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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시대-179화 (17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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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179.

“할아버님, 어서 오십시오.”

“그동안 잘 지냈나?”

“걱정해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자주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말괄량이를 두 명이나 보느라 손주 사위가 고생이 컸네.”

손주 사위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싫어서가 아니라 좋아서였다. 손주 사위라는 말은 나와 하린이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하린이 할아버지 입에서 나온 얘기라 아버님과 어머님에게 다시 확답을 받아야겠지만, 집에서 가장 큰 어른이 한 얘기라서 허튼소리라고 할 순 없었다.

“아.아닙니다. 하린이와 하연이에게 매일 신세만 지고 있습니다.”

“저 녀석들이 뭘 할 줄 안다고 신세를 져? 말썽만 부리는 놈들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저보다 더 어른스럽습니다.”

“마누라 예쁘다고 벌써 역성드는 거야?”

“진짜입니다. 생각하는 것부터 집안일까지 무엇 하나 못 하는 게 없습니다.”

“살다 보니 우리 손녀들이 잘한다는 소리를 다 듣고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하하하하.”

하린이와 하연이를 칭찬하자 할아버지가 기분이 많이 좋은지 크게 웃었다. 할아버지가 웃자 할머니와 아버님, 어머님, 오빠 송범준, 누나 송하은, 하린이, 하연이까지 온 가족이 즐겁게 웃어댔다.

분위기가 좋아지자 이범석 상사와 독수리 경호팀 직원들, 다현이, 연아, 민지를 차례로 인사시켰다.

인사가 끝나자 자리를 잡고 참치와 회를 안주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신나게 먹어댔다.

The Age of Hero를 하기 전까진 돈이 없어 깡통에 든 참치 빼고는 회로 먹어볼 기회가 없었다.

시원하고 고소한 맛이 어우러지자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그리고 바싹한 김에 싸먹고, 쌉싸름한 무순과 함께 먹자 맛이 더 좋았다.

하린이네 식구도 입맛에 맞는지 연신 참치에 젓가락이 갔고, 이범석 상사와 김상호, 박무윤, 정동일 상사 등은 먹는 게 아니라 마셔댔다.

다현이와 민지, 연아는 참치보다 오랜만에 많은 사람과 어울리자 분위기에 취하는지 쉴 새 없이 입을 조잘댔다.

나는 할아버지 옆에 앉아 아버님과 하린이 오빠가 권하는 술을 연거푸 마셨다. 안주가 좋고, 사람도 좋자 술이 술술 넘어갔다.

“할아버님! 할머님! 아버님! 어머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하게.”

“하린이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같이 살면 당연히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맞습니다.”

“그러면 승낙받을 일도 없는 것 아닌가?”

“그래도 어른들 승낙을 받아야지요. 그게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린이가 손주 사위 집에 데려왔을 때 우리는 이미 결혼시키기로 결정했었네. 하린이가 나이는 어려도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나이 20살이면 자기 배필은 자기가 정할 나이고. 그러니 날짜나 빨리 잡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올해 안에 꼭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감사해야 할 일 아니네. 자기 인생인데 자기가 자기 결정하는 것이지. 안 그러냐 하린아?”

“맞아요. 할아버지.”

“기분도 좋은데 이번에는 네가 한잔 따라봐라. 결혼할 손녀 술 한잔 받아보자.”

“네.”

결혼 승낙까지 떨어지자 분위기가 더욱더 달아올라 술병 비는 소리가 들릴 지경으로 술이 사라졌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나와 하린이의 결혼 발표에 다현이와 민지, 연아는 기죽은 강아지처럼 축 처졌다.

셋 다 아직은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빨리 기회가 사라지자 낙담해 기운이 쏙 빠진 것이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하연이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연신 밝게 웃어댔지만, 눈에는 슬픔이 가득해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하연이가 평생 우리와 함께해도 결혼이라는 말은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여자에게 결혼은 남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특별했다.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람들의 축하 속에 사랑하는 사람과 진정한 삶을 시작하는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오롯이 나만의 남자를 갖게 되는 것이자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가질 수 있는 특권 갖는 순간이었다.

그걸 할 수 없다는 건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픈 일이었다. 아파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둘만 있다면 살며시 손이라도 잡아 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하연이 기분이 어떤지 눈으로 좇는 것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디가?”

“참치 가지러 가요.”

“내가 갔다 올게. 앉아서 먹어.”

“아니에요. 제가 가지고 올게요.”

“술 좀 깨야 해서 그래. 너무 많이 마셨어.”

“그럼 같이 가요.”

“그래.”

참치 나른다고 하린이와 하연이가 1층과 2층을 연신 오르내리자 신경이 쓰여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범석 상사와 독수리 경호팀이 참치를 먹는 속도가 빛처럼 빨라 커다란 접시에 산처럼 쌓아 와도 5분이면 바닥을 비웠다.

그 때문에 주방장과 부주방장이 비지땀을 흘리며 참치를 썰어야 했고, 하연이와 하린이, 이연숙 중사, 박미향 중사가 1층과 2층을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가서 먹는 건데 그랬어.”

“저는 집에서 먹으니까 더 좋은데요.”

“힘들잖아.”

“하나도 안 힘들어요. 그리고 사다가 먹는 것도 돈이 이렇게 많이 드는데, 나가서 먹었어 봐요. 기둥뿌리 뽑혔어요.”

“그렇긴 하지.”

