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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시대-197화 (197/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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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몰락

197. 악녀의 몰락

“하린아, 정이슬이 널 만나고 싶어 해.”

“저를요? 왜요?”

“그건 알 수 없지만, 좋은 소리를 하진 않을 거야.”

“으음...”

“정이슬은 자기가 이렇게 된 게 모두 너 때문이라고 생각해. 내 생각에는 만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만나 봐야 좋은 꼴 못 봐.”

“만날게요.”

“욕할 게 뻔 한데 왜 만나려고 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고 싶기도 하고, 오죽 답답하면 저를 만나고 싶어 할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다면 그건 내가 알아봐 줄 수 있어. 원하면 사진도 찍어다 줄 수 있고.”

“아니에요. 제 눈으로 보고 싶어요. 만나게 해주세요.”

“알았어. 면회 신청할게. 그런데 내 멋대로 했다고 형필이에게 혼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혼나도 제가 혼나요. 언니 잘못 아니에요.”

“형필이에게 욕먹는 것보다 네가 상처받을까봐 그게 더 걱정이야.”

“잘하고 올게요.”

“알았어.”

1차 공판이 끝난 지 일주일 후 정이슬이 하린이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은하를 통해 전해왔다.

정치권과 검찰측은 마림 재단으로 촉발된 국민의 관심을 정이슬에게 돌리기 위해 재판을 생중계로 방송하는 꽁수를 부렸다. 덕분에 1차 재판은 편안하게 소파에 누워 TV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검찰은 마림 재단 게이트로 떨어진 신뢰를 만회하기 위해 대검찰청 엘리트를 총 동원해 정이슬의 죄를 강력히 추궁했다.

먼지를 털 듯 정이슬을 조사해 산더미처럼 많은 자료를 확보했고, 조사도 매우 충실하게 해 밥값 제대로 한다는 얘기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은하가 넘겨준 자료를 토대로 고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한 학생들도 대거 증인으로 채택하는 등 정이슬을 옭아매기 위해 열과 성의를 다했다.

덕분에 로펌 사장인 정이슬의 아버지가 죽을힘을 다해 변호했지만, 검찰의 치밀함을 돌파하지 못해 1차 재판은 압도적으로 검찰이 우세한 상황에서 끝났다.

생각하지도 못한 일로 마림 재단 게이트가 정이슬의 목덜미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정이슬 아버지의 현란한 혀에 판사가 넘어가 예상했던 대로 최하 형량을 받았을 것이다.

정말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권과 검찰도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서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었다.

검찰의 철두철미한 압박에 궁지에 몰리자 돌파구를 찾으려는 것인지 정이슬이 하린이를 만나고자 했다.

말리고 싶었지만, 하린이의 뜻이 확고해 말릴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 하린이가 정이슬을 보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정이슬이 사형을 선고받아도 먼저 만나자고 하기 전에는 하린이가 면회 갈 일은 없었다.

그래서 말리지 않았다. 더 초췌해지기 전에 한 번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화내지 말고, 맞받아치지도 마. 최대한 조용히 웃으면서 얘기해. 그러면 정이슬이 화를 참지 못하고 말려들 거야.”

“알았어.”

“정말 혼자가도 되겠어? 나랑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어?”

“오빠에게 이슬이와 싸우는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아. 미안해! 혼자 갔다 올게.”

“그러면 밖에서 기다릴게. 그건 괜찮잖아.”

“아니야.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오빠까지 시간낭비할 거 없어. 금방 갔다 올 거니까 오빠는 할 일하고 있어.”

“알았어.“

“하연아, 오빠 심심하지 않게 네가 잘해야 한다. 알았지?”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품에 꼭 안고 있을 테니까.”

“너만 믿을게.”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결혼할 사이라고 자기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건 잘못된 행동이었다.

좋아할수록, 사랑할수록 상대의 의견을 귀담아 듣고 존중해줘야 한다. 사랑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었다.

