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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저먹기
181. 거저먹기
“영주님. 마틸다 여사가 뵙기를 청해요.”
“들어오라고 해.”
“네.”
집무실로 돌아와 레이첼이 타준 따뜻한 녹차를 느긋하게 마시고 있자 마틸다가 들어왔다.
이탕가 산맥 앞에 있는 10대 도시 아슈뉴르에 마틸다의 부하 세 명을 보낸 게 게임 시간으로 45일 전이었다.
부하들이 무사히 이탕가 산으로 들어가 크로아탄 가문과 접촉해 마틸다의 뜻을 전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전언을 보낸 게 분명했다.
마틸다가 만나자고 한 건 이 때문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내 작전이 먹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크로아탄 가문은 완벽한 덫에 걸려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다른 세 가문에 잡아먹힐 판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로 이 때문에 내가 내민 동아줄을 붙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놈들이 잡은 동아줄은 하늘로 올라갈 튼튼한 동아줄이 아니라 우물로 떨어질 썩은 동아줄이었다.
그것도 크로아탄 가문에 속한 식솔들을 모두 뺏긴 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악독한 동아줄이었다.
“아버님이 허락하셨어요.”
“제 뜻을 의심하시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군요.”
“의심하다니요?”
“제가 크리아탄 가문을 없애기 위해 베일리 후작과 짜고 그런 제안을 했다고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베일리 후작은 3황자 편이고, 남작님은 황태자 편인데 손을 잡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죠.”
“맞습니다. 그러나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처럼 세상이 워낙 험난하다 보니 다른 편이라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형편없지 않아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태자에게 게르하르트 백작 가문 사람들을 넘기자 내가 황태자에 붙었다는 소문이 한동안 수도 크라쿠푸스와 아슈뉴르를 비롯해 10대 도시에 파다하게 퍼졌다.
마틸다도 아슈뉴르에 보낸 부하들을 통해 그 소문을 들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베일리 후작과 대립하는 황태자파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다른 가문들의 감시가 매우 심해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하시네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으음...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방법요?”
“제가 아주 특이한 능력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어디에 있든 제 곁으로 강제 소환할 수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능력이네요.”
“보잘것없습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대단한 능력을 갖고 계시면서도 겸손까지 하시네요. 그런데 영주님, 겸손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고 했어요. 마음껏 자랑하셔도 돼요. 영주님은 그래도 될 만큼 특별하신 분이세요.”
‘이런 능력을 소문내고 다니라니... 미친년! 제정신이 아니네.’
군주의 소환 능력을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녔다가는 3황자가 보낸 자객에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운이 좋아 목숨을 건져도 황태자가 위험한 임무에 동원할 수도 있어 언제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마음껏 자랑하고 다니라니... 무뇌충이나 할 말로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마틸다님 말씀처럼 방방곡곡 소문내고 다니겠습니다. 하하하하.”
“영주님은 언제나 당당해서 좋아요. 너무 매력적이에요. 호호호호.”
“감사합니다. 하하하하.”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아주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자 마틸다가 꼬리를 치듯 칭찬했다.
현실에서는 백수였지만, 게임에선 영주였다. 그것도 수천 명의 목숨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 남작이었다.
극과 극의 신분만큼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달랐다. 현실에선 백수 신분에 맞게 나서지 않고 조용히 있는 편이었지만, 게임에선 영주 신분에 맞게 웃음도 크게 웃고, 어깨에 힘도 잔뜩 주고 다니는 등 전혀 다른 모습으로 행동했다.
이 때문에 현실과 게임을 혼동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현실을 게임으로 혼동해 진짜 남작이라도 되는 양 어깨에 힘을 줬다.
그렇다고 진짜 귀족처럼 행동하는 건 아니었다. 말할 때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자신감을 가지고 얘기했고, 어디를 가든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러나 변화된 모습은 남작 신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돈이 생기고 든든한 아군이 생긴 게 더 큰 이유였다.
하린이와 하연이가 좌우에서 버티고, 은하가 법에 관련된 일을 맡아주고, 이범석 상사가 슈퍼맨처럼 든든하게 지켜주자 더는 세상이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 600억 원이 넘는 큰돈이 있자 세상이 만만해 보였다. 그래서 움츠러들었던 어깨도 펴지고, 항상 뒤에서 조용히 바라보던 자세도 바뀐 것이었다.
아주 바람직하게 바뀐 것이지만, 무조건 좋다고만 할 수도 없었다. 이 상태에서 더 나아가면 그땐 이은수와 이은택처럼 될 수도 있었다.
천민자본주의자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졸부로 쉽게 큰돈을 벌면 돈의 가치를 잊게 된다.
그래서 돈을 함부로 쓰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매우 위험한 행동과 발상으로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적당한 자신감은 사람을 돋보이게 하지만, 지나친 자신감은 자만심이자 방종으로 사람을 망쳤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항상 감사하고 고마워하며 살아야 했다. 이런 기회를 준 행운에게, 내게 온 하린이와 하연이에게 매일 감사해야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젠데 그러세요?”
“제 부하가 아니면 소환이 안 됩니다.”
“부하요?”
“네. 제 영지 농노이거나 부하여야만 소환할 수 있습니다.”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정말 아쉽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마틸다가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내 눈을 응시했다. 다른 가문들이 정신이 헷까닥 해서 크리아탄 가문을 고이 보내준다고 해도 내 영지까지 오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탕가 산에서 내 영지까지는 거리가 2만km로 지구 반 바퀴를 돌아야 내 땅에 올 수 있었다.