“평소에도 밥 서너 그릇씩 가뿐히 드셔서 많이 먹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군인 월급이 얼마 안 돼서 그래. 그래서 비싼 참치 먹을 기회가 거의 없어. 그러니 오늘 최대한 많이 먹어야지.”

“많이 먹는다고 욕한 거 아니에요. 놀라서 그런 거예요.”

“알아.”

주방장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참치를 해체해 썰어내는 동안 하연이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렇게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었다. 이런 행동이 위로가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위로해주고 싶었다.

“오빠.”

“어?”

“우리 꽁돈 생겼는데 근사하게 집 지어서 살까요?”

“이 집 싫어?”

“그런 게 아니라 오빠와 언니, 저만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그래요.”

“우리만의 세상?”

“네.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우리만의 세상요.”

“흐음...”

하연이 말은 대한민국 안에 또 다른 국가를 만들자는 얘기였다. 대한민국에 사는 이상,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 대한민국 법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를 따르지 않고 사는 방법이 있었다. 그건 외부와 단절된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외부에 영향만 주지 않는다면 그 안에선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있었다. 그것이 곧 우리만의 왕국이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았다. 도시를 떠나 홀로 산에서 사는 사람, 무인도에서 홀로 사는 사람, 철조망과 높은 담으로 산 한두 개를 막아 주인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해놓고 사는 사람 등 많은 사람이 자기만의 왕국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았다.

하연이는 우리만의 왕국에서 누구의 방해도 없이 살길 원했다. 그 안에서는 하연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으니까.

“어떻게 생각해?”

“하연이가 원하면 그렇게 해야지.”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런데 그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오빠, 사랑은 다른 사람이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서로가 좋아하고, 만족하면 되는 거야. 남의 시선 따윈 깨끗이 무시해도 돼.”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한다고 쳐도 부모님은 어쩔 건데?”

“모르실 거야.”

“딸의 일이야. 모를 수가 없어.”

“하연이 마음을 안다면 이해하실 거야.”

“어느 부모가 그걸 이해해?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딸이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함부로 말한 거 아니야. 하연이 오빠 없으면 무슨 짓 할지 아무도 몰라. 그런 일 일어나길 바라는 거야?”

“하아...”

술자리가 끝나자 하린이에게 하연이가 넓은 땅을 사서 우리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하연이와 사전에 교감에 있었는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자고 했다. 이 결정은 내가 좋다 싫다 관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하린이와 하연이의 의견에 따라야 했다. 그래야 훗날 서로를 원망하는 일이 줄어든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게 아니었다. 자기가 결정한 일은 잘못돼도 후회가 덜 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 후회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디가 좋을까?”

“서울 근교가 낫지 않겠어? 시골이나 섬은 우리 집에 오가기가 너무 힘들어.”

섬을 하나 사서 우리만의 왕국으로 꾸민다면 진짜 누구의 간섭도 없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충분한 식수가 나오고, 접안 시설 건설이 가능하며, 육지와의 거리가 가까운 섬을 구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가깝다고 해도 먹을 것을 운반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고, 하린이네 집까지 오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려 섬은 제외해야 했다.

“양평이나 가평 아니면 용인이나 광주 어때?”

“그 정도면 적당할 것 같네. 그런데 누구에게 알아봐 달라고 하지?”

“사촌 언니가 부동산 관련 일을 하고 있어. 언니에게 부탁해볼게.”

“알았어. 그런데 이은택에게 뺏은 돈을 쓰면 걸릴 텐데?”

내 소득은 게임을 통해 생겨 소득이 100% 드러났다. 가진 것 이상의 돈을 쓰면 세무서에 걸릴 수도 있었다.

“땅 사는데 빨라도 몇 달은 걸릴 거야. 그 사이 이은택의 금고에서 가져온 돈으로 금화를 조금씩 사놨다가 사냥해서 얻은 아이템을 팔 때 같이 파는 거야. 그러면 표시 나지 않을 거야.”

“그러기엔 금액이 너무 많지 않나?”

“한 번에 팔면 그렇지. 매달 10억 원 정도씩 바꾸면 표시 안 나.”

“그러면 1년 동안 해도 120억 원밖에 안 되잖아?”

“무기명 채권 400억 원은 당장 팔 필요 없잖아? 200억 원이면 땅 사고 집 지어도 남지 않나.”

“달러와 골드바는 어떻게 팔려고?”

“달러는 은행에 가서 바꾸면 되지.”

“한도 있지 않아?”

“없어진 지 오래야.”

“그럼 골드바는?”

“보증서 있지 않았어?”

“있어.”

“그러면 종로 금은방 가서 팔면 되잖아. 대신 한두 개씩 옮겨 다니면서 파는 게 안전하겠지. 돈이 많으면 파리가 꼬이니까.”

하린이 말처럼만 되면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5만 원짜리 지폐 25억 원은 은행에 갈 때마다 조금씩 입금하고, 필요한 걸 살 때 쓰면 된다.

그러나 골드바와 달러는 현금으로 바꾸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1kg짜리 골드바가 50억 원, 1,000달러짜리 지폐가 25억 원으로 하루에 1억 원씩 바꿔도 125일이 걸렸다.

그리고 매일 골드바와 달러를 바꾸러 종로와 은행을 돌아다니면 금은방 사장들, 은행 직원들과 친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동네방네 얼굴을 팔고 다니면 세무서가 아니라 경찰이 집에 찾아올 수도 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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