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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시대-215화 (21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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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캐기

215. 진실 캐기

“이 땅을 다 샀다고?”

“네.”

“동물원이라도 만들려는 거야? 무슨 땅을 이렇게 많이 사?”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진심이야?”

“농담입니다. 사람들에게 간섭받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어서 지은 겁니다.”

“이 정면 크기면 조용하게 사는 게 아니라 적막하게 산다고 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이범석 상사님과 김상호 상사님, 박무윤 상사님, 정동일 상사님 집을 저희 집 근처에 지어드릴까 합니다. 김영우 중사님과 손필영 중사님, 김동양 중사님, 이연숙 중사님, 박미향 중사님도 원하면 그렇게 해드리고요.”

“집을 지어준다고?”

“네.”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이사를 하라는 말이야?”

“저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만 살면 외로울 테니까요. 그러나 각자 사정이 있는 거라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나야 당장에라도 옮기고 싶지. 복잡한 서울은 나하곤 맞지 않아. 군대 있을 때처럼 북적대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어. 그럴 나이도 됐고. 그런데 집사람과 아이들이 좋아할지 모르겠어. 관사보다 지금 생활을 더 마음에 들어 하고 있어.”

“차로 10~20분이면 도착할 가까운 거리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XXX 마트도 그 정도 거리에 있고요. 하남시도 멀지 않아 병원과 학원 가는 것도 크게 불편하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2층 집으로 근사하게 지어 드릴 겁니다. 독채로 지어드릴 계획이라 텃밭을 가꾸셔도 되고, 정원을 가꾸셔도 됩니다. 상사님 채소 가꾸는 거 좋아하셨잖습니까.”

“구미가 당기다 못해 당장 가고 싶어지는군. 생각만 해도 너무 좋아. 그런데 돈이 많이 들 텐데?”

“직원들 복리후생 차원에서 해드리는 겁니다. 대신 죽을 때까지 퇴사는 못 합니다. 종신 계약입니다.”

“평생직장이란 말이야?”

“네.”

“내가 말년에 복이 터졌어. 애들은 커가고, 나이는 먹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 많았는데, 자네 만나고 인생이 180도 바뀌었어. 고마워.”

“아닙니다. 제가 더 고맙습니다.”

“길가는 사람 만 명을 잡고 물어봐도 형필이 네가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허튼소리 하지 마.”

“진심인데.”

“미친놈!”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나이가 비껴가진 않았다. 젊었을 때는 일당백의 용사였지만, 나이가 들면 힘없는 노인에 불과했다.

더욱 비참한 건 할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힘쓰는 일 빼고는 시켜주는 곳이 많지 않아 생활고를 겪는 사람도 많았다.

이범석 상사도 다를 게 없었다. 독수리 경호회사를 차렸지만, 대형 업체에 밀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사람들은 실력보다는 사무실 크기, 복장, 인지도, 광고 등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 독수리 경호회사를 외면했다.

관리비와 임대료도 못 내 문을 닫아야 할 때 내가 나타났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 격으로 이범석 상사와 김상호 상사, 박무윤 상사, 정동일 상사에게는 나는 은인이었다.

“오늘 집에 돌아가셔서 형수님과 애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제가 생각할 때 크게 반대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꼭 그래야지. 이런 기회가 평생 다시 안 올 테니까. 안 그래?”

“맞습니다. 하하하하.”

“웃지 마. 정들어. 하하하하.”

이범석 상사와 독수리 경호팀 가족을 팔당으로 옮기려는 건 우리가 노출되면 그들 가족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 것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지만, 생각해 놓지 않다가 당하면 데미지가 커 미리 대비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범석 상사와 독수리 경호팀도 슬슬 노후를 계획할 시기로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살게 해주고 싶어 그런 제안을 했다.

젊음을 나라에 송두리째 바친 사람들이었다. 진심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했지만, 돌아온 건 쥐꼬리만 한 연금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들도 나처럼 이 나라를 미워했다. 그러면서도 사랑했다. 자기가 한때 목숨을 다 바쳤던 나라였다. 미웠지만, 사랑하는 마음도 버릴 수 없었다.

상처받은 마음을 알기에,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를 게 없기에, 내가 이 거지 같은 나라를 대신해... 이용하는 것이지만... 너덜너덜해진 가슴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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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 약점 잡는 건 어디까지 했어?”

“이제 열 명했어요.”

“만나기가 쉽지 않지?”

“아니요. 제가 딴짓해서 그래요.”

“무슨 딴짓?”

“빛나는 타도 파는 것 때문에 정신을 팔려서 일을 못 한 거예요. 오늘부터 열심히 뛰어다닐 거예요.”

“쥬디 너무 심하게 부려먹지 마. 혜안으로 기억 읽는 거 무척 힘든 일이야.”

누군가의 기억을 읽는다는 건 설레고 흥미로운 일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좋은 기억만 있다면, 재미난 기억만 있다면 남의 기억을 훔쳐보는 건 세상 그 어떤 게임보다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추악한 기억이 가득하다면 한 장면 한 장면 볼 때마다 지독한 짜증이 밀려올 것이었다.

정치인과 검찰의 추악한 모습을 영화를 통해 속속들이 보고 나면 극장을 나서 집에 오는 동안에도 찝찝함이 가시지 않는다.

그런 느낌의 백만 배쯤 되는 스트레스를 한두 개도 아니고 하루에 수십 개씩 봐야 한다면 그건 고문이었다.

그리고 방대한 기억을 머릿속에 쑤셔 넣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인간의 기억은 문서가 아니었다.

