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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무덤
224.
“원장님, 저희 부모님을 기억하시나요?”
“그럼요. 나랑 같이 자랐어요. 나이 차이도 크지 않아 아주 친하게 지냈죠.”
“저희 부모님 어떤 분이셨습니까?”
“둘 다 너무 착했어요. 수줍음도 많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했죠. 그래서 손해를 많이 봤어요.”
“보육원에 계실 때부터 사귀신 건가요?”
“둘 다 다섯 살 때 이곳에 왔어요. 한 달 차이로 온 창수와 아름이는 처음부터 아주 친했어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남매라고 할 만큼 서로를 알뜰히 챙겼죠. 언제부터 사랑했냐고 묻는 거라면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둘은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네요.”
다섯 살 때 하늘빛 보육원에 온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원과 기차역에 각각 버려져 부모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보다 한 달 늦게 온 어머니를 아버지는 친동생처럼 보살폈다. 억지로 떨어뜨려 놓으면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 한방에서 같이 잤다.
버려졌다는 것. 혼자라는 것.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세상에 혼자만 덩그러니 있다는 건 악몽을 꾸는 것보다 백배는 무서운 일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집착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을 테니까.
“보육원은 언제 떠나셨습니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나갔어요. 당시는 지금보다 보육원 사정이 더 나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데리고 있을 수가 없어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두 분의 운명이었지 원장님 잘못이 아닙니다.”
“아름이를 끝까지 붙잡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그 일만 생각하면... 흐윽.”
아버지가 아파트 공사장에서 실족해 돌아가시자 기댈 곳 없는 어머니는 아버지를 하늘빛 보육원에 모셨다.
그때 장례비와 장례절차 등 모든 것을 원장님이 도와주셨다. 너무 미안해 더는 있을 수 없었던 어머니는 원장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산만 한 배를 안고 난곡동 산동네로 돌아가셨다.
19살에 보육원을 나온 두 분은 돈이 없어 서울에게 가장 낙후한 난곡동 산동네에 작은 방을 하나 얻어서 사셨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얻은 것으로 판잣집이나 다름없는 집은 곰팡이가 덕지덕지 피었고, 악취가 진동해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두 분에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이었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두 분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곳, 두 분에겐 그것이면 됐다.
두 분 다 머리가 상당히 좋은 편으로 중학교 내내 성적이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대학 들어갈 형편이 안 돼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야만 했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온 아버지와 어머니는 직장을 잡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고졸에 고아 출신을 직원으로 채용하는 대기업이 없어 아버지는 작은 공장에서, 어머니는 작은 사무실에서 경리로 일해야 했다.
번듯한 회사에 취직하지 못해 박봉에 시달려야 했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두 분은 행복했다.
그 행복의 결실이 찾아왔다. 내가 생긴 것이었다. 돈이 없어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지만, 보육원을 빠져나온 아버지와 어머니는 난곡동에 집을 얻은 그 날 손을 꼭 잡고 두 분 만의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사람들의 축복은 받진 못했지만, 굳은 언약으로 죽을 때까지 함께하기로 한 약속은 보여주기 위한 결혼보다 훨씬 뜻깊은 결혼식이었다.
그 결실을 맺자 아버지는 너무 기뻐 어머니를 업고 가파른 난곡동 판자촌을 밤새 뛰어다녔다.
부모가 없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자식이 생긴다는 건 진정한 가족의 탄생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벅찬 감동으로 두 분은 밤새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아버지가 다니던 작은 공장 사장이 부도를 내고 달아나 3개월이나 밀린 임금을 떼먹고 도망갔다.
3개월 동안 임금을 받지 못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아버지는 매일 매일 돈을 손에 쥘 수 있는 건설 일용직 일에 뛰어드셨다.
그러나 기술이 없어 할 수 있는 일이 벽돌을 나르거나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잡부밖에 없었다.
