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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254. 결혼
“손주 사위, 우리 개망나니 데려가 줘서 정말 고맙네. 선머슴을 누가 데리고 살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제 한시름 덜게 됐네.”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착한 손녀딸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골칫덩어리를 끌어안으면서 고맙다니 살다 살다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는구먼. 그래도 기분은 아주 좋군. 손녀가 예쁘다고 하니. 하하하하.”
“우리 손녀 철이 없어도 많이 사랑해줘요. 마음은 정말 따뜻한 아이예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예쁜 소년 주셔서 고맙습니다. 할머니.”
“행복하다니 안심이 되네요. 고마워요.”
“나는 사위만 믿겠네. 내 마음 알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잘 살겠습니다. 장인어른.”
“그럼. 잘 살아야지. 나는 앞으로도 딸 얘기는 안 들을 거야. 사위 얘기만 들을 거니까 내 마음 잊지 말게.”
“알겠습니다.”
“응석받이로 키웠어요. 그래도 우리 딸 잘 부탁해요. 엄마라 그 말밖에는 못 하겠네요. 미안해요!”
“저에게는 둘도 없는 동반자입니다. 끝까지 사랑하고 아끼겠습니다. 장모님.”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결혼식은 현관 앞 잔디밭에서 주례도 없이 반지를 서로의 손에 끼워주고, 결혼서약서를 같이 읽고,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입장부터 인사까지 15분 정도 걸린 짧은 결혼식으로 집에서 걸어 나오는 시간과 할아버지와 할머니, 장인어른과 장모님 덕담을 듣는 시간을 빼면 7~8분이면 끝날 만큼 아주 간단한 결혼식이었다.
세태가 변하며 조촐한 결혼식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여전히 호텔에서 으리으리한 결혼식을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보여주는 것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사회 전반에 깔리며 우리처럼 주례 없이 결혼식을 올리는 커플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였다.
“하연아, 고마워.”
“언니 많이 사랑해주세요. 아셨죠. 오빠?”
“하린이도 사랑하고, 너도 사랑할 거야. 똑같이.”
“오늘은 언니 결혼식이에요. 그런 소리하는 거 아니에요. 무조건 언니만 사랑한다고 하세요.”
“싫어.”
“오늘은 그래야 한다고요.”
“아니. 죽어도 그런 말 하지 않을 거야.”
“고집쟁이.”
하연이 말이 맞았다. 오늘은 평생 한 번밖에 없는 행복한 결혼식 날로 하린이와 하연이를 똑같이 사랑해도 하린이만 사랑한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말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담겨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미워한다고 매일 반복적으로 말하면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수도 있었고, 죽도록 미워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어른들이 혼내는 것이었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도 없지만, 말 속에 힘이 깃들어 있어 말한 대로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고집을 피운 건 그 때문이었다. 말한 것처럼 될까 봐 겁이 나서.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사랑한다는 다짐과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약속이 없어도 하연이는 너무 사랑스러워 미워할 수가 없었다.
엉뚱한 얘기와 고집으로 나를 곤란하게 할 때가 많았지만, 그건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 성격에 문제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곤란하게 할 때보다 도움을 주고 위로해줄 때가 훨씬 많아 옆에만 있어도 위로가 됐다.
“은하야, 미안해.”
“아니야. 보기 좋았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너도 어서 빨리 좋은 남자 만나. 나 때문에 속상해하지 말고.”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미 만났으니까.”
“정말?”
“응.”
“그러면 나도 소개해줘. 아니다. 내가 만나는 건 좀 그렇겠다. 미안해! 이상한 얘기 해서.”
은하가 만나는 남자가 있다고 하자 보여 달라고 했다. 은하가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말이었지만,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은하와 내가 남들처럼 평범한 친구였다면 보여 달라는 게 맞았지만, 나와 은하는 첫사랑이자 첫 남자 첫 여자였다.
은하가 만날 남자에게 그림자도 보여줘선 안 될 사이로 결혼할 남자가 생기면 기억 속에서도 영원히 사라져야 할 사람이었다.
‘사람 마음 참 간사하네. 남자가 생겼다고 하니까 왜 기분이 나쁘지? 짜증도 나고, 화도 나고. 사람 마음 참 복잡하네. 하아...’
은하를 두고 결혼식을 올리자 미안한 마음에 잘됐다고 생각했는데, 10초도 지나지 않아 화가 치밀었다.
이런 걸 이기주의의 극치라고 하는 것이다. 가질 수 없으면서도 남 주기는 아까워하는 것으로 양아치나 할 짓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화가 멈추지 않았다. 올바른 생각과 감정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인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남자 생겼다니까 기분 나빠?”
“아.아니.”
“그럼 좋아?”
“그.그럼.”
“정말?”
“하아... 모르겠어. 처음에는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할수록 화가 나.”
“그거 너무 비양심적인 생각 아니야.”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괜찮다니?”
“네가 정말 기뻐했다면 나 마음이 아파서 펑펑 울었을 거야. 그런데 네가 화내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기뻤어. 나에 대한 너의 애정이 식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지금 양아치 짓하는 거야. 그것도 아주 파렴치한 짓을.”
“그래도 상관없어. 나는 좋으니까.”
정말 기분이 좋은지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대체 뭐가 좋다는 것인가? 결혼한 남자가 전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말에 화를 내는 것이.
야구방망이를 휘둘러도 모자랄 짓으로 내가 은하였다면 아구창을 날렸을 것이다. 턱이 돌아가도록.
