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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
225. 유모
“오빠는 아버님을 진짜 많이 닮았다. 판박이야.”
“언니, 내가 보기에는 어머니를 더 닮은 것 같은데? 눈과 입 봐봐. 똑같잖아.”
“이마와 코 봐봐. 얼굴 윤곽도. 아버님 닮았어.”
“이상하다. 내가 보기에는 어머니인데... 오빠는 누굴 더 닮은 것 같아요?”
“자식은 부모를 반반 닮는다고 하잖아. 두 분 반반씩 닮았겠지.”
최은실 원장이 준 사진 스무 장을 하린이와 하연이가 보물처럼 소중히 다루며 나와 비교했다.
사진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찍은 것으로 보육원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보육원을 떠날 때 모습까지 1~2년 단위로 찍혀 있었다.
덕분에 부모님의 아기 때 모습부터 20살 가장 빛날 때 모습까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보육원을 떠나는 날 아침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다정하게 끌어안고 찍은 모습은 두 분이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줬다.
‘좋은 곳에 함께 계시겠지? 계실 거야. 반드시.’
“오빠 말이 맞네요. 눈과 입술은 어머님, 이마와 코, 윤곽은 아버님을 닮았네요. 그리고 두 분의 장점만 모아놓아서 그런지 볼수록 잘 생겼어요.”
“그런 말 우리끼리 있을 때만 하자. 다른 사람 들으면 돌 맞는다.”
“아니에요. 오빠 정말 잘 생겼어요. 키도 크고, 몸매도 탄탄하고, 모델을 해도 돼요. 언니, 내 말 맞지?”
“응. 이 세상에서 가장 잘생겼어. 최고야.”
“이거 봐요. 언니도 제 말이 맞는다고 하잖아요.”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쁘다고 나를 좋아하는 너희 눈에 당연히 내가 멋지게 보일 수밖에 없잖아. 그건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이야. 개인적인 기준을 다른 사람도 같은 눈으로 봐야 한다고 말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
“오빠를 별로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 눈과 기준에 큰 문제가 있는 거예요. 아주 심각하게. 사람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평가하면 안 돼요. 안 그래 언니?”
“맞아. 그런 사람은 남을 평가해선 안 돼.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아주 편협한 사람이니까.”
“너희 말이 더 편협하다.”
“그렇지 않아. 다현이와 민지, 수영, 연아가 오빠 좋아하는 것만 봐도 우리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한 거야. 히어로걸스를 사랑하는 남자 팬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수십만 명은 될 거야. 그런데도 다현이네 남자 팬들에게 눈길 한번 안 줬어. 그런 애들이 오빠를 좋아하잖아. 그럼 증명된 거 아니야?”
“옳소.”
“그건 내가 도와줘서 그런 거야. 그래서 생긴 일시적인 호감이야.”
“여자는 남자가 도와준다고 호감을 느끼지 않아. 마음에 들어야 호감을 느끼는 거야.”
“언니 말이 맞아요. 언니하고 저에게 편지와 선물 보낸 남자 100명도 넘어요. 그 중에 잘 생긴 사람도 있고, 부자도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오빠가 처음에요. 왜 그렇겠어요? 마음이 안 가니까 그런 거예요.”
“너희 단체로 정신감정 좀 받아봐. 그러다 단체로 입원하는 수가 있어. 제발 정신 좀 차려.”
“우리가 문제가 아니라 자존감이 낮은 오빠가 문제야. 자존감 좀 높여.”
“높이세요.”
“말을 말아야지. 아휴~”
자존감이 낮다는 하린이에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평균이 50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보다 훨씬 낮은 20~30 정도밖에 안 될 것이었다.
납치범(?)을 부모로 둔 죄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해 그런 것으로 그나마 유모가 끔찍이 아껴줘 바닥을 치진 않았다.
