도 레이첼이 준비한 음식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정통 유럽식 요리를 먹어 그게 더 맛있다고 한 것뿐이지 둘 다 토종 한국인이라 기름기 많은 서양식을 며칠 먹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사래를 칠 게 분명했다.
“언니는 왜 게임하지 않았어요?”
“시간이 없었어.”
“변호사들도 The Age of Hero에 사무실 개설해서 의뢰인 만나고, 변론 준비한다고 들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아니야. 맞아.”
“그런데 언니는 왜 안 했어요? 시간이 4배나 많아 일하기가 훨씬 수월한데.”
“내게 사건을 의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이라 캡슐 살 돈도, 캡슐방에 갈 돈도 없어. 그리고 나도 시험 붙고 연수원 나와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The Age of Hero에 사무실 차릴 시간도 없었고.”
“아아 그렇구나.”
대한민국 법원도 시대적 추세에 맞게 내년 1월부터 일부 재판을 The Age of Hero에서 열 계획으로 대학가가 몰려 있는 수도 크라쿠푸스 동쪽에 건물을 짓고 있었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배경은 많은 사람이 The Age of Hero를 이용하는 것도 있지만, 4배나 긴 시간 때문이었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려 민원처리가 계속 늦어져 국민의 지탄을 받아오던 법원은 부족한 인력을 4배 많은 시간으로 대체하기 위해 The Age of Hero에 법원을 짓게 됐다.
관공서들이 The Age of Hero에서 민원 서비스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으로 국회와 경찰도 조만간 건물을 짓고 활동할 예정이었다.
시간을 4배나 길게 쓴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먹고 배설하는 것만 해결할 수 있다면 The Age of Hero에선 현실보다 4배 긴 수명을 누릴 수 있었다.
그것도 늙고 병든 몸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젊고 튼튼한 몸으로... The Age of Hero에선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40살 중반 이상은 먹지 않았다... 살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The Age of Hero에 열광하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불덩어리를 날리고, 치타처럼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것도 열광하는 이유였지만, 4배나 긴 수명이 사람들을 The Age of Hero로 이끌었다.
현실에서 흐르는 시간은 같지만, The Age of Hero에선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걸 느낄 수 없었다.
이런 기술은 오직 The Age of Hero만 갖고 있는 기술로 다른 게임은 가상현실을 구현하지도 못해 시간을 4배 길게 쓰는 건 생각하지도 못했다.
과학자들은 빠르면 30년 이내에 가상현실은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현실보다 4배 긴 시간은 100년이 지나도 구현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 말은 앞으로 최소 100년 동안은 The Age of Hero를 따라잡을 게임이 없다는 뜻이었다.
글로벌 기업들이 앞 다투어 The Age of Hero에 투자하고, 회사를 설립하는 것도, 국가까지 나서 다가올 전쟁의 서막을 준비하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최소 100년간 세상을 휘어잡을 게임,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게임이 The Age of Hero였다.
그리고 4배로 길어진 인생을 살 수 있게 해줘 앞으로 현실보다 The Age of Hero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게 확실해 수많은 기업이 ㈜판타스틱에 투자하려 혈안이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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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