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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지 씌우기
209. 바가지 씌우기
상대의 약점을 잡고 있는 건 안전장치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양날의 검이 되어 우리 목을 칠 수도 있었다.
약점을 잡고 상대를 휘두르려면 상대가 반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힘없는 약자가 권력을 가진 자를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약점을 쥐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권력자가 순순히 약자의 요구를 들어줄 거 같은가? 천만의 얘기였다. 나라면 비밀을 지키기 위해 깔끔하게 죽여 입을 봉할 것이다. 그것이 완벽하게 비밀을 지키는 길이었다.
그리고 정치권과 검찰, 언론 모두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었다. 그들의 약점을 내가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권력을 가진 모두가 적이 되는 것이었다.
“오빠, 뭐든지 쓰기 나름이에요. 놈들의 약점을 이용해 우리가 이익을 얻고자 하지 않으면 오빠가 걱정하는 그런 문제는 생기지 않아요.”
“흐음...”
“나도 하연이와 같은 생각이야. 약점을 갖고 있어서 손해날 건 없다고 생각해. 숨겨둔 비장의 한 수가 있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어. 놈들의 약점이 비장의 한 수가 되어줄 거야.”
“너희 뜻이 그렇다면 하자.”
하연이에 이어 하린이까지 동조하자 더는 안 된다고 할 수 없어 허락했다. 그리고 우려를 나타내긴 했지만, 나 역시 놈들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게 나쁠 건 없다고 생각이었다.
마림 게이트가 우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란 걸 정치권과 검찰, 경찰, 언론이 알아내지 못해도 차후 놈들과 부딪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뉴스를 틀 때마다 저놈은 다시는 안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놈도 있었다. 그런 놈은 마림 게이트와 상관없이 정치권에서 제거하고 싶었다.
일반 시민 한 명이 사고를 치면 주위 사람 몇 명이 피해를 보지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사고를 치면 많은 국민이 피해를 보았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느냐고 누가 내게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마음이 없었다.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건 26년 동안 나를 속인 전종명과 윤선숙 때문만은 아니었다.
먹고 살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당했던 수많은 홀대와 차별 그리고 군대에서 겪은 왼팔의 상처가 조국을 사랑하지 않게 했다.
그렇다고 망하기를 바라진 않았다. 이 나라는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자, 사랑하는 하린이와 하연이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나라였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몇몇 정치인과 검찰, 경찰, 언론 때문에 망가지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요?”
“꼭 필요한 사람만 혜안을 사용해야 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 우리가 다칠 수도 있어.”
“이번에 검찰에 걸린 놈들만 하면 되잖아요?”
“그들만으로는 안 돼. 놈들은 하수인에 불과해. 놈들 뒤에 있는 놈의 약점을 잡아야 해. 그래야 안전할 수 있어.”
“언니, 만약 전직 대통령들이 이번 일의 실체면 어쩌려고 그래?”
“그 사람이 배후면 더더욱 털어야지. 털만 뽑는다고 닭이 죽을 것 같아? 닭을 잡으려면 모가지를 비틀어야 해. 그래야 하수인들도 모두 잡을 수 있어.”
하린이 말이 맞았다. 몸통을 놔두고 깃털만 뽑는 건 상대의 화만 돋우는 것이지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안 됐다.
삭초제근(削草制根)이라고 했다. 잡초를 뽑으려면 뿌리까지 뽑아야 한다. 그래야 잡초가 다시 자라나지 않았다.
“오빠, 어디까지 약점을 잡아야 우리가 안전할 수 있을지 하연이와 상의해서 명단을 작성할게. 거기서 필요 없는 사람과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빠가 잘라내. 그럼 그것만 가지고 할 테니까.”
“알았어.”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호랑이 등에 타면 놈이 지쳐 죽을 때까지 매달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손을 놓으면 호랑이의 날카로운 이빨에 물어 뜯겨 밥이 되고 만다. 놈이 죽든 내가 죽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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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슬과 정이슬 부모의 장례식이 아주 조용히 치러졌다. 정이슬의 아버지는 스페인계 아르헨티나 사람이었지만, 고국에 살아있는 가족이 없어 한국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자식이라곤 정이슬 한 명밖에 없어 상주할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정이슬 아버지 친구 아들이 상주를 대신했다.
하지만 정이슬이 악녀로 전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자 거래처는 물론 지인과 회사 사람들도 조문을 오지 않았다.
심지어 정이슬의 치마폭에 놀아나며 충성을 맹세한 바보들도 모습을 보이지 않아 3일 내내 장례식장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 자리를 장인어른과 형님, 언니 송하은이 3일 내내 지켰다. 하린이네 식구는 나와 하린이, 하연이가 정이슬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걸 몰랐다.
하린이네 가족만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한집에 사는 다현이네도 모르고, 독수리 경호팀도 모르는 일로 은하와 이범석 상사를 빼고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철저하게 비밀로 해야 할 일로 우리가 잘못한 건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때문에 일가족이 목숨을 끊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시게 되면 크게 상심해 쓰러질 수도 있었다.
3일장이 끝나자 20명도 안 되는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정이슬과 정이슬 부모의 화장한 분골을 나무 아래에 묻는 것으로 장례식이 끝났다.
멘사 회원이자 팜므파탈로 불렸던 정이슬의 마지막치고는 매우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장례식이 죽은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않았다.
죽으면 다 부질없는 짓으로 왕이나 거지나 죽으면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가는 친구의 모습을 하린이가 보고 싶다고 밤새 졸라 하연이와 은하를 데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땅에 묻히는 정이슬의 모습을 지켜봤다.
