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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시대-173화 (17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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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173.

“그렇지 않아. 네 말처럼 내가 뛰어났다면 이 나이 먹도록 놀고만 있진 않았을 거야. 능력이 없으니 이러고 있지.”

“우리 나이 이제 25살이야.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지금 아무것도 없어도 기죽지 않아도 돼. 네 미래는 창창하니까.”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어. 나는 싹이 노래.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밝은 미래 따위는 없어.”

“될 성 싶은 떡잎인지 아닌지는 자기가 판단하는 게 아니야. 남들이 보고 판단하는 거야. 내가 보는 너는 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크게 될 거야. 큰 인물이 될 거라고.”

“너는 나쁜 것도 좋게 보고, 작은 것도 크게 보고 있어. 편파적이라고 할 만큼 지나치게. 왜인 줄 알아?”

“친구니까.”

“그래. 그러니까 너도 나를 잘못 보고 있는 거야.”

“그런 부분이 없지 않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너 못 나지 않았어. 잘났어.”

“그만해. 사람들이 들으면 욕해.”

“사실을 말했는데 누가 욕한다는 거야? 욕하면 그 사람이 이상한 거야. 신경 쓸 거 없어.”

“하아...”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은하를 보자 깊은 한숨이 나왔다.

나에 대한 은하의 믿음은 중증환자보다 상태가 더 심했다. 달을 해라고 하고, 바다를 강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맹목적이었다.

사이비종교 교주에 홀딱 빠진 맹신도보다 더한 믿음과 사랑으로 나를 대했다. 은하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만화로 표현한다면 후광이 태양처럼 비추는 왕자가 백마 탄 모습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부터는 XXXX호에서 지내. 이 방만큼 좋진 않지만, 지내기 불편하지 않을 거야.”

“알았어.”

“그리고 내일부터 경호원 두 명 더 올 거야. 둘 다 여자로 24시간 네 곁에 붙어 있을 거니까 불편해도 참아.”

“경호원을 두 명이나 더 늘려?”

“이은택이 체포됐지만, 놈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어. 마림 재단 무너질 때까지 조심해야 해.”

“호텔에 경호원까지 돈이 너무 많이 들잖아.”

“돈보다 네 안전이 백배는 더 중요해.”

“형필아!”

네 안전이 더 중요하다는 말에 감동한 은하가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러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자꾸만 일이 꼬였다.

“그만 가볼게.”

“이거 다 비울 때까지만 있어 주면 안 돼?”

은하가 반쯤 남은 술병을 가리키며 조금만 더 있어 달라고 했다. 달달한 와인은 마실 때는 부담이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취기가 확 올라온다.

와인을 한 병 넘게 마시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은하도 한 병 넘게 마셔 얼굴이 발그레했다.

이때가 가장 위험했다. 술은 사람을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고, 화나게도 하는 등 정신이상자로 만들었다.

그중에는 욕망을 부채질하는 힘도 있어 남녀가 밀폐된 공간에서 단둘이 있으면 사고가 날 위험도 있었다.

계속 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빨리 자리를 떠야 했다. 그러나 내 손을 꽉 잡은 은하가 눈에 물기를 가득 품고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자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아야 한다고 했다. 잘해놓고 산통을 깨고 갈 순 없었다. 생일을 즐거운 기억으로 남게 하려면 끝까지 잘해야 한다.

“이것만. 부탁이야.”

“알았어.”

다시 자리에 앉자 은하가 술을 따라줬다. 취할 만큼 마시지는 않았지만, 더 마시면 감정이 격해질 수 있어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놓았던 손을 다시 잡은 은하가 고양이처럼 커다란 눈으로 애처롭게 나를 바라봤다.

“히잉~”

“알았어. 마실게.”

“히히히히. 먹혔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 약한 건 여전하네.”

“사람이 변하면 죽는 거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거지?”

“글쎄?”

고등학교 3학년 때 은하는 자기가 원하는 걸 내가 들어주지 않으면 언제나 손을 잡고 커다란 눈에 습기를 가득 품고 고양이처럼 쳐다봤다.

귀여운 그 모습을 보고 넘어가지 않을 남자는 세상에 없었다. 결국, 은하의 눈물과 애교에 넘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줬다.

그때 그 모습을 다시 보자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자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도 솟구쳤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됐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켜야 할 게 있었다. 그건 하린이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었다.

그것이 깨지면 지금껏 버텨왔던 내 마음도 무너진다. 쓰나미가 몰려와도 이겨내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행복했다.

“하린이 정말 예뻐. 여자인 내가 봐도 질투 날만큼. 어떻게 그렇게 예쁠 수가 있지? 부럽다.”

“너도 예뻐. 모든 남자가 바라볼 만큼.”

“나도 그런 줄 알았어. 하린이와 하연이 만나기 전에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정말 예쁜 줄 안 바보였어.”

“그런 말 하면 여자들이 욕해. 잘난 척한다고.”

“하린이, 하연이 옆에 서면 완전히 오징어야.”

“하린이 얼굴 보고 사귄 거 아니야. 착한 마음 때문에 사귄 거야.”

“그 말이 더 무섭다.”

“왜?”

“얼굴은 질려도 마음은 안 질리니까.”

“너도 착해. 그러니 비교하지 않아도 돼.”

“위로가 안 돼. 앞에 너무 큰 벽이 있어서.”

