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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부
213.
“이것들이 사려면 그냥 1조 원 주고 사지, 이게 뭐하는 짓이야? 사람 심장 떨리게. 심장이 쫄깃쫄깃해져서 죽을 것 같네.”
“그러게 말이다. 심장 떨려서 쳐다볼 수가 없다.”
“언니도 그래?”
“저 금액 봐봐. 세상 어떤 사람이 침착하겠니.”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래?”
“응. 얼굴 봐봐. 혈색 하나 변하지 않았잖아. 목소리도 전혀 떨리지 않고. 완전히 강철심장이야.”
“오빠, 저 금액 보고도 안 떨려?”
“숫자라 그런지 돈이란 생각이 안 들어. 그래서 크게 감흥이 오지 않네.”
“탱커라 겁이 없어서 그런 건가? 어쨌든 침착한 오빠 모습 정말 마음에 든다. 남자라면 오빠처럼 돈에 흔들리지 않아야지. 그래야 진짜 남자라고 할 수 있지.”
“흐흐흐흐.”
“음흉한 그 웃음만 빼고. 재수 없어.”
“에험~”
가격이 오를 때마다 하린이와 하연이가 땀이 흥건히 밴 손으로 내 손을 꽉 붙잡고 경기를 일으켰다.
주식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가격이 쭉쭉 올라가면 심장이 덜덜덜 떨린다. 주식도 그런데 한 번에 몇억 원씩 오르는 경매는 어떻겠는가?
경기를 일으키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남의 일을 보는 것처럼 떨리지도 않았고, 초조하지도 않았다.
배포가 커서 그런 게 아니라 금액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서자 아라비아 숫자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통장에 돈이 들어오면 그때는 지금과 많이 다를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금액에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지도 못할 게 분명했다.
“이제 10분 남았어요.”
“오빠, 우치다 료헤이가 6,500억 원에 산다고 가격 올렸어.”
“운룡 화상이 6,650억 원에 매수 주문 냈어요.”
“우치다 료헤이가 다시 6,660억 원에 산다고 올렸어.”
“오수파가 6,661억 원 산다고 주문 냈어요.”
“아오리 소라가 6,700억 원으로 가격 올렸어.”
“우치다 료헤이가 7,000억 원을 불렀어요.”
“운룡 화상이 8,000억 원 주문 냈어.”
“헉!”
“우엑!”
- 즉시 구매가 1조 원에 성장형 에픽 아이템 대장장이 무네치카의 빛나는 타도가 이자나기님에게 팔렸습니다.
- 판매수수료 0.1%와 세금 10%를 뺀 8,990억 원이 모모님의 통장으로 입금됐습니다.
경매 마감 5분을 남기고 이자나기라는 이름을 쓰는 유저가 무네치카의 빛나는 타도를 즉시 경매가 1조 원에 샀다.
“이자나기는 뭐야?”
“저도 모르죠.”
“일본의 창조신 이름이야.”
“창조신?”
“응. 일본 고유 종교 신토의 3대 신을 낳은 신 중의 신이야.”
이자나기(伊弉諾神)는 이자나미의 오빠이자 배우자로 일본의 섬과 신들을 낳았다고 전해지는 창조신으로 일본 왕가를 상징하는 신이기도 했다.
또한, 일본 고유 종교 신토 3대 신인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달의 신 츠쿠요미, 폭풍의 신 스사노우를 낳은 아버지였고, 일왕가의 시조로 알려진 야마토이와레히코(진무 천황)의 7대조로 알려졌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유저가 확실했다. 이자나기는 일본에서는 매우 신성시되는 이름으로 일반 유저가 쓸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이유는 일본 왕가를 상징하는 신이기 때문으로 장난으로라도 사용했다간 일본 우익의 총에 죽을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대장장이 무네치카의 빛나는 타도를 일왕가가 산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우리 입장에선 대한민국 유저만 아니면 누가 사도 상관없는 일로 만세를 부를 일이었지만, 며칠 동안 경매장에 매달려 비지땀을 흘린 운룡 화상, 우치다 료헤이, 오수파, 아오이 소라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불쌍한 꼴이 되고 말았다.
