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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푸아 백작
243.
레오니 백작 부인은 아틸라 제국에 10명밖에 없는 공작 가문인 에이다 공작 가문의 첫째 딸로 20살 때 시푸아 백작에게 시집왔다.
10대 도시 이듄에서 서쪽으로 2,000km 떨어진 에이다 공작 가문은 호르빌 평야와 호르빌 산맥의 광대한 영토를 소유한 대지주로 1,000년을 이어온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그러나 척박한 땅과 쓸모없는 산이 영지의 대부분을 차지해 시푸아 백작 가문처럼 부유한 가문은 아니었다.
또한, 여러 번 정쟁에 휘말려 입지도 매우 좁아진 상태로 이름만 공작이었지, 가문의 힘은 자작 수준에 머물렀다.
그래도 공작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황제가 특정 귀족의 힘이 커지는 걸 극도로 경계해 영지전을 제한했고, 땅이 워낙 척박해 가져 봐야 골치만 아파 탐내는 귀족이 없었다.
하지만 두 가문의 결합은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백작 가문에 공작의 딸을, 그것도 정실부인에서 나온 첫째 딸을 시집보내는 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현대 사회는 돈만 많으면 출신 성분 따위는 따지지 않았지만, 아틸라 제국의 귀족들은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겨 두 단계나 아래인 가문과 혼인을 하는 걸 수치로 여겼다.
그런 풍토 속에서도 에이다 공작 가문은 기울어져 가는 가문을 살리기 위해 시푸아 백작 가문에 큰 딸을 보내는 수치를 참아내야 했다.
수치를 참은 덕분에 에이다 공작 가문은 피폐해진 가문의 창고를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백작이 죽으면 원조도 끊겨 다시 예전의 궁핍한 생활로 돌아가야 했다.
백작 부인이 남편을 살리려는 이유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속셈도 있었지만, 기울어져가는 친정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건강한 모습만 찾게 해주세요. 그러면 약속한 세 가지 보상 외에도 또 다른 큰 보답이 있을 거예요.”
“어떤 보답을 말하는 겁니까?”
“남작님의 영지를 5배로 키워드릴게요. 그리고 작위도 자작으로 올려드리고요.”
“그게 가능합니까?”
“돈이면 못할 게 없지요.”
“흐음... 좋습니다. 백작님을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살려드리겠습니다.”
“그 말 지킬 수 있는 거죠?”
“네.”
“희언이 있어선 안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알다마다요.”
희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실없는 소리로 백작 부인을 기만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지금껏 백작 부인을 상대로 백작을 살릴 수 있다며 큰소리 뻥뻥 친 사람(NPC)이 수백 명도 넘었다.
처음에는 한껏 기대했던 백작 부인도 실망이 늘어가자 화가 분노로 변해 병을 고치겠다고 큰소리친 놈들을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았다.
나 역시 그렇게 희언을 하면 죽이겠다는 소리로 내가 영지를 가진 귀족이었지만, 시푸아 백작 가문의 힘이면 나 하나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간단했다.
그건 시푸아 백작 부인 좌우에 서서 살벌한 눈으로 나를 감시하는 두 명의 여성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왼쪽은 마법사, 오른쪽은 기사로 둘 다 프로보스트 상급(왼쪽 여자는 마법사라 마도사 상급)은 돼 보였다.
프로보스트 상급이면 소드 마스터 직전 단계였다. 한 단계도 안 되는 작은 차이였지만, 벽을 넘지 못한 자와 벽을 넘은 자이 차이로 실력은 하늘과 땅만큼 컸다.
그러나 칼을 든 NPC라면 프로보스트만 도달해도 바랄 게 없는 단계로 상급이면 일인 군단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일곱 가지 선물 중 하나로 고른 니콜라스는 프로보스트 중급으로 빛나는 눈으로 나를 쏘아보는 두 여자보다 아래였다.
그리고 니콜라스는 팔 한쪽이 없고, 나이도 많아 능력치가 크게 떨어져 하급 수준에 간신히 머물고 있어 두 여자의 상대가 안 됐다.
지금 내 수준이 프로보스트 상급에 간신히 턱걸이 한 정도였다. 그것도 스킬과 칭호, 장비 덕분에 상급이었지 순수한 전투 능력만 따지면 두 여자보다 못했다.
그런 여자를 두 명이나 백작 부인 호위로 쓸 만큼 시푸아 백작 가문의 힘은 내가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높은 곳에 있었다.
“제가 백작님을 건강히 살려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전과 같이 젊고 활기찬 모습으로 돌려놓는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정말 그렇게만 해준다면 돈과 아이템, 농노, 영지와 자작 외에도 원하는 소원 한 가지를 더 들어드릴게요.”
“희언은 없는 겁니다.”
“당연하죠.”
「어때?」
「모두 사실이에요. 하나도 거짓이 없어요.」
「기억은 읽었어?」
「네. 하지만 특별한 것은 없어요.」
「그러면 시푸아 백작이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는 거야?」
「지병이 맞아요.」
「어떤 지병?」
「몸이 오그라들었어요. 아주 심하게.」
「근육수축?」
「네.」
「상태는?」
「아주 위독해요. 일주일이 아니라 2~3일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사교계 파티에서 읽었던 것처럼 백작 부인은 독사처럼 차갑고 냉정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거나 상대를 기만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권모술수에 능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상대가 속이면 백작 부인도 그가 한 짓에 맞게 상대를 속였고, 그렇지 않고 진심으로 대하면 백작 부인도 마음을 열고 상대했다.
상대에 따라 성격이 바뀌는 것으로 잘만 사귀면 아주 든든한 아군이 될 수도 있었다.