유모마저 없었다면 아주 심하게 낮아 열등감에 빠져 우울증에 걸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가짜 부모에게 버려졌을 때 자살했을 수도 있었고, 미래를 위해 직업군인을 갔다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존감은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높으면 의사 결정력이 커지고, 부정적인 생각도 비교적 낮아졌다.
그러나 지나치게 크면 타인보다 잘났다는 우월감이 생겨 타인의 비판과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고,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반대로 너무 낮으면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고, 열등감과 자격지심에 빠져 심한 우울증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자존감이 낮아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말을 극도로 아끼고, 잘난 척하는 걸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집안 내력이었다. 최은실 원장이 말한 것처럼 부모님 성격을 닮아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한 것이지 자존감이 낮아 그런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내게 부족한 건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낮다는 것이었다.
하린이가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고 말한 건 그 뜻이었다. 자기애가 부족해 자신을 낮게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하린이, 하연이와 생각이 달랐다. 살면서 나 자신을 미워하고 형편없는 놈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비판을 받으면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모자란 것이 있는지 생각하고 있다면 반성하고 고치려 노력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지나치게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 나처럼 자기애가 살짝 부족한 사람보다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끔찍이 아끼는 사람은 타인을 배려할 줄 몰랐다. 어떤 일이든 자신을 중심에 두고 생각해 배려와 존중보다는 자기 이익에 집착했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라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 맞겠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 친구에게까지 그런다면 그건 매우 잘못된 행동이었다.
나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 것이다. 그러나 바보처럼 살진 않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빼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손해 보는 삶을 살 생각이 없었다.
만약 누군가 내 것을 뺏으려 한다면 목숨을 걸고 내 것을 지킬 것이고, 내 것을 탐낸 놈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옮긴 첫 번째 표적이 이은택과 정이슬, 마림 재단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온순한 양으로 살겠지만, 건드리는 순간 성난 사자로 돌변해 놈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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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윽.”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무덤도 남기지 못한 어머니 앞에서도,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곳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잡초만 무성한 유모의 무덤 앞에선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내게 부모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말할 것이다. 유모라고.
나를 키워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큰 소리로 말할 것이다. 유모라고. 내가 지금껏 숨 쉬고 있는 게 누구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목이 터지도록 외칠 것이다. 유모 덕분이라고.
유모가 계셨기에 내가 있을 수 있었고, 하린이와 하연이도 만날 수 있었다. 유모가 없었다면 전종명과 윤선숙에게 버림받는 순간 죽었을 것이다.
운 좋게 살아남았다면 정이슬보다 더한 사람이 됐을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말썽을 일으킨다.
그래야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어릴 때 이야기로 나이가 들면 남의 것을 빼앗고, 무참히 짓밟는 재미에 빠져 인생을 망쳤다.
내가 그렇지 않고 바르게... 이런 성격이 바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클 수 있었던 건, 낳아준 부모의 영향이 아니라 길러준 유모 때문이었다.
나를 끔찍이 아껴줬던 유모는 집에서 쫓겨난 후 홀로 쓸쓸히 홀로 살아가시다가 8년 전 작은 연립주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그때 나이가 62살로 심한 고혈압과 당뇨로 고생하시다가 지켜보는 사람 한 명 없는 삭막한 방에서 쓸쓸히 돌아가셨다.
남편과 자식을 사고로 잃은 가엾은 유모는 가족을 잃은 지 1년 후 핏덩이인 나를 품에 안고 자식처럼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 분에게서 나를 빼앗았으니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남편과 자식을 잃은 것만큼 고통스러우셨을 것이다.
보육원에 어머니를 모신지 이틀 후 유모를 찾았다.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차를 몰아 충주로 내려왔다. 예상은 했지만, 유모의 슬픈 죽음과 초라한 묘를 보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흐윽.”
“오빠, 그만 울어. 그러다 쓰러져. 흑흑흑.”
“오빠, 울지 마요. 울지 마요. 으아아아앙.”
살면서 울어본 적이 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전종명과 윤선숙이 투명 인간 취급을 해도 울지 않았다.
