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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시대-238화 (238/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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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버린 성과 이름 되찾기!

238.

전종명과 윤선숙은 미친개와 사나운 암고양이였다. 대학 다닐 때 닭살 커플 CC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하는데, 서로 좋아한 적은 있었는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만나면 서로 죽이지 못해 싸웠다.

그러나 이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은 좋아할 땐 불같이 사랑하지만, 싫어지면 얼음보다 더 차가워졌다.

개중에는 싫어지면 더욱 뜨거워져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내는 커플도 있었다. 우리는 이런 커플을 전생의 원수라고 말했다.

전생의 원수가 원수인지 모르고 불같이 사랑한 후 죽도록 미워하는 것으로 전종명과 윤선숙이 그랬다.

10년 가까이 지나서 만났는데도 지난날의 앙금이 가시지 않아 이 자리에 왜 나왔는지도 잊어버린 채 으르렁거리며 싸워댔다.

이런 연놈이 우리나라 최고 대학의 교수라는 게 서글펐다. 대학이 인성이 아닌 지성을 배우는 곳이지만, 교수가 공부만 가르치진 않았다.

수업 중간중간 자신의 가치관을 담아 사담을 늘어놓을 때도 있었고, 행동으로 보여줄 때도 있었다.

제자는 스승의 말과 행동을 먹고 자랐다. 전종명과 윤선숙의 행동과 말을 먹고 자랄 제자들을 생각하자 한숨이 나왔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안다고 해도 영원히 가슴에 묻겠습니다. 그러니 제 성과 이름을 찾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어떻게 알게 됐는지 물어봐도 될까?”

“나도 그게 정말 궁금했는데 당신이 물으니 흥미가 확 떨어지네요.”

“그럼 귀 막고 있어.”

“당신이나 막으세요. 나는 꼭 들어야겠어요.”

“계속 이렇게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끌면 언론에 사건을 터뜨리고 재판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흥분하지 말고 교양인답게 조용히 말로 풀자. 그래도 한때 아버지와 아들 사이였는데 그럴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오랜만에 좋은 얘기 했네요. 우리가 지금은 이렇게 서먹서먹한 사이가 됐지만, 예전에는 둘도 없는 엄마와 아들이었잖아. 감정적으로 처리해선 안 돼.”

“두 분과 제가 부모와 자식으로 행동한 일이 있었다고요?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야 네가 나이가 어려 기억을 못 해서 그런 거겠지. 우리 제법 친한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맞아. 네 기준에는 조금 못 미칠 수도 있겠지만, 남들 눈에는 우리는 아주 다정한 아들과 엄마 사이였어. 신문에도 그렇게 여러 번 났었어. 당신도 기억하죠?”

“그럼. 1면에 났는데 그걸 까먹을 수야 없지.”

“그것 봐. 내 말이 맞잖아.”

“쇼윈도 가족이었어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리고 두 분을 위한 도구였고요. 철저하게 사육된.”

전종명과 윤선숙 그리고 내가 제법 다정한 사이였다니... 쌍욕이 나오려는 걸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어 간신히 참았다.

처음부터 나는 전종명과 윤선숙의 욕심에 의해 길러진 애완동물이었다. 가족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사실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연놈이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뻔뻔하게 떠들어대자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불이 솟구쳐 올랐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으스러지게 주먹을 꽉 움켜쥐자 겁을 먹었는지 연놈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도 피해 의식이 장난이 아니구나. 그런 생각 건강에 좋지 않아. 마음을 넓게 먹고 크게 봐야 한다.”

“네 나이 때는 세상이 다 원망스러워 보일 때야. 충분히 이해해. 제자 중에도 그런 애들이 많으니까. 그러나 이제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 엄마가 널 위해 두 팔 걷고 나설 거니까. 앞으로 어려운 일 엄마가 다 처리해줄게.”