「옆에 선 두 여자는 건들지 마. 바로 발각될 거야.」
「저도 그 정도는 느껴요.」
「그런데 나에게는 왜 혜안을 걸었어? 내가 그렇게 약해 보였어?」
「약해 보여서 그런 게 아니라 들키려고 그런 거예요. 저 좀 봐달라고요.」
「맹랑한 것.」
「히히히히.」
천재인 쥬디는 머리만 좋은 게 아니었다. 16년 동안 농노보다 못한 삶을 살며 눈칫밥을 하도 많이 먹어 꼬리 아홉 개 달린 구미호보다 눈치가 더 빨랐다.
정확도도 매우 뛰어나 쓱 한번 쳐다보는 것으로 상대가 강한지, 약한지, 건드려도 될 사람인지, 절대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인지도 단번에 알아봤다.
노예 시장에서 내게 혜안을 사용한 건 내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 사람인 걸 정확히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쥬디가 알아본 걸까? 환인이 의도적으로 보낸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인 것 같단 말이야. 이런! The Age of Hero 하면서 의심만 늘었네. 이러다 하린이와 하연이도 누군가 내게 보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 아니야?’
“이거 받으세요. 시푸아 영지로 데려다줄 순간이동 스크롤이에요.”
“감사합니다.”
백작 부인이 내민 스크롤 3장을 받아 마틸다와 쥬디에게 하나씩 넘겨준 다음 쭉 펼쳐 단번에 반으로 찢었다.
- 시푸아 백작성으로 가시겠습니까?“
“예.”
- 시푸아 백작성으로 이동합니다.
위이이이잉
정체를 가리기 위해 후드로브를 깊이 눌러쓰고 순간이동 스크롤을 찢자 메시지 창이 떴다.
예라고 대답하자 스크롤이 하얀빛으로 변해 내 몸을 감쌌다. 빛에 싸인 몸이 빙글빙글 돌아가자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등 갖가지 빛줄기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 시푸아 백작성에 도착했습니다. 즐거운 여행하세요.
“이쪽이에요.”
“감사합니다.”
앞에 커다란 호수를 두고 5층 건물 세 채가 디귿자로 서로 마주 보며 서 있는 시푸아 백작성은 내 영주성과 달리 담이 없었다.
건물을 보호하는 담은 3km밖에 있어 옥상에 올라가야만 집을 둘러싼 방벽을 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호수와 공원, 숲, 근위대 숙소, 훈련장 등 많은 시설이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며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집하고 비교가 안 되네. 우리 집이 오두막이면 여긴 궁전이다.」
「멋지긴 하네요. 그래도 저는 우리 집이 좋아요. 그곳에는 큰오빠와 하린이 언니, 하연이 언니, 레이첼 언니 등 저를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잖아요.」
「맞는 말이야. 그래도 부러운 건 사실이잖아.」
「조금 그렇긴 하네요. 호호호호.」
크고 웅장한 본채 건물에는 담쟁이 넝쿨이 칭칭 감겨있어 고풍스러운 멋을 더했고, 내부 장식도 지난번 게르하르트 백작 가문 사람들을 넘겨주러 갔을 때 봤던 황태자궁만큼 화려하고 웅장했다.
그러나 황태자궁처럼 사치스럽진 않았다. 값비싼 도자기와 장식들로 채워진 황태자궁과 달리 복도와 홀에는 시푸아 가문의 조상들 초상화와 고대 갑옷만 있어 위압감은 들지언정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레오니 백작 부인을 따라 가운데 건물로 들어가 나선형 계단을 타고 5층까지 올라갔다.
넓은 복도를 따라 걷다 한 자루 잘 벼린 날카로운 칼 같은 기사들이 지키는 가운데 커다란 방에 들어갔다.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져 초저녁처럼 어두운 방에는 침대와 탁자 두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방도 로비와 복도처럼 매우 검소해 시푸아 백작 가문이 1,000년 동안 굳건히 버틴 이유를 짐작하게 해줬다.
얇은 커튼이 드리워진 침대에 다가가자 간신히 숨만 붙은 깡마른 남자, 시푸아 백작이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밖에 나가 있어.”
“네, 마님.”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있던 시녀 세 명이 백작 부인의 명령에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인사하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경비가 아주 삼엄하군요.”
“남편이 죽기만 바라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서요.”
“마음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한 가지든 백 가지든 사람이면 누구나 안고 사는 거죠.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이겨낼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이 있느냐 그게 문제겠죠.”
“맞는 말씀입니다.”
1층 홀, 5층 복도, 백작의 방 밖에도 칼을 찬 기사와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수십 명 포진하고 있었고, 건물 밖에는 1,000명도 넘는 기사와 병사들이 눈을 번뜩이며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시푸아 백작이 죽으면 둘째 동생인 오르시아 시푸아가 작위를 물려받는다. 아틸라 제국에선 딸이나 부인에게 작위를 물려주지 않았다. 아들 또는 양자에게 작위를 물려줬다.
딸에게 물려주는 일도 있었지만, 이때는 집안에 남자도 없고, 양자를 들일 수도 없는 상황일 때만 딸에게 작위를 물려줬다.
그러나 임시일 뿐 딸이 남편을 맞이하면 작위는 남편에게 돌아갔다. 대신 성은 여자 집안의 성을 따라야 했다.
우리나라의 데릴사위와 같은 개념으로 사위를 양자로 받아들여 가문을 잇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작위를 넘겨주지 않았다. 쉽게 말해 남이라는 뜻으로 레오니 백작 부인이 양자를 들이기 전에는 동생 오르시아 시푸아에게 작위가 돌아갔다.
백작 부인도 이 때문에 양자를 들이려 여러 번 시도했다. 그럴 때마다 시동생들과 친척들이 들고일어나 큰 싸움이 벌어질 위기에 처해 번번이 뜻을 접어야만 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