모두 영상이었다. 야동 한 편만 해도 최소 600MB에서 1GB가 넘었다. 그런 기억을 수억 개 머릿속에 집어넣는다고 생각해보라.

그것도 자기 기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억을.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로 내 기억도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 셀 수 없이 많은데, 다른 사람의 추악한 기억을 공유해야 한다니... 쥬디가 큰 상처를 받는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하루에 다섯 명 이상 하지 않을 거예요.”

“다섯 명도 너무 많아. 하루에 세 명 이상 하지 마.”

“세 명하면 게임 시간으로 두 달이나 걸려요. 현실 시간으로도 2주일이나 걸리고요. 그것도 매일 3명 했을 때 얘기에요. 그렇게 해선 몇 달이 걸릴지 알 수 없어요.”

“못 끝내도 상관없어.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쥬디 다치는 것보다 그게 나아.”

“알았어요.”

국회의원 35명, 고위직 공무원 19명, 검찰 38명, 변호사 8명, 경찰 29명, 언론인 31명, CEO 7명, 교수 3명이 내가 허락한 인원이었다.

쥬디의 혜안으로 약점을 잡을 인원을 적어 오라고 하자 하린이와 하연이가 1,000명이 넘는 이름을 적어왔다.

많을수록 도움이 됐지 나쁠 건 없었지만, 사람 욕심이 끝이 없다고 욕심을 내다간 전 세계 사람 모두의 약점을 잡자고 덤빌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인원을 170명으로 줄였다.

그러나 170명도 적은 수가 아니었다. 그들의 사회위치를 생각하면 일반인 백만 명의 기억을 훔치는 것보다 파급효과가 더 컸다.

“오빠, 제가 어제 말한 거 생각해 보셨어요?”

“무슨 말?”

“전종명과 윤선숙의 기억을 읽는 거요.”

“.......”

“답답해서 이범석 상사님에게 여쭤봤어요. 오빠 진짜 부모님과 유모를 찾을 수 있냐고요. 어렵다고 했어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실마리가 없어 찾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했어요. 남은 방법은 이제 쥬디밖에 없어요. 쥬디의 혜안만이 오빠 진짜 부모님과 유모를 찾을 수 있어요. 허락해주세요.””

“하아...”

어젯밤 대장장이 무네치카의 빛나는 타도를 판 기념으로 셋이서 조촐하게 파티를 열었다.

맥주에 오징어 땅콩이 전부였지만, 엄청난 돈을 손에 쥐게 되자 마음이 풍족해 왕후장상의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하린이와 하연이를 양쪽에 품고 부드러운 엉덩이를 슬금슬금 더듬으며 기분 좋게 맥주를 마시자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두 자매의 입술을 번갈아 빨자 참았던 욕망이 목젖까지 끌어올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하연이가 옆에서 보고 있는데도 욕망에 눈이 멀어 하린이의 얇은 면 티를 내리고 가슴을 빨며 오늘이 그날임을 암시했다.

그때 갑자기 하연이가 쥬디의 혜안을 이용해 전종명과 윤선숙의 기억을 읽으면 부모님과 유모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그 말 한마디에 후끈 달아올랐던 뜨거운 욕망이 남극 바다에 뛰어든 동태처럼 차갑게 식었다.

그동안 쥬디의 혜안을 까맣게 잊고 있어 전종명과 윤선숙의 기억을 읽을 생각을 못 한 것이 아니었다.

전종명과 윤선숙의 기억을 읽으면 내 과거를 알아낼 수 있다는 걸 노예시장에서 쥬디를 만난 순간부터 생각했었다.

그런데도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건 쥬디와 하린이, 하연이에게 전종명과 윤선숙의 부끄러운 과거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들의 추잡한 과거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게 했던 행동들도 모두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은 죽어도 보여주기 싫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 속에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

무서웠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보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내 과거를 쉽게 알아낼 방법이 있으면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이범석 상사를 통해 알아내는 어려운 길을 간 것이었다.

치부를 건드리는 하연이의 말 한마디에 조촐한 파티는 끝이 났다. 그렇다고 화를 내진 않았다.

하연이가 전종명과 윤선숙의 기억을 읽자고 한 건 나를 걱정해서 한 얘기였지, 내 치부를 엿보자고 한 게 아니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금세 얼굴 표정을 고치고 인스턴트 던전에 입장에 평소보다 열 배는 더 과격하게 몬스터를 때려잡았다.

허리를 잘라 두 토막을 내고, 머리를 빠개 블레이드에 뇌수를 잔뜩 묻히고, 쓰러진 놈의 가슴을 짓밟아 심장을 터뜨려 죽이는 등 온몸이 피에 물 들 때까지 칼을 휘둘렀다.

“오빠, 어떤 일이 있어도 언니와 저는 오빠 편이에요. 아시죠?”

“어.”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저는 오빠가 얼굴을 들지 못할 만큼 수치스러운 짓을 하라고 해도 다 할 거예요. 죽도록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다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니 오빠도 부담 갖지 마세요.

“알았어. 네가 알아봐.”

“고마워요.”

사랑한다고 치부를 보여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그러나 하연이라면 내게 그러고도 남았다.

내가 포르노에 나오는 아주 이상한 자세와 섹스를 요구해도 하연이는 웃으며 들어줄 게 분명했다.

하연이는 재고 눈치 보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척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한다면 싫어도 들어줘야 한다고 믿었다. 진정한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하린이도 마찬가지였다. 나무는 인간에게 말하지 않는다. 왜 열매를 따 가는지. 왜 가지를 잘라 가는지, 왜 자신을 베어 가는지.

묵묵히 인간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둘 뿐이었다. 자매의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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