“저 여자보다는 아빠를 믿으렴. 인맥 하면 내가 대한민국에서 최고야. 너 하나 밀어주는 건 일도 아니야.”

“당신과 어울려 다니는 놈들 술 처먹고 계집질 밖에 할 줄 모르는데, 밀어주긴 뭘 밀어준다는 거예요?”

“그러는 당신은 어떻고? 아줌마들하고 몰려다니며 땅이나 사는 주제에. 형필이에게 부동산 투기하는 법이라도 알려주겠다는 거야?”

“술 먹고 계집질하는 방법보다는 그게 훨씬 낫죠.”

“땅 투기는 법에 걸려. 애 쇠고랑 채울 일 있어?”

“미성년자랑 놀아나는 건 합법이에요?”

창피하지도 않은지 연놈은 서로의 치부를 내게 알려주려는 것처럼 큰 목소리로 떠들며 험담에 열을 올렸다.

도긴개긴이라고 몸에 덕지덕지 오물을 묻힌 연놈이 서로 잘났다고 떠드는 모습이 한편의 더럽게 재미없는 콩트를 보는 것 같았다.

“두 분 얘기 들으러 온 거 아닙니다. 사담은 이제 그만 해 주십시오.”

“냉정하기는.”

“너무 차가워졌다. 재미없게.”

“제가 보낸 서류에 동의하면 서명해서 제 변호사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법적인 문제가 없도록 깔끔히 처리해줄 겁니다.”

“안녕하세요. 전형필님 개인 변호사 김은하입니다. 서명한 서류 주시면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협조해주세요.”

“이걸 세상에 공개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하지?”

“맞아요. 이걸 이용해 돈을 요구할 수도 있잖아요.”

“그 부분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걸 받으세요.”

“3억 원?”

“3억 원을 주겠다고?”

“전형필님은 두 분이 중학교 3학년까지 키워준 것에 대한 보답과 물려준 아파트 판매 대금을 다시 돌려드리려 합니다. 각각 3억 원으로 두 분이 이 서류에 사인하면 통장에 바로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6억 원을 준다는 거냐? 훔치기라도 한 거냐?”

“당신은 애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해요? 그 나이에 벌써 성공하다니 정말 대견하구나. 역시 내 아들이야.”

“시간이 없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앞으로 김은하 변호사를 통해 얘기해 주십시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밥은 먹고 가야지?”

“그래. 10년 만에 만났는데 오붓하게 밥이라도 먹고 가자.”

“아닙니다. 가보겠습니다.”

문이 부서지도록 닫고 밖으로 나왔다. 문밖에 서 있던 하린이와 하연이가 품에 안기며 아픈 내 가슴을 위로 했다.

은하를 데려간 건 둘 다 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라 말주변이 없는 내가 입을 놀리다간 말려들 수도 있었고, 오래 보고 싶지도 않아서였다.

그리고 성과 이름을 바꾸는 건 법적인 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은하가 있어야 했다.

따르릉따르릉

“받았어.”

“계좌 찍어줘.”

“지금 보낼게.”

“알았어. 바로 입금할게.”

“10분 후에 약속한 방으로 갈게.”

“어.”

내가 빠지자 만담에 흥미를 잃었는지 은하가 요구한 서류에 선선히 서명하고 넘겨줬다.

더 정확히 말하면 3억 원을 줘서 서류에 서명한 것이었다. 6억 원을 선뜻 줄 정도면 돈을 뜯어내려 일을 꾸민 건 아니란 뜻이었다.

탐욕에 물든 파렴치한 연놈이었지만, 머리가 특출하게 좋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였다.

문제는 그런 좋은 머리를 좋은 일에 쓸 생각은 하지 않고 나쁜 짓에만 동원한다는 것이었다.

“하린아, 은하가 핸드폰에 계좌 보낼 거야. 그리로 3억 원씩 보내.”

“알았어.”

“오빠, 돈을 왜 줘요? 받아도 시원찮을 판인데.”