죽기 전까진 원수였지만, 죽은 이상 더는 원수로 대할 필요는 없었다. 나쁜 기억을 빨리 잊고 좋은 기억만 간직하는 게 남은 사람에게도 죽은 사람에게도 훨씬 이로웠다.
정이슬이 죽고 나자 고마운 게 몇 가지 생각났다. 오랫동안 하린이를 괴롭혔지만, 진짜 위협을 가한 적은 없었다.
하린이를 죽도록 미워했지만, 사랑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사랑과 미움이 얽히고설킨 애증으로 미워하기만 했다면 하린이에게 몹쓸 짓을 해도 수도 없이 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는 건 좋아하는 마음도 컸다는 것이다. 그걸 깨닫자 진심으로 정이슬이 고마웠다.
“너에게 마지막으로 왔다 간 건 참회했다는 뜻이야. 좋은 곳에 갔을 거야.”
“자살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어.”
“그거 모두 지어낸 얘기야. 믿지 마. 그리고 정이슬 크리스천도 아니잖아. 종교마다 자살에 대한 관점이 달라.”
“이슬이 때문에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그런데도 천국에 갈 수 있어?”
“바로는 못 가겠지. 죗값은 치러야 할 테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갈 거야. 마음을 고쳐먹었으니까.”
“오빠 말이 맞아. 참회했으니까 좋은 곳에 갈 거야. 꼭!”
“언니, 나도 그렇게 믿고 있어. 이슬이 언니 참회하고 꼭 좋은 데 갈 거야. 그러니 더는 마음 아파하지 마.”
“알았어.”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나쁜 사람은 좋은 곳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니까.
부귀영화를 누리며 나쁜 짓만 골라 한 놈들이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가면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다 고생만 진탕하고 죽은 가엾은 사람들은 뭐가 된단 말인가?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았지만, 죗값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생각해 지옥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이슬이 지옥에 가야 한다. 하린이를 건들지 않은 것은 죽을 때까지 고마워할 일이지만, 한 짓을 생각하면 좋은 곳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녀 때문에 많은 사람이 아파했고, 지금도 아파하고, 죽었다. 잘못을 뉘우친 것과 죗값을 받는 것은 달랐다.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쳤다면 그에 대한 벌도 달게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녀가 저지른 죄는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아니었다. 억만 겁이 지나도 용서받기 어려운 죄였다.
하지만 정이슬이 좋은 곳에 가길 바랐다. 하린이를 미워했지만, 사랑했으니까. 하린이를 건들지 않았으니까.
내가 염라대왕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정이슬의 죄를 사해줬을 것이다. 하린이와 하연이는 내 전부니까.
나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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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3,000억 원 넘었어요. 그런데 사겠다는 사람이 한국 사람인 것 같아요.”
“경매자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
“싸울아비요.”
“왜 일본 유저가 아니라 한국 유저가 가장 높은 금액에 입찰한 거야? 바보 아니야?”
“빼앗긴 아픔을 일본 유저도 느껴야 한다는 구호에 우리나라 유저가 울컥해서 걸려든 것 같아요.”
“돼지 잡자고 쳐 놓은 그물에 사람이 걸린 격이네. 에휴.”
“그렇게 말이에요. 바보!”
우리가 당한 아픔을 일본도 느끼게 해주자는 구호는 일본을 격분시켜 대장장이 무네치카의 빛나는 타도를 비싼 값에 팔아먹자는 의도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대한민국 유저가 그물에 걸렸다. 그 구호가 일본만 격분시킨 게 아니라 대한민국 애국지사의 가슴에도 뜨거운 불을 지르고 말았다.
불타는 애국심과 일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건 정말 고마웠다. 그러나 머리를 폼으로 달고 다니는 게 아니라면 왜 그런 구호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는지 한 번쯤 생각했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열 받아 하는 것과 달리 무기가 필요해 산 것일 수도 있었다. 전체 유저의 3분의 1이 칼을 무기로 사용했다.
대장장이 무네치카의 빛나는 타도는 한 손 무기로 방패와 함께 사용할 수도 있고, 칼이나 단도와 함께 사용해도 되는 무기로 칼을 무기로 사용하는 유저에겐 꼭 필요한 장비였다.
그래서 국적에 상관없이 많은 유저가 빛나는 타도를 손에 넣고 싶어 했다. 레전드 무기를 만들 재료는 돈만 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성장형 에픽 무기는 돈이 있어도 구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제껏 한 번도 경매장에 나오지 않았던 아이템으로 언제 또 이런 아이템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다. 5,000억 원이 있어야 손에 넣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유저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염없이 경매장에 올라온 빛나는 타도만 쳐다보고 있었다.
침만 꼴깍꼴깍 삼키며...
“경매 마감 시간 몇 시간 남았어?”
“60시간하고 35분이요.”
“흐음...”
“좀 더 강한 글로 올릴까요? 그러면 바보 멍청이를 제치고 일본 유저들이 달려들 수도 있잖아요.”
“아니야. 그거로는 부족해.”
“그럼 어쩌시려고요? 이대로 우리나라 유저에게 팔리게 내버려 둘 거예요?”
“아이템 빼.”
“네?”
“아이템 빼라고.”
“왜요?”
“가격 조정할 거야.”
“얼마예요?”
“즉시 구매 가격을 1조 원으로 올리고, 시작 가격을 3,000억 원으로 해.”
“1조 원이요?”
“어.”
“레전드 아이템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고 해도 1조 원은 너무 했어요. 안 팔릴 거예요.”
“안 팔려도 상관없어. 헐값에 절대 넘겨주지 않을 거야. 그럴 바에는 없애버리는 게 나아.”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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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