그렇게 3개월 넘게 힘든 노동일을 하던 아버지는 아파트 난간에 서서 파이프를 받아 올리는 일을 하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5층에서 떨어져 목뼈가 부러져 그 자리에서 죽었다.
무리하게 일을 시킨 현장 감독의 잘못이었지만, 입을 맞춘 사람들은 아버지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다가 떨어져 죽었다며 현장 감독을 편들었다.
그 일로 단란했던 가정은 한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졌다. 아버지를 잃은 충격에 유산할 뻔했던 어머니는 결국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고, 나는 전종명과 윤선숙의 아들이 되어 26년을 살아야 했다.
원장 할머니의 긴 얘기를 듣는 내내 하린이와 하연이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깨에 매달려 울어대는 하린이와 하연이를 품에 꼭 안아 진정시켰다. 진짜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나였다.
그러나 가슴으로 아파하는 하린이와 하연이가 있어 내 마음은 위로받은 지 오래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형제자매가 죽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옆에 친구가 있어 주는 것만으로 큰 위로를 된다.
나는 슬프지 않았다. 언제나 내 곁을 지키며 나보다 더 가슴 아파하는 하린이와 하연이가 있어서 슬프지 않았다.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부담 갖지 말고 말해요. 힘닿는 데까지 들어줄게요.”
“큰어머니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래 주시면 고맙죠. 아름이와 나는 아주 친한 언니 동생 사이였어요. 지금도 그 일만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요. 그때 도망가지 못하게 밖에서 문이라도 잠갔어야 했는데, 그렇게 도망치듯 달아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그 일이 지금도 가장 큰 한으로 남았어요.”
“큰어머니 잘못이 아닙니다. 큰어머니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이제 그만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세요. 그 짐은 제가 져야 할 짐입니다.”
어머니와 3년 넘게 연락이 끊기자 뭔가 일이 생겼다는 걸 깨달은 최은실 원장은 어머니가 어디 계신지 수소문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자 불안한 마음으로 주민 센터를 찾았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계속 어머니를 끝까지 잡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이 마음의 짐이 된 것이다.
원장 최은실은 아버지, 어머니와 다섯 살 차이로 아이 때부터 줄곧 하늘빛 보육원에서 함께 자랐다.
하늘빛 보육원은 최은실 원장의 부모님이 만든 곳으로 외동딸인 최은실도 원생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자라며 고아라는 편견이 없었다.
그래서 원생들을 오빠, 언니, 친구, 동생으로 생각했다. 덕분에 아버지, 어머니도 친동생처럼 생각해 알뜰히 돌봐줬다.
“큰어머니, 제 부모님을 키워주시고,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돌봐주신 은혜 갚을 길이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은혜에 보답하고자 작은 성의를 준비했습니다. 받아주십시오.”
“창수와 아름이는 친동생이나 다름없었어요. 돈이라면 주지 않아도 돼요.”
“그럼 원생들을 위해 써 주십시오.”
“보육원을 돕고 싶다면 나에게 주지 말고 보육원 통장으로 입금하세요. 그래야 오해가 없어요.”
“알겠습니다. 하란아, 사무실 가서 입금해드려.”
“알았어.”
“보육원 주변 땅 누구 소유인지 알고 계십니까?”
“앞쪽은 은행이 갖고 있어요. 공장을 짓던 사람이 부도가 나서 은행에 넘어갔다고 들었어요. 뒷산은 마을 주민이 갖고 있고요. 그런데 땅은 왜 물어보는 거예요?”
“부모님을 위해 주변 땅을 조금 사 보육원에 기증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부모님 묘도 좀 더 커질 테니까요.”
“땅이 넓어져도 묘는 커지지 않아요. 죽으면 어차피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큰 묘가 필요한 게 아니라 자주 찾아뵙고, 좋은 곳에 계시도록 기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원장 말이 맞았다. 화려한 묘가 천당행 티켓을 주는 게 아니었다. 손바닥만 한 땅에 묻혀도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행실이 천당과 지옥을 결정지었다.