나를 버리고 떠날 때도 울지 않았다. 은하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됐을 때도 눈물을 꾹 참았다.
팔 병신이 되어 군대에서 쫓겨날 때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담당 의사가 다시는 무거운 것을 들 수 없다고 말했을 때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오늘처럼 운 것은 유모가 떠났을 때뿐이었다. 유모를 찾아 거리를 헤매며 울던 때 그때 이후 처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집에서 나가라는 통지를 받은 유모는 나와 헤어질 시간을 며칠만이라도 달라고 전종명과 윤선숙에서 무릎 꿇고 빌었다.
그러나 냉혈 동물보다 더 차가운 전종명과 윤선숙은 운전기사를 시켜 힘없는 유모를 끌어내 충주시에 버리듯 던지고 사라졌다.
유모도 나처럼 무작정 버리면 소문이 날 수 있다는 생각에 낡은 빌라 하나를 사주고 약간의 돈을 쥐여주고 휑하니 사라졌다.
10년 가까이 코흘리개 아이를 밤낮으로 돌본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처사였지만, 힘없는 유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지갑 속에 끼워둔 내 사진 한 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짓는 것 그것밖에 없었다.
“하린아, 묘 이장할 수 있는지 알아봐.”
“알았어.”
“상사님, 인척이 있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알아봤는데 없어.”
“하아...”
1시간 넘게 유모의 무덤에 엎드려 울자 가슴을 억누르던 답답함이 그제야 사라지며 정신이 들었다.
하늘빛 보육원에 거금을 기부한 건 자식이란 의무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모의 친척이라도 찾아 사례하고 싶은 마음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고마움 때문이었다.
유모의 묘를 이장하는 것도 같은 의미였다. 부모님의 묘는 별장 근처로 이장할 생각이 없었다.
두 분이 같이 뛰어놀던 하늘빛 보육원에 묻혀 계신 것이 더 행복할 거라고 핑계를 댔지만, 진짜 이유는 정이 없어서였다.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부모에게 무슨 정을 느끼라는 말인가? 단 하루라도 살갑게 살았다면 되새길 추억이라도 있겠지만, 품에 한 번 안겨보지도 못했다. 정이 들고 싶어도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와 유모는 달랐다. 헤어지고 싶어 헤어진 것이 아니었다. 떨어지고 싶어 떨어진 게 아니었다. 전종명과 윤선숙에 의해 강제로 떨어져야만 했다.
그 때문에 애틋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고, 16년 동안 추억을 곱씹으며 그리워하며 살았다. 얼굴도 모르는 부모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은하 언니에게 물어봤는데, 일가친척도 한 명도 없어 이장해가도 문제 삼을 사람 없을 거래.”
“택일은 언제가 좋은지 물어봐.”
“그건 물어보지 않아도 돼. 손 없는 날에 이장하면 되니까.”
손 없는 날의 손은 동서남북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사람 일을 방해하는 귀신을 뜻했다.
음력으로 1과 2가 들어가는 날은 동쪽에 손이 있고, 3과 4가 들어가는 날은 서쪽에, 5와 6이 들어가는 날은 남쪽에, 7과 8이 들어가는 날은 북쪽에 손이 있었다.
유일하게 손이 없는 날은 9와 10이 들어가는 날로 이날은 훼방꾼 귀신인 손이 하늘로 올라가 사람 일을 방해하지 못했다.
“모레가 손 없는 날이야. 올라가면서 묘지 이장 전문 업체에 맡기면 돼. 어디에 모실지 그것만 정하면 돼.”
“자리 보는 건 지관이 있어야 하잖아?”
“그것도 이장 업체에 말하면 알아서 해줄 거야.”
“그러면 빨리 가자.”
“상사님, 충주 시내로 출발해주세요.”
“정확히 위치가 어디야?”
“휴대전화로 위치 보냈어요.”
“오케이.”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합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