놈들이 즉시 경매가로 사지 않은 걸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 때 나는 인터넷으로 통장에 찍힌 돈을 확인했다.
로만 히리테나의 일기장과 고급과 레어템을 팔아 모은 85억2,459만 원 아래에 8,990억 원이란 금액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숫자 0이 아홉 개나 찍혀 있어 8,990억 원이 맞는지 몇십 번을 세아려 본 다음에야 간신히 금액이 맞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3년 내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내가, 대학에 가려 직업 군인을 선택해야만 했던 내가, 그래서 팔 병신이 된 내가, 대학을 졸업해도 살길이 막막했던 내가 벼락부자가 됐다.
로만 히리테나의 일기장을 팔아 100억 원을 벌며 부자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영지를 열심히 키우면 언젠가는 벌 수 있는 금액이라는 생각에 가슴은 벅찼지만, 다리에 힘이 풀릴 만큼 충격을 받진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격이 달랐다. 1조 원이면 100억 원의 백배에 달하는 돈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금액에 다리가 풀려 쓰러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오빠, 괜찮아?”
“어. 잠시 어지러워서 그랬어. 이제는 괜찮아.”
“아까는 혼자 다 멀쩡한 척 다 하더니 왜 그래?”
“말했잖아. 돈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철저하게 자기 것 아니면 안 보겠다는 생각이네. 그렇지?”
“남의 것에 욕심내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맞아. 남의 것 탐하는 놈은 도둑이니까.”
팔리기 전에는 내 돈이 아니었다. 그리고 통장에 돈이 들어오기 전에도 내 돈이 아니었다. 내 주머니에 들어와야 내 돈이었다. 그 전까진 남의 돈이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망각하는 사람을 자주 TV에서 본다. 회사 돈을 자기 돈으로 생각해 도박 자금으로 쓰다가 걸린 기업인, 고객 돈을 자기 돈으로 착각해 유흥비로 쓰다 붙잡힌 은행원, 칼 든 강도로 돌변해 회사 공금으로 명품 백에 고급 승용차를 산 경리, 혈세를 자기 주머닛돈으로 생각해 손바닥을 비비는 놈들에게 선심을 쓰듯 지원한 정치인.
모두 자기 돈과 남의 돈을 구분하지 못해 일어난 일로 자기 돈이 아니면 일 원짜리 하나 써도 안 됐다.
금액에 상관없이 일 원이라도 허락없이 남의 돈을 함부로 썼다면 그건 명백한 범죄였다.
“오빠, 방송 난리 났어요. 뉴스에서도 대박이라고 떠들고, 게임 채널 MC와 패널들은 다시는 이런 숨 막히는 경매는 없을 거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어요.”
“㈜판타스틱과 히어로 에브리 사이트도 폭주로 마비됐어.”
“한국 사람이 팔았는지, 일본 사람이 팔았는지, 중국 사람이 팔았는지도 모르는데 왜 우리나라 방송이 난리를 쳐?”
“분위기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잖아요.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 세 살 먹은 아이도 알 수 있어요.”
“하아...”
“갑자기 왜 한숨을 쉬세요? 이렇게 좋은 날에.”
“걱정이 생겨서 그래.”
“뭐가 걱정이요?”
“천석꾼에겐 천 가지 걱정이 있고, 만석꾼에겐 만 가지 걱정이 있다고 하더니 그게 바로 나였네.”
“돈이 많아서 걱정이라는 거예요?”
“아니.”
“그럼 뭐요?”
“우리가 판 게 알려질까 봐.”
“누가 알 수 있다는 거예요? 판매자 이름도 경매 참가자 이름처럼 언제든 바꿀 수 있는데.”
“경매장은 환인이 말하지 않을 테니 몰라도 은행은 알 거 아니야.”
“로만 리히테나 일기장 팔고 문제 생겨서 바꾼 기억 안 나세요?”