“키워준 건 사실이잖아. 그러니 줄 건 줘야지.”

“아이를 바꿔치기했어요. 오빠를 위한 게 아니라 자기들을 위해서요. 그건 키워준 게 아니에요. 오빠가 말한 것처럼 사육한 거예요.”

“알아. 그렇지만 어머니 품에 있었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어. 보육원에 갔을 테니까. 그리고 더 나빠질 수도 있었어. 해외로 입양됐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들이 한 행동은 처벌받아 마땅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 덕분에 나를 자식처럼 사랑해준 유모를 만날 수 있었고, 너와 하린이도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들이 나쁜 뜻으로 그랬다고 해도 나는 큰 도움을 받았어. 고마워할 일은 고마워해야 해.”

납치범에게 키워줬다고 고마워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고마워하는 건 어머니가 병원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피의 복수를 외쳤을 것이다. 멀쩡한 나를 바꿔치기해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았으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낳고 바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보다 먼저 돌아가셔서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갈 곳은 보육원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란 하늘빛 보육원 같은 좋은 보육원에 갈 수도 있었겠지만, 사육시설이나 다름없는 곳에 갈 수도 있었다.

그런 곳에 갔다면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범죄자가 되어 교도소를 제집처럼 들락거리고 있을 수도 있었고, 조직폭력배가 되어 칼을 휘두르고 있을 수도 있었다.

입양 전문 보육원에 갔다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으로 팔려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을 당하지 않게 해준 것에 대해. 그것이 고의가 아니라고 해도.

그리고 6억 원을 준 건 다른 뜻도 있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교 보내주고, 아파트를 준 것을 다시 돌려주는 것도 있었지만, 과거를 청산하는 뜻도 있었다.

깨끗하게 과거를 청산해야 돌려받을 게 있을 때 달라고 해도 부끄럽지가 않았다. 돌려줄 것은 주지 않고 받을 것만 달라고 하는 건 쓰레기였다.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선 과거부터 청산해야 한다.

“복수할 거예요?”

“무슨 복수?”

“다운증후군에 걸린 아이와 오빠를 바꿔치기했잖아요.”

“아까 얘기했잖아. 결과적으론 잘된 일이라고.”

“유모를 홀로 쓸쓸하게 돌아가시게 한 일은요?”

“홀로 살게 했다고 죽인 건 아니야. 그리고 가족과 친척이 없어 홀로 사신 것이지 전종명과 윤선숙 때문에 홀로 사신 거 아니야.”

“그럼 이걸로 끝인가요?”

“어.”

“저라면 오빠처럼 하지 않을 거예요. 그들이 저지른 비리를 세상에 공개할 거예요. 그래서 세상사람 모두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할 거예요.”

“그들이 나를 건드리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없어. 그러니 너도 잊어.”

“하지만...”

“이건 명령이야. 무조건 따라야 할 명령!”

“.......”

쥬디가 읽은 전종명과 윤선숙의 기억 속에는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악질적인 범죄가 백 가지도 넘었다.

돈을 받고 교수 자리를 판 일, 세금을 조직적으로 안 낸 일, 미성년자 성폭행한 일, 돈을 주고 여자를 산 일, 지위를 이용해 성관계 요구한 일, 몇몇이 짜고 부동산 사고팔아 차익을 남긴 일, 많은 돈을 받고 불법 과외를 한 일 등 파렴치한 범죄가 백 가지도 넘었다.

명백한 범죄행위였지만, 모른 체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민중의 지팡이 경찰이 아니었다.

나는 정의 사회를 부르짖는 검찰도 아니었다. 나는 부패한 나라를 바로 세우자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정치인도 아니었다.

내 한 몸, 하린이와 하연이, 내가 챙겨야 할 사람의 안전과 행복만 책임지고 싶은 소시민이었다.

조용히, 아무도 몰래, 나와 우리의 행복만 찾고 싶은 찌질한 남자였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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