“그러면 원생들을 위해 써 주십시오.”
“보다시피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땅이 생겨도 건물 지을 형편이 안 돼요. 그래도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놀 공간이 생기는 건 환영할 일이네요.”
“돈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육원과 부대시설 지을 돈은 하린이가 지금쯤 입금했을 겁니다.”
“네에? 건물 지을 돈을 입금했다고요?”
“네.”
“원장님! 원장님!”
“무슨 일인데 그래요?”
“이.이분이 30억 원을 기부하셨어요.”
“뭐라고요?”
보육원 교사로 보이는 30대 여성이 헐레벌떡 뛰어와 하린이가 한 만행을 원장에게 고발했다.
보육원 운영비는 최은실 원장 부모가 남겨준 시내에 있는 3층짜리 건물에서 나오는 월세와 국가보조금, 자선단체 기부금, 하늘빛 보육원을 사랑하는 일반 시민들의 기부로 충당했다.
그러나 50명의 아이를 먹고, 재우고, 입히고, 공부시키기에도 빠듯해 낡은 건물을 헐고 새로 짓는 건 꿈꿀 수도 없었다.
30억 원은 최은실 원장과 보육원 교사 그리고 원생들이 꿈꾸던 집을 만들 수 있게 해줄 충분한 돈이었다.
“많진 않지만, 운영비도 매달 조금씩 보내드리겠습니다. 대신 누가 줬는지 그건 밝히지 말아 주십시오.”
“원한다면 그렇게 해드릴게요. 그렇지만 금액이 너무 커요. 창수와 아름이가 이곳에서 자랐지만, 30억 원과 땅을 받을 만큼 사랑을 주진 못했어요.”
“받아주십시오. 그게 제가 큰어머니께 해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렇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늘빛 보육원이 오래가길 바랄 겁니다.”
“알았어요. 아이들을 위해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을게요.”
“감사합니다.”
최은실 원장을 큰어머니라고 불렀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친동생처럼 봐줬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부모처럼 생각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선뜻 다가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반대로 피하고 거북해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과 친했다는 이유만으로 최은실 원장을 가족이나 친척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큰어머니라고 부른 이유는 부모님을 키워주고, 돌아가신 다음에도 돌봐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려 그런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돈을 기부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너무 큰돈을 기부하면 거부감을 나타낼 수도 있어 친한 척 연결고리를 만들려고 큰어머니라고 부른 것이었다.
이범석 상사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10년 전 지금은 은행은 넘어간 공장부지와 하늘빛 보육원 땅을 탐낸 사람이 있었다.
보육원을 밀어버리고 호화 펜션을 지으려고 한 건축업자로 1년 넘게 땅을 팔라고 빚쟁이처럼 따라다녀도 팔지 않자 기부금을 내는 것처럼 돈을 빌려주려 하는 등 온갖 행패를 다 부렸다.
그때 기억이 아직 남아 있을 수 있어 무작정 큰돈을 내면 호의보다는 의심의 눈을 받을 수 있었다.
“큰어머니, 부모님 사진이 있으면 한 장만 주십시오. 아직 어떻게 생기셨는지도 얼굴도 모릅니다.”
“정말요?”
“네.”
“그런데 어떻게 창수와 아름이를 찾은 거죠?”
“저를 길러주신 분들이 친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돼 찾게 됐습니다.”
“마음고생이 많았겠어요?”
“아닙니다.”
전종명과 윤선숙 때문에 힘들었다고 시시콜콜 얘기한다고 상대가 고통을 이해할 것 같은가?
사람은 자기 손톱 밑에 낀 가시는 아파도 남의 팔다리가 잘린 고통을 절대 알지 못했다.
가족이 아파도 그 고통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의 고통을 이해한단 말인가?
그래서 괜찮다고 말한 것이다. 말해봐야 고통의 깊이를 알지도 못하면서 최은실 원장은 맞장구를 칠 테고, 나는 집에 돌아와 왜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했냐며 후회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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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