“이거 가져가. 너와 정이슬이 하는 얘기 나도 듣고 싶어.”

“오빠와 하연이만 들을 거지?”

“어.”

“알았어.”

하린이에게 건넨 건 여자들이 자주 얼굴에 찍어 바르는 파운데이션이 든 콤팩트  모양의 휴대 전화기였다.

하린이와 정이슬의 대화를 듣기 위해 이범석 상사에게 구치소 면회실에 몰래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휴대폰을 구해달라고 하자 희한한 모양의 대포폰 한 대를 구해왔다.

나와 하연이의 배웅을 받은 하린이는 김영우 중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박무윤 상사와 김동양 중사의 경호 속에 정이슬을 만나러 구치소로 떠났다.

이연숙 중사와 박미향 중사는 팔당에 다녀온 다음 날부터 은하 경호를 전담해 여성 경호원이 없었다.

이범석 상사가 믿을 수 있는 부하들을 모으고 있지만, 팔당으로 옮기기 전에는 집이 좁아 더 불러들일 수 없어 그때까지는 기존 경호원으로 나와 하린이, 하연이, 다현이네의 안전을 책임져야 했다.

“이게 누구야? 날 이 꼴로 만든 송하린양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착한 척하더니 그새 여우가 다 됐네. 나는 날로 못생겨지고 있는데, 너는 날로 예뻐지고 있네.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왜 불렀어?”

“날 이긴 소감이 어떤지 알고 싶어서?”

“이겼다니 뭘 이겨?”

“날 이렇게 만든 게 너잖아. 그러니 네가 이겼다고 해야지.”

“착각도 자유지만, 정도껏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내가 아니라 검찰이 널 이렇게 만든 거야.”

“블랙박스 네가 찾은 거잖아. 고등학교 때 애들도 네가 동원한 거고. 그런데 착각하고 있다고? 내가 여기 갇혀 있다고 벌써 바보가 됐다고 생각하는 거야?”

“넌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구나. 바뀐 게 하나도 없네.”

“그러는 너는 다른 사람 중심적이야? 네가 언제부터 다른 사람을 그렇게 배려했어?”

“나도 너처럼 이기적이야. 그러나 너처럼 앞뒤 다 자르고 생각하진 않아. 적어도 기승전결은 잘 알고 있지.”

“내가 뭘 잘랐다는 거야?”

“지금 네가 이렇게 된 거 모두 내 탓만 하고 있잖아. 왜 그렇게 됐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러니 앞뒤 다 자른 거지.”

“너 때문이잖아. 네가 나를 밀어내서 이렇게 된 거잖아.”

“이 꼴을 돼서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넌 영원히 지금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어.”

“내가 이렇게 됐다고 무시하는 거야?”

“아니. 진실을 말한 거야. 왜 이렇게 됐는지.”

“헛소리 집어치워.”

“많이 초조한가 보다.”

“조만간 무죄로 풀려날 건데 내가 왜 초조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정말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잖아. 죄가 없는데.”

“누가 그런 소리를 해? 네 아빠가 그러든? 아니면 엄마가 죄가 없다고 했어?”

“아빠만 그런 거 아니야. 나를 변호하는 사람들, 나를 잊지 못하고 있는 남자들 다 그렇게 생각해.”

“다 합치면 몇 명이나 될까? 100명? 200명? 그렇게도 안 되려나?”

“무슨 소리야? 1,000명도 넘어. 못해도 1만 명은 될 거야.”

“널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지 알아?”

“.......”

“모르면 알려줄게. 최소로 잡아도 5,000만 명은 될 거야.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널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거짓말 하지 마. 그런 사람 없어. 너 빼고 한 명도 없어! 다 거짓말이야~”

정이슬이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발광했다. 눈은 붉게 충혈 됐고, 입에선 하얀 거품이 튀어나와 제정신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멘사회원에 팜므파탈도 사방에서 목을 조여오자 견디기 힘들었는지 이성을 잃고 폭주했다.