은하도 어디 가서 인물 빠진다는 말을 들을 얼굴과 몸매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린이와 하연이는 걸 그룹 중 미모가 가장 출중한 히어로걸스도 오징어를 만드는 외모였다.

그런 완벽한 미모의 하린이가 내 옆에 있자 은하는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틈이 없는 건 하린이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내 마음이 은하를 떠나서였다. 은하는 그걸 모르고 있었다.

“형필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말해.”

“하연이와는 무슨 사이야?”

“무슨 사이라니?”

“어떤 사이냐고.”

“하린이 동생이잖아. 그러면 내 동생이나 다름없으니 여동생이라고 할 수 있지.”

“여동생이 오빠를 짝사랑하는 건가? 아니면 오빠도 여동생을 사랑하는데 언니 때문에 아닌 척하는 건가?”

“무슨 말이야?”

“하연이가 너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서. 너도 하연이 싫어하지 않는 것 같고. 하린이만 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인데, 하연이까지 있으니 너무 답답하다.”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오해하지 마.”

“아니면 다행이고. 그런데 나는 왜 자꾸 그렇게 보이지?”

“.......”

점점 취기가 더해가자 은하가 마음속 깊이 감춰두었던 은밀한 얘기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아주 위험한 상황으로 이 상태에서 조금 더 진행되면 그때는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위험지대를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그래야 하린이에 대한 내 사랑과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

벌컥벌컥

잔에 가득 담긴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곤 병에 남은 와인까지 모두 마셔버렸다.

술을 비웠다고 그만 가겠다고 하는 건 정말 고지식한 짓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약속을 지키고 방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게 내가 은하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약속대로 다 마셨어. 갈게.”

“그렇게 내가 싫어?”

“아니.”

“그럼 좋아?”

“좋아해.”

“그럼 사랑해?”

“미안하지만, 사랑하진 않아.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하린이 한 명뿐이야.”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뭐가 달라? 같은 거 아니야?”

“너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하늘과 땅만큼 달라.”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변하면 죽는다고 했잖아. 잘 자.”

잘 자라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냉정하다고 느낄 만큼 싸늘하게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와락

문고리를 잡는 순간 은하가 뛰어와 등을 꼭 끌어안았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달콤한 향기와 뭉클한 가슴이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형필아, 나 많은 거 바라지 않을 게. 일주일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만 만나줘. 만나서 오늘처럼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가끔 한 번씩 안아줘. 나 그거면 돼. 그렇게만 해주면 행복할 수 있어.”

“하린이 눈을 피해 만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 그건 행복이 아니라 지옥이야.”

“지옥이라도 좋아. 네 품에 다시 안길 수만 있다면 지옥이라도 좋아.”

“나는 싫어. 한때 내 부모였던 그들처럼 행동하기 싫어. 절대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가족에게 피눈물 흘리게 하진 않을 거야.”

“너는 하린이에게도, 내게도 잘할 거야. 너는 네 부모였던 사람들과 다르니까.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나라고 별수 있을 것 같아? 그렇지 않아. 사람은 누구나 똑같아. 나도 그들처럼 너와 하린이에게 상처만 줄 거야.”

“나는 안 그런다고 믿어.”

“은하야. 나는 앞으로도 계속 너를 좋아할 거야. 죽을 때까지 너를 좋아할 거야.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그러니 너도 이쯤에서 마음 접어. 우리가 모두가 행복해지려면 선을 지켜야 해. 선을 지키지 못하면 모두가 불행해져.”

몸을 돌려 은하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차근차근 말하며,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 설명했다.

“이 상태면 되는 거야?”

“... 그래.”

“알았어. 이 상태까지만 할게.”

와락

이 상태까지만 한다고 말한 은하가 품에 안겨 왔다. 내가 말한 이 상태는 친구였는데, 은하가 생각한 이 상태는 오늘 했던 행동까지였다.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웃고 떠들고, 이렇게 품에 안기는 것. 그것이 은하가 말한 이 상태까지만 이였다.

‘오빠! 은하 언니 상처 주지 마. 그건 은하 언니를 벼랑 끝으로 모는 거야. 만남이 아름답다면 헤어짐도 아름다워야 해. 이말 명심해!’

차에 타기 직전 하린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기억하자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내가 뭐라고 6년을 기다린단 말인가? 그리고 매몰차게 밀어내도 끝까지 매달린단 말인가? 내가 대체 뭐라고...

팔을 뻗어 은하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렇게라도 은하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고 싶었다.

“흑흑흑.”

등을 쓰다듬자 은하가 눈물을 흘렸다.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자 뜨거운 눈물이 가슴을 적셨다.

가슴을 파고든 눈물이 내게 말했다. 힘들었다고. 외로웠다고. 보고 싶었다고. 품에 안기고 싶었다고. 미치도록 사랑하고 싶었다고.

“키스해줘.”

“안 돼.”

“한 번만 해줘. 부탁이야.”

“안 돼.”

“딱 한 번만. 이대로 가면 나 가슴이 너무 아파서 죽을지도 몰라. 한 번만 키스해줘. 제발!!”

“하아...”

매몰차게 돌아서야 했지만, 돌아설 수 없었다. 이대로 돌아서서 문을 나가면 은하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정신적 데미지를 크게 입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준 상처만 해도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목숨을 위협하는 상처까지 주는 짓을 할 순 없었다. 그것만은 절대 피하고 싶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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