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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시대-175화 (17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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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찍한 음모

175. 깜찍한 음모

“하린아, 은하한테 전화해서 마림 재단 비리 내일 아침 언론사에 터뜨리라고 해.”

“오빠가 전화하지 그래? 언니 오빠 전화 기다리던데.”

“아니야. 네가 해.”

“부담스러워?”

“어.”

“알았어.”

다음 날 아침 은하에게 전화가 왔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으면 할 말이 없어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전화를 받지 않으면 일이 더 꼬일 게 분명해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통화버튼을 누르자 은하가 밝은 목소리로 잘 들어갔냐고 물었다. 나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어 잘 들어왔다는 말과 함께 잘 잤냐고 물었다.

나와 헤어진 후 가장 편안한 밤이었다고 잘 때까지 옆에 있어 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러면서 너무 늦게 들어가 하린이에게 혼나지는 않았는지 걱정했다.

30분 넘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지만, 걱정과 달리 지난밤에 있었던 일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전화하는 내내 목소리는 10대 소녀처럼 밝았고, 말투도 고등학교 3학년 때로 돌아가 있었다.

내 마음 일부를 돌렸다고 생각하는지 기분이 한껏 업돼 있었다. 한숨이 나왔지만,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6년 만에 다시 찾은 행복에 찬물을 끼얹을 순 없었다. 그렇다고 맞장구를 쳐줄 수도 없어 그날부터 업무적인 전화도 모두 하린이를 통해서 했다.

더 가까워져서는 안 되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한 은하는 그에 굴하지 않고 하루에 한 번은 꼭 전화를 걸어왔다.

내 잘못이 너무나 커 전화를 안 받을 수 없었다. 내가 좀 더 진중했다면 은하가 그런 생각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엉킨 실타래처럼 점점 꼬여갔지만, 풀 방법이 없었다. 통증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환자처럼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 빼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해외 언론사에도 자료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국내 언론 중에 공정하게 보도할 언론이 많지 않잖아.”

“해외 언론이 도움이 될까?”

“우리나라 정부가 해외 언론에 얼마나 민감한지 모르지? 국내 언론이 떠드는 건 신경도 안 쓰면서 해외 언론이 떠들면 대책 회의까지 해.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거지.”

“사대주의 끝내주네. 언제까지 그럴까?”

“이 상태로 간다면 답이 없지. 정말 한심해.”

레바논에 있을 때 국가가 힘이 없으면 어떤 대우를 받는지 몸으로 여실히 느꼈었다.

치안이 불안하고 못사는 국가라 한국 군인을 괄시하진 않았지만, 미국 군인과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랐다.

우리는 소 닭 쳐다보듯 하면서 미국에는 아주 저자세를 취하며 뭐든지 다 들어줄 것처럼 행동했다.

미국에 불만이 많은 지역이라 전체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관리와 사업가들은 미국에 아주 친절한 모습을 보였다.

현지인의 반응보다 더 참담한 건 우리가 미국을 대하는 태도였다. 상급부대라도 되는 듯 부당한 요구를 해도 묵살하지 못하고 모두 들어줘야 했다.

내 나라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었지만, 나라를 대표하는 위정자들과 반짝이는 별을 주렁주렁 단 군인들은 미국이라면 꼬리부터 말고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 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피가 나도록 이빨을 악물고 주먹을 꽉 쥐는 것밖에 없었다.

“해외 언론에도 보내라고 한다?”

“어.”

“금고에서 빼 온 장부는 어떻게 할 거야?”

“그것도 함께 터뜨리라고 해.”

“병원 CCTV 동영상은?”

“그건 모레 보내라고 해.”

“블랙박스는?”

“으음... 검찰이 마림 재단 압수 수색하면 그때 내보내자.”

“알았어.”

한 방에 안 되면 두 방, 두 방에 안 되면 세 방, 네 방을 날려서라도 상대를 끝장내면 됐다.

대신 타이밍이 중요했다. 큰 펀치도 띄엄띄엄 맞으면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잔 펀치도 연달아 맞으면 충격이 쌓여 힘없이 무너진다.

하지만 나는 잔 펀치를 날릴 생각이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큰 펀치를 연달아 날려 마림 재단과 이은택을 완벽히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상사님, 이은택을 고발하겠다는 사람은 몇 명이 됩니까?”

“10명도 안 돼. 정말 어이가 없다. 자식이 그런 꼴을 당했는데, 어떻게 숨길 생각만 할 수 있지? 나 같으면 절대 가만있지 않아. 아니지. 그전에 내 손으로 놈의 모가지를 비틀었겠지.”

“숨기는 게 아니라 밝힐 수가 없는 거겠죠.”

“그럴수록 밝혀야 해. 안 그러면 제2, 제3의 피해자가 생겨. 그 피해자가 둘째 딸이 될 수도 있고, 셋째 딸이 될 수도 있어. 왜 그건 생각하지 못해?”

“그들도 알 겁니다. 하지만 자식 미래가 걸린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욕하는 나라잖습니까. 나서고 싶지만 나설 수 없는 겁니다.”

“바보 같은 놈들.”

“한다는 사람만 김은하 변호사에게 명단 넘겨주십시오. 관련 자료는 제가 챙겨서 보내겠습니다.”

“알았어.”

이은택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평생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들도 구제하기 위해 범죄를 입증할 자료를 찾은 후 부모에게 연락해 소송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100명이 넘는 피해자 중 8명만이 소송에 참여할 뜻을 비쳤다. 소송 참가자가 적은 건 피해자 대부분이 여자라서였다.

그리고 피해자의 절반 이상이 이은택에게만 성폭행을 당한 게 아니었다. 놈의 똘마니들에게도 무참하게 짓밟혔다.

