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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몰락
198.
정이슬이 하린이를 부른 이유를 알게 됐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자 감형을 목적으로 하린이를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법은 참으로 좋은 제도가 많았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해 일어난 범죄나, 먹고살 길이 막막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법률에서 정한 형량보다 적게 형량을 선고하는 제도가 있었다.
정상참작으로 법률적으로는 특별한 사유가 없어도 법관이 범죄자가 죄를 범한 사정을 고려해 법관의 재량으로 그 형을 덜어주는 좋은 제도였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멋진 법관! 이 얼마나 좋은 제도란 말인가? 고금에 다시없을 우리만의 미풍양속이었다.
그런데 왜 진짜 힘들고 안타까운 사람은 법관의 착한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일까?
왜 돈 많고, 권력이 있는, 학벌이 좋은 가진 자들만 법관의 착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일까?
왜 그런 사람들만 정상참작이라는 좋은 제도의 혜택을 보는 것일까?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정이슬도 어릴 적 받은 정신적인 고통을 이유로 정상참작을 끌어내거나, 그것으로도 안 되면 정신질환으로 형을 피하려 했다.
파렴치하고 가증스러웠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었다. 나와 하린이, 하연이, 은하, 검찰이 친 그물을 빠져나갈 틈이 없다는 것으로 기댈 곳이 없자 마지막으로 하린이에게 기대려는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어.”
“왜?”
“성우의 죽음을 벌써 잊은 거야?”
“그건 사고였어. 내가 그렇게 만든 게 아니야.”
“마음이 약해서 자살한 거라며? 진짜 죽이고 싶은 사람은 나였다며? 그래놓고 이제 와서 네가 그런 게 아니라고?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있어? 나라면 절대 그런 말 못할 거야. 창피해서라도.”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랬어. 그러니 한 번만 도와줘. 제발 한 번만 도와줘! 이번 한 번만 도와주면 네 시녀가 되어 살게. 정말이야.”
“나를 마구 물어뜯겠다고 했어. 우리 가족까지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고. 그래놓고 도와달라는 말이 나와?”
“그때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약을 해서 그래. 그래서 마음속 생각과 다른 말이 나온 거야.”
“그랬다면 정신이 깨고 전화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지금껏 한 마디 사과도 없다가 이러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약을 먹으며 기억력이 나빠져서 그래. 기억이 안 나서 통화 못 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정말 기억이 안 나? 아니지? 못하는 척하는 거지?”
“그만 좀 앵앵거리고 시키는 대로 해. 안 그러면 진짜 자근자근 씹어 먹을 거야. 너는 물론 네 가족까지 모두 다. 그리고 네가 죽도록 사랑하는 그 개새끼까지. 빨리 한다고 말해. 증인석에 서서 내가 착하고 바른 사람이었다고 말해.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고 말하란 말이야~”
“역시 넌 구제불능이야.”
“개소리 집어치워. 모두 너 때문에 이렇게 됐어. 네가 범죄자야. 내가 아니라 너라고.”
“잘 있어. 한때 내 가장 친했던 친구야.”
“가지마. 가지마. 내가 잘못했어. 가지마. 제발 가지마~”
울부짖는 정이슬을 피해 하린이가 면회실을 나왔다. 구치소를 빠져나오는 하린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
“오빠.”
“고생했어.”
“흑흑...”
전화를 받은 하린이가 펑펑 울었다. 지금은 죽도록 미워해도 한 때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것도 그냥 친구가 아니라 동생 하연이가 질투할 만큼 자매 이상으로 친한 친구였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다. 그러나 피보다 진한 게 우정이었다. 형제자매는 갈라놓을 수 있어도 진정한 의리로 뭉친 친구는 절대 갈라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믿었던 친구가 정이슬이었다. 그런 친구가 원수가 됐다.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픈 게 당연했다.