“바꾸다니?”
“은행 바꿨잖아요.”
“아아 맞다.”
The Age of Hero 통해 돈을 번 유저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자 은행들이 입출금 정보를 이용해 고객에게 접근해 호객행위를 하거나, 직원이 정보를 유출해 팔아먹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서 작년 1월에 The Age of Hero 통장이란 게 생겼다. 정확히 말하면 통장이 아닌 통장과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는 입출금 명세서겸 금고로 현금에 아이템을 팔면 은행처럼 Hero 통장에 금액이 찍혔다.
이걸 원하는 은행 통장으로 인출할 수 있게 서비스해주는 기능으로 환인이 통제해 ㈜판타스틱 운영진도 누가 얼마를 갖고 있는지 몰랐다.
이렇게 본인과 환인만 알면 돈을 은닉하는데 Hero 통장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돈을 입출금할 때 자기 은행 계좌를 통해서만 할 수 있어 입출금 기록이 100% 남아 은닉 용도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완벽한 비밀은 없다고 세금을 걷는 국세청에서는 모를 수가 없었다. 국세청이 모른다는 건 세금을 제대로 걷을 수 없다는 것으로 탈세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The Age of Hero에서 사고파는 모든 물건은 세금만 제대로 내면 본인의 허락 없이 누구도 열람할 수 없게 법으로 정했다.
하지만 이것도 법이 지켜졌을 때만 비밀 유지가 됐다. 개떡 같은 정권이 들어서면 국민의 기본권을 침탈해 언제든 개인정보가 털릴 수 있었다.
“하린아, 일본 유저가 산 게 확실한 거지?”
“우리나라와 중국 유저가 이자나기라는 이름을 쓸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일본 유저도 일왕가의 허락 없이는 쓸 수 없는 이름이고. 일왕가가 샀거나, 일본 정부 또는 일본 우익이 산 게 분명해.”
“그렇다면 우리가 다 먹는 건 좀 그렇다.”
“다 먹는 건 그렇다니, 무슨 소리야?”
“일본에 판 거니까 좋은 일에도 일부 쓰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드네.”
“기부하려고?”
“어.”
“어디에?”
“나눔의 집에 기부하는 게 어떨까? 일본에 판만큼 그곳에 기부하는 게 가장 뜻깊을 것 같은데.”
“나눔의 집이면 위안부 할머니들 계신 곳이지?”
“맞아.”
위안부 나눔의 집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전쟁에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고국으로 돌아오신 할머니들이 계신 곳이었다.
1992년 10월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처음 문을 연 후 명륜동과 혜화동을 거쳐, 1995년 12월 복지가의 후원으로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노인 주거복지시설을 신축해 나눔의 집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오빠, 저도 대찬성이요. 이상한 기부단체에 돈 내는 곳보다 거기에 내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아요.”
“얼마를 기부하는 게 좋을까?”
“그건 오빠가 정해. 얼마를 내든 나는 오빠 뜻에 따를 거니까.”
“저도요.”
“으음... 1,000억 원 기부하자.”
“오오 센대.”
“오빠 자린고비라 몇십 억 원 기부할 줄 알았는데, 장난 아니네요.”
“나도 쓸데는 쓴다.”
“그럼 람보르기니 사 주세요. 어서요.”
“운전면허 따시오. 그래야 차 사주지.”
“알았어요. 내일 바로 신청할게요.”
하연이 말처럼 여전히 돈에 대한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해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를 못 샀다.
그러나 내 자신에게 인색한 것이지 하린이와 하연이, 처갓집까지 자린고비 흉내를 내진 않았다.
나는 내가 아낀다고 다른 사람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끼는 사람이 있으면 쓰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돌아갔다. 나처럼 아낄 줄만 아는 사람만 있다면 자본주의는 예전에 사라졌다.
그리고 기부는 돈을 쓰는 것이 아니었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추잡한 물질 돈을 좋은 일에 쓰는 것 그것이 기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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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