비행기가 있다면 몇 시간이면 올 거리였지만, The Age of Hero에선 하늘을 나는 배 비공정이나 날틀 따윈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비행형 몬스터 때문에 날아가다간 떨어져죽기 딱 알맞았다.
걸어서 오든, 말이나 마차를 타고 오든 무조건 땅을 통해서만 이동할 수 있었다. 20km를 걸어도 발이 퉁퉁 붓고 물집이 잡혔다. 2만km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엄청나게 먼 거리였다.
그리고 The Age of Hero는 지구와 달리 가는 곳마다 NPC를 위협하는 몬스터가 득실댔다.
완전무장한 군대도 정해진 길이 아니면 이동할 수 없을 만큼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3만 명 중 3분의 2가 아이와 여자, 노약자들이 이루어진 크리아탄 가문이 무사히 내 영지까지 오는 건 꿈같은 얘기였다.
걷는 것 빼고 남은 건 공간이동 마법진 포털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털은 준 귀족 이상과 유저만 이용할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어 산적은 이용할 수 없었다.
예외로 귀족인 주인과 함께 이동하는 농노는 포털을 이용할 수 있었고, 부유한 평민은 돈을 왕창 찔러주고 몰래 이동하기도 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편법을 쓰면 가능합니다.”
“어떻게요?”
“아주 간단합니다. 제 영지의 농노가 되면 됩니다.”
“농노요? 그건 좀...”
“그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지에 도착하면 원래대로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마틸다님, 저를 못 믿으십니까?”
“믿어요.”
“그런데 뭐가 걱정입니까?”
“으음...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아틸라 제국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이자 마법 국가로 마법을 이용해 제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한 명도 빠짐없이 신분을 등록해 관리했다.
신분을 증명하는 방법은 귀족은 반지로, 평민은 나무로 된 신분증이었다. 신분증이 없는 사람은 농노와 노예 그리고 산적 같은 도망자를 의미했다.
권력 싸움에 패해 이탕가 산으로 숨어든 크리아탄 가문도 신분이 격하돼 노예로 등록돼 있었다.
그러나 크리아탄 가문은 여전히 자신들을 고귀한 귀족으로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1초라도 농노가 되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치욕이었다.
농노로 등록했다가 영지에 오는 순간 바로 평민으로... 귀족으로 등록하는 건 지위가 복권되기 전에는 불가능함... 바꾸면 실제 농노로 등록된 시간은 며칠 안 됐지만, 내 농노였다는 기록은 영원히 남았다.
아틸라 제국의 자랑스러운 귀족을 자처하는 크리아탄 가문 사람들은... 마틸다의 시아버지를 비롯해 크리아탄 가문의 피가 섞인 사람은 수십 명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농노라 뭣이 됐든 안전하게만 넘어올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시아버님과 친척들은 빼야 할 거예요. 명예를 목숨처럼 생각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쉽지 않으실 텐데요?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안 할 거예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거예요.”
“귀족이라면 당연히 목숨보다 명예를 소중히 해야죠. 그러나 굽힐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나이든 집안 어른들에게 남은 건 크리아탄 가문이라는 이름밖에 없어요. 그것마저 사라지면 모든 게 끝이죠.”
“그렇다면 하는 수 없죠. 하지만 먼 길을 오실 걸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심려 끼쳐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도 그분들처럼 행동했을 겁니다. 저 역시 자랑스러운 귀족이니까요.”
후작 타이틀이 사라진 지 수백 년이 지났다. 그러나 가문의 노인들은 아직도 옛 영광을 잊지 못하고 과거의 망령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탕가 산적의 시발점인 크리아탄 후작 가문이 다른 가문에 밀려 수장의 자리마저 빼앗긴 건 이 때문이었다.
후작이란 이름을 버리지 못해 모든 일에 권위를 내세웠고, 격식을 따지며, 사람들을 무시했다.
그 결과 사방에 적을 만들었고, 이탕가 산에서마저 목숨을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고,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는다고 크로아탄 가문은 200년 전에 사라진 귀족이란 허울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다.
“농노 등록증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양 손바닥 전체를 이곳과 이곳에 찍어 저에게 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제 이름을 적어 제국민 관리 사무소에 제출하면 1시간 내로 제 영지민으로 등록됩니다. 그러면 바로 소환할 수 있습니다.”
“세 가문에서 심어놓은 첩자가 우리 내부에 있을 거예요. 서류를 돌리면 바로 낌새를 차릴 수도 있어요.”
“그러면 먼저 믿을 수 있는 사람들 가족만 농노 등록증을 받으면 되잖습니까? 그 사람들 아내와 자식들부터 영지로 데려오면 됩니다. 아이들과 여자들이 줄어드는 건 다른 가문에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그게 좋겠네요. 고맙습니다. 영주님. 제가 생각해야 할 일을 번번이 영주님이 해주시네요.”
“아닙니다. 작은 도움밖에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정말 큰 도움을 주고 계세요. 죽을 때까지 영주님의 은혜 잊지 않을게요.”
“마틸다님과 저는 이제 한배를 탄 동지입니다. 서로 돕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은혜라고 말씀하시는 건 너무 과합니다.”
“영주님은 진정한 대인이세요. 감사하고 또 감사해요.”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왜 그러십니까? 민망하게.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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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추석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