“넌 최선을 다했어.”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가 조금만 더 이슬이에게 친절했다면 저렇게 되진 않았을 거야. 내가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 지경에 이르진 않았을 거야. 모두 내 잘못이야. 모두 내 탓이라고.”
“부모, 형제, 자매는 물론 자기 자신도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가 있어. 네가 신도 아니고 정이슬을 무슨 재주로 컨트롤하겠다는 거야? 억지 부리지 마.”
“하지만...”
“그만해. 자책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야. 네가 지금 하는 건 자책이 아니라 자학이야.”
“.......”
사랑한다고 마냥 감싸주는 건 하린이에게 도움이 안 됐다. 받아줄 수 없는 일은 사정없이 혼을 내야 한다. 그래야 다음부터 말도 안 되는 일로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억지를 부릴만한 일로 억지를 부리면 당하는 상대도 웃으며 받아줄 수 있다. 그러나 억지를 부리기 위해 억지를 부린다면 상대도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성격차이로 갈라설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이 없길 바란다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처음부터 버릇없는 아이는 없다.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혼낼 때 혼내지 않아 아이가 버릇이 나빠진 것이었다.
하린이를 아이에 비유하는 건 잘못됐지만, 사랑은 남녀를 아이로 만든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도 싸우고 때를 쓰는 것이었다.
“궁상 그만 떨고 빨리 와. 너 때문에 거기까지 가서 몇 시간씩 기다린 사람도 생각해야지.”
“알았어.”
“차 안에서 절대 울지 마. 그건 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 이범석 상사님과 독수리 경호팀에 대한 모독이야.”
“다시는 안 그럴게. 잘못했어.”
뚜우우 뚜우우
매몰차게 전화를 끊자 하연이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나를 바라봤다. 지금껏 한 번도 하린이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볍게 혼을 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그때도 냉담하게 말하지 않고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놀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하연이의 손을 잡았다. 부드럽게 손을 만지며 놀란 마음을 달래줬다.
“많이 놀랐어?”
“조금요.”
“하린이가 다른 사람 일로 마음 아파했다면 이러지 않았어. 정이슬 건으로 그래서 그런 거야. 정이슬만 아니면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거야.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언니가 다른 사람일로는 그러지 않는데, 유독 이슬이 언니 일에는 마음이 약해요. 둘도 없는 친구였거든요. 오빠가 많이 이해해주세요.”
“다 이해할 거야. 하지만 정이슬은 안 돼. 정이슬은 하린이에게 해만 끼치는 존재야. 그런 사람을 걱정하는 건 하린이에게 아무런 도움도 안 돼.”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얘기하는 거 들으셨잖아요.”
“그래서 더 화를 낸 거야. 정이슬이 죽으면 하린이가 더 큰 상처를 받을 테니까.”
“오빠 말이 맞네요. 이슬이 언니 죽으면 언니 정말 많이 힘들어할 거예요.”
“지금부터 준비해야해. 그런 일이 없도록.”
“그게 생각처럼 될까요?”
“안 되겠지. 그래도 노력해야지 어쩌겠어. 하린이가 아파하는 건 죽어도 보기 싫으니까.”
“알았어요. 저도 옆에서 열심히 도울게요.”
“고마워.”
화를 낸 건 하린이가 정이슬을 걱정한 일 때문이 아니었다. 극도로 불안해하는 정이슬의 모습에서 마지막을 예감해서였다.
불안정한 정이슬의 모습에 하린이는 크게 마음 아파했다. 정이슬의 불안정한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마음의 상처가 큰데 자살하기라도 하면 그땐 상심해 쓰러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정을 끊어내기 위해 지금껏 한 번도 보이지 않은 매몰찬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평생 친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안고 사는 것보다는 내 성격이 생각보다 별로라고 생각하며 사는 게 백배는 나았다.
“하연아, 너는 정이슬에 관해 얼마나 알아?”
“많이는 모르지만, 마음이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더 독하게 굴었다는 것도 알고요.”
“하린이가 아파했던 이유가 그거였구나. 나는 오늘에야 알았어.”