믿었던 아빠는 힘도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고, 하린이와 하연이의 노력에 고등학교 일까지 줄줄이 밝혀지자 예쁜 소녀 코스프레도, 한 번의 실수라고 우기는 것도 먹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정이슬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청와대와 검찰 게시판에 하루에도 수천 통의  글을 올렸고, 구치소 앞에는 악마를 화형 시켜야 한다며 개신교 신자들이 몰려와 매일 집회를 열었다.

1차 재판 전만 해도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다고 자만했는데, 이제는 사형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자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침착했던 정이슬도 두려움에 빠져 이성을 잃고 온종일 히스테리를 부렸다.

“빨리 검사에게 말해. 네가 넘겨준 자료 모두 가짜라고. 블랙박스도 조작된 거라고 말해. 빨리 말해.”

“그게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생각하는 게 아니야. 거짓이야. 네가 조작한 거야. 날조한 거라고.”

“정이슬! 정신 차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뉘우쳐. 그러면 검사도 판사도 정상참작해줄 거야. 그러나 네가 한 일이 아니라고 계속 거짓말을 하면 정상참작의 기회마저 사라져.”

“이제 알겠다.”

“뭘?”

“판사와 검사 새끼들에게 몸을 팔았지? 그래서 그놈들이 그렇게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거지? 그렇지?”

“하아...”

“이것 봐. 말 못 하는 거 보면 내말이 맞아. 개년! 나를 죽이겠다고 아무 남자에게나 다리를 벌리다니. 네가 그러고 다니는 거 형필씨는 알아?”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까먹은 거야?”

“네가 어떤 사람인데?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파렴치한 년이잖아. 너와 내가 다른 게 뭐가 있어. 너도 이기적이고, 나도 이기적이야. 우리 둘 다 똑같아. 다른 거 하나도 없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려고 날 부른 거야? 계속 이러면 내가 있을 필요가 없잖아. 네 얘기 잘 들었어. 갈게.”

“아니. 아니야. 가지마. 가지마. 하린아!”

“아직도 할 말이 남았어?”

“내가 마음이 답답해서 헛소리가 나왔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다시는 이상한 소리 하지 않을 테니까 간다는 말은 제발 하지 마. 부탁이야.”

하린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하자 정이슬이 급히 손을 붙잡고 일어나지 못하게 막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은 미안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분노, 증오, 두려움 등이 뒤범벅으로 섞여있어 기괴하고 섬뜩하기만 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별거 아니야. 2차 재판 때 네가 잠시 나와 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네 쪽으로?”

“응.”

“네가 왜?”

“지금은 으르렁대고 싸우지만, 우리 친구잖아. 둘도 없던 친구!”

“그게 언제 적 얘긴지 알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부탁하잖아. 한 번만 도와줘. 제발 한 번만 도와줘.”

“지금 나보러 네 편을 들라는 거야?”

“아.아니야. 그런 뜻 아니야.”

“그럼 뭔데?”

“너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알잖아. 그러니까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말해 달라는 거야.”

“네가 중학교 때까지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는 거 알아.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너처럼 되는 것은 아니야. 그건 지나친 비약이야. 내가 설령 그런 말을 한다고 해도 믿을 사람 없어. 미안...”

“바로 그거야.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네가 증언해주면 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잖아. 초등학교 때 내가 애들에게 무슨 짓을 당했는지. 그 때문에 죽으려고 했던 일도 여러 번 있었고. 그런 내가 정상적인 정신 상태겠어? 아니잖아. 당연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

“.......”

“네가 그걸 증언해주면 돼. 그러면 나는 어릴 적 받은 고통으로 정신에 이상이 생겨 다른 사람을 괴롭히게 된 거야. 그러다 이은택의 꾐에 빠져 그런 짓을 저지르게 된 거고. 검사도 판사도 국민도 이해할 거야. 내 어릴 적 상태를 알게 되면.”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합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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