“축복해줘도 모자랄 판에 화는 내는데, 뭐가 좋다는 거야?”
“애정을 확인했으니까.”
“아니라고.”
“애정이 없으면 화를 내지도 않아. 무시하지.”
“하아...”
은하 말이 맞았다. 내가 화를 내는 건 은하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하린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은하와 재결합했을 것이다. 그만큼 내게 은하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여자였다.
“너 그 남자를 영원히 만날 수 없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당연히 그래야지. 만나서 좋을 거 없으니까.”
“그런 뜻이 아니야. 넌 절대 만날 수 없다고.”
“해외로 나갈 거야?”
“바보!”
“갑자기 왜 바보라는 거야?”
“곰곰이 생각해봐. 내가 말한 남자가 누구인지. 생각해내지 못 하면 넌 정말 바보·천치·멍텅구리·쪼다야.”
“.......”
무슨 뜻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영원히 만날 수 없다고 해서 만나면 안 되는 사이라 나와 그 남자를 은하가 만나게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절대 만날 수 없다고 했다. 그건 만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뜻으로 은하가 남자를 따라 해외로 나간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러나 내 생각이 모두 틀렸는지 바보·천치라며 화를 냈다.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자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안해할까 봐 남자가 없는 데도 있다고 거짓말한 게 분명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로 은하가 맡은 일을 생각하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해 연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모모 재단과 모모 시큐리티 설립에 관한 모든 일을 은하가 맡고 있었다. 허태영이 변호사 사무실을 기웃대 다른 변호사에게 맡길까도 고민했지만, 모모 재단의 실체가 드러날 수도 있어 은하 말고는 맡길 변호사가 없었다.
그 일 외에도 히어로 걸스 명예훼손에 따른 형사고소와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도 은하가 맡고 있었고, 인권변호사를 모집해 모모 인권변호사 법률사무소를 만드는 일도 은하가 주도하고 있었다.
‘아니지. 전쟁터에서도 사랑이 싹트는데, 인권변호사 중에 눈이 맞은 남자도 있을 수 있지. 대체 어떤 새끼가 은하 마음을 뺏은 거지? 생각할수록 화가 나네. 이범석 상사에게 어떤 놈인지 알아봐 달라고 할까? 병신! 하다 하다 별 거지 같은 생각을 다 하네. 미친 거 아니야?’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어?”
“어? 아니야.”
“빨리 들어가자. 오늘 같은 날 찐하게 한잔해야 한다고 어른들이 너 오기만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셔.”
“옷 갈아입고, 게임 잠시 접속했다가 갈게. 그동안 네가 모시고 있어.”
“알았어.”
하객은 하린이네 가족과 친척 10명, 은하와 다현이, 민지, 수영, 연아, 이범석 상사, 장명석 중령, 독수리 경호팀이 전부였다.
고등학교 친구는 한 명도 부르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잘 알던 녀석들이 바뀐 모습을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입방정을 떨고 다니면 기레기들이 꼬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 나와 은하, 하린이와 정이슬 사이도 알게 된다.
미안했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때 그때 녀석들을 만나 회포를 풀기로 했다.
은하네 친척 10명도 마음에 걸렸지만, 하린이네 집에서 여러 번 만난 고모부, 고모, 이모부, 이모, 삼촌들로 초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우리 얘기를 하지 못하게 주의를 단단히 줘 당분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허태영이 은하 주변을 맴돌고 있어 안심할 수 있었다. 놈을 놔두면 두고두고 화근이 될 수 있어 다음 주 장명석 실장의 정보부가 꾸려지고, 이범석 상사가 추천한 경호팀 요원들이 배치되면 쥬디가 혜안으로 알아낸 비리를 이용해 놈을 끝장낼 계획이었다.
“하연아, 경비실에 음식 좀 가져다주고 와.”
“네, 오빠. 다현이 언니! 나랑 같이 경비실에 음식 좀 가져다주러 가자.”
“알았어.”
독수리 경호팀은 집을 지켜야 해 3명은 경비실에 있었고, 3명은 다음 근무를 위해 술을 먹지 못해 했다.
결혼식 날에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는 대원들을 위해 하연이에게 음식과 음료수를 가져다주게 했다.
이범석 상사가 가져온 이력서 20통에 대한 심사는 다음 주 월요일 면접을 보고 뽑을 예정이라 독수리 경호팀 빼고는 경비 맡을 인원이 없었다.
장명석 중령이 선발한 정보팀 선발대 10명도 다음 주 월요일 면접을 통해 이상이 있는지 확인한 후 수요일부터 출근할 예정이라 오늘은 독수리 경호팀이 수고해줘야 했다.
집에서 경비실까진 거리가 500m나 떨어져 있어... 직선거리는 300m로 울창한 나무와 지형으로 인해 길이 구불구불해 거리가 늘어남... 걸어 다니기에는 너무 멀어 전기로 움직이는 4인용 전동골프카 4대를 구입했다.
하연이와 다현이가 음식을 싸 들고 경비실로 가자 2층으로 올라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게임에 접속해 시푸아 백작과 레오니 백작 부인을 만나보고 어른들이 모여 있는 응접실로 갔다.
주방이 작진 않았지만, 식탁이 10인용이라 은하와 다현이네, 독수리 경호팀이 사용하자 꽉 찼다.
그래서 은하네 식구는 작은 수영장 옆의 넓은 응접실 앉아 음식과 술을 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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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