“오빠가 모르는 건 당연해요. 얘기해도 믿지를 못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슬이 언니 지금 모습을 보고 마음이 여리다고 누가 생각하겠어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죠. 제가 오빠에게 언니 많이 이해해달라고 한 거 그 때문이었어요. 언니가 잘한 건 없지만, 이슬이 언니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마음 아파한 거예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세요.”
“하린이 일이면 어떤 일이든 다 이해할 거야. 하지만 이 일은 이해하는 것과는 달라. 자책하는 걸 놔두면 하린이가 크게 다칠 수도 있어.”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언니가 자책할까봐.”
정이슬은 멘탈이 철옹성처럼 단단해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겉만 단단했지 속은 물렁물렁해 작은 충격에도 쉽게 깨지는 계란 같은 성격이었다. 그런 정이슬의 성격을 오늘에서야 알게 됐다.
정이슬은 마음이 독하고 강한 존재가 아니었다. 나처럼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강한 척했던 것뿐이었다.
나는 말을 아끼고 나서지 않는 것으로 나 자신을 보호했지만, 정이슬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독하게 굴며 이용하는 것으로 강하다는 것을 인식시켜 자기를 보호했다.
극명하게 다른 길을 걸었지만, 둘 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껏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는 것은 같았다.
그걸 알게 되자 정이슬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연민이라고 할까? 동질감이라고 할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도 정이슬처럼 됐을 수도 있었다. 정이슬처럼 사람들을 휘어잡는 능력은 없지만, 못된 짓을 할 수는 있었다.
타고난 운동신경과 싸움실력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돈을 빼앗고, 몸을 빼앗고,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었다.
부모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버려졌을 때 아닌 척했지만, 하늘이 노랬다. 그리고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무얼 잘 못했기에 이런 일을 당한단 말인가? 원망이 분노로 변하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참았다. 부모라고 26년을 믿고 산 사람들처럼 되기 싫어 그러지 않으려 억지로 참았다.
하지만 정이슬은 힘이 있으면 자기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고, 남자애들을 이용했다.
우리가 다른 길을 걷게 된 건 아주 깨알 같은 차이였다. 나는 참았고, 정이슬은 행동했다. 그 작은 차이가 나와 정이슬을 반대편에 서 있게 했다.
“2차 재판일이 언제라고 했지?”
“일주일 후요.”
“2주일 만에 2차 재판을 하는 거야? 엄청나게 빠르네.”
“국민적 관심을 받는 사건이라서 그런 것도 있고, 정치권과 검찰이 자신들의 잘못을 이슬이 언니 사건으로 덮으려는 생각에 빠르게 진행해서 그런 것도 있어요.”
“형량이 엄청나게 나오겠네?”
“은하 언니 말로는 최고형을 때릴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했어요.”
“사형?”
“네.”
이은택이 살아 있었다면 정이슬은 가장 가벼운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보통 살인죄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했다.
정이슬은 주범이 아닌 단순 가담자로 분류돼 최하 형량인 5년형을 받았을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초범인 점과 정상 참작, 모범수 혜택 등을 받으면 2~3년만 복역하고 나올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이은택과 이은수가 자살하고, 이만철이 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르자 정치권과 검찰은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해 대타가 필요했다.
누구를 내세울까 고민하던 검찰은 정이슬의 뒤를 캐내다 무릎을 탁 치며 쾌재를 불렀다.
양파 껍질처럼 까면 깔수록 범죄가 드러나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대타가 아니라 메인으로 세워도 이렇듯 완벽하게 국민의 관심을 끌어줄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정치권과 검찰이 적극적으로 나서자 몸을 사리던 사람들도 지난날 정이슬의 악행을 낱낱이 밝히겠다고 나서며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악녀가 탄생했다.
그렇게 정이슬은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그물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모두 정이슬이 자신이 한 짓으로 자기 손으로 자기 무덤을 판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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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