더군다나 한 번이 아니라 최소 1년 이상은 끌려다니며 온갖 몹쓸 짓을 당했다. 거부하고 싶었지만, 이은택과 똘마니 놈들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둬 나오지 않으면 인터넷에 풀어버린다고 협박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2명이 목숨을 끊었고, 3명이 정신 병원에 입원했다. 나머지도 심각한 정신장애를 앓고 있었다. 직접 죽인 5명을 빼고도 이은택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아파하고 있었다.

이 모든 죄를 놈에게 묻고 싶었다. 그리고 최고형으로 놈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지우고 싶었다.

그러니 우리나라는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더 괴롭혔다. 강간을 당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평생 꼬리표처럼 그 소문이 따라다녔다.

그건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그래서 소송에 동참하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그러지 못하는 그들의 억울한 심정을 알기에 욕할 수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마림 재단 비리가 뉴스와 인터넷 그리고 해외 언론을 통해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큰 사학재단 비리 사건이자 정·재계에서도 가장 큰 뇌물 사건으로 언론은 마림 재단 사건을 마림 게이트라고 불렀다.

분식 회계와 공금 횡령으로 10년 동안 빼돌린 돈이 1조 원 넘었고, 부정입학으로 받은 돈이 1,000억 원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향응 제공과 성접대가 오간 건 이야깃거리도 안 됐다.

성적 조작, 여학생 성폭행 등 수많은 사건이 일어났지만, 재단이 이를 감추는데 앞장섰다.

또한, 급식업체 선정과 특정 업체 교복 구입, 강제 어학연수, 불법 건축, 용도 변경 등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범죄가 드러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건은 정치권과 검찰, 경찰, 언론에 뿌린 검은돈으로 10년간 무려 2,500억 원이 넘는 돈을 뿌렸다.

이건 이은택의 사설 금고에서 가져온 장부에서 나온 것으로 돈을 준 날짜, 금액, 입금한 계좌, 현금으로 줬으면 어디서 누굴 통해줬는지까지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심지어 돈을 주고받는 장면을 녹화한 영상과 음성 파일, 사진도 있어 발뺌할 수도 없었다.

이은택의 모친이 장부 맨 뒤에 꽂혀 있던 메모리 카드도 함께 복사해둔 덕분에 장부에 이름을 올린 100명은 폐가망신행 특급 열차에 타게 됐다.

“야당이 특검을 요청했어. 정부도 국민 여론을 의식해 검사장급으로 전담팀을 꾸리겠다고 발표했고.”

“언니, 이번에는 빠져나가기 힘들겠죠?”

“증거가 확실해도 너무 확실해서 절대 빠져나갈 수 없어.”

“마림 재단을 끝장내야 해요. 그래야 오빠가 편안하게 살 수 있어요.”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깡그리 없앨 거야. 형필이를 건드리는 놈들은 절대 살려둘 수 없으니까.”

“언니만 믿을게요.”

“걱정하지 마. 목숨 걸고라도 그렇게 만들 테니까.”

“고마워요 언니.”

“아니야.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야. 네가 아니었으면 형필이와 어떻게 생일을 같이 보낼 수 있었겠어. 하린아! 앞으로 더욱 잘할게. 나 미워하면 안 돼.”

“그럼요. 저 언니 좋아해요. 절대 미워하지 않아요.”

“고마워.”

“그럼 고생하세요. 내일 또 전화 드릴게요.”

“응. 들어가.”

“네.”

“언니도 여우 다 됐네.”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는 거 아니겠어?”

“당연하지.”

“넌 내게 뭘 줄 거야?”

“영원한 충성. 그리고 사랑.”

“쓸데없는 거 생각하지 말고 말이나 잘 들어. 대들지 말고.”

“나 언니 동생이야. 그 정도도 못 해?”

“동생 아니었으면 너 쫓겨나도 백 번은 더 쫓겨났어.”

“히잉.”

“너와 내가 합심해야 오빠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지 않아. 무슨 뜻인지 알지?”

“응.”

“넌 내 동생이자 영원한 동지야. 이점 잊으면 안 돼.”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 나도 언니 빼고 다른 여자가 오빠 옆에 있는 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

“은하 언니는 인정해줘야 해. 앞으로 오빠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고, 오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아. 은하 언니는 밀어내면 안 돼. 그러면 오빠와 싸우게 될 수도 있어.”

“알았어.”

“앞으로 오빠를 유혹하려는 여자가 수도 없이 많이 나타날 거야. 다현이와 수정이, 민지, 연아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우리가 옆에 있어 다가오지 못하고 있지만, 오빠가 손을 내밀면 옆에 찰싹 달라붙을 거야.”

“절대 안 돼. 죽어도 그 꼴은 못 봐.”

“그러니까 너 하고 나 하고 한시도 오빠 옆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거야. 내가 없으면 네가, 네가 없으면 내가 있어야 해.”

“알았어. 절대 떨어지지 않을게.”

“오빠는 너와 나만의 것이야. 다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어.”

“맞아. 오빠는 우리만의 것이야.”

“앞으로도 지금처럼 행동하면 돼. 그러면 오빠는 다른 곳을 쳐다볼 생각도 못 할 거야.”

“오빠에게 좀 미안해. 속이는 거 같아서.”

“뭘 속여?”

“언니와 내가 이러는 거 모르잖아.”

“알아도 달라지는 거 없어. 반대로 이런 너와 내 마음에 더 미안해할 거야. 그러니 말하지 않는 게 좋아.”

“알았어.”

마림 재단을 무너뜨리기 위한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 3층 베란다에선 한 남자를 자매가 독차지하기 위한 또 다른 음모가 착착 진행 중이었다.

송하린, 송하연 두 자매만 아는 음모로 그물에 걸린 남자도 모르고,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모르는 음모였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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