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의 시대-172화 (17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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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172.

“다녀올게.”

“재미있게 놀다 와.”

“알았어.”

“오빠, 너무 일찍 오지 마세요. 그건 은하 언니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노력해볼게.”

“노력하는 게 아니라 무조건 그래야 해요. 12시 이전에 들어오면 문 안 열어줄 거예요.”

“하아... 알았어.”

“늦겠다. 빨리 가.”

“어.”

하린이와 하연이의 지나치게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랐다. 석가탄신일이라 많이 막혔지만, 약속 장소인 호텔까지는 차로 30분 거리라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똑똑

방에 올라가 5분쯤 기다리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연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은하가 서 있었다.

원피스는 어깨가 잔뜩 파여 아름다운 쇄골이 다 드러났고, 길이도 짧아 허벅지도 반 이상 드러나 늘씬한 다리가 다 보였다.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여성미가 물씬 풍기자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당황한 티를 내면 분위기가 더 이상해질 수 있어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나도 나름 반듯하게 차려입고 왔다. 하린이네 집에 갈 때 새로 산 양복에 연한 파란색 와이셔츠, 회색 줄무늬가 들어간 파란색 넥타이를 맸고, 하연이가 광을 낸 반짝이는 구두를 신었다.

평소 후줄근한 운동복 차림과는 크게 비교도 안 되는 모습으로 하린이와 하연이가 깔끔하게 가야 한다고 성화를 부려 차려입고 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청바지에 긴 팔 티셔츠 차림으로 쫄래쫄래 왔을 것이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도착한 지 5분밖에 안 됐어.”

“다행이다. 오래 기다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차가 어찌나 막히는지 평소보다 3배나 오래 걸렸어.”

“나도 많이 막혔어.”

“비슷한 시간에 도착해 다행이다.”

“그러게.”

조금 일찍 오고 늦게 오는 게 무슨 대수겠는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은하가 주저리주저리 말을 이어간 것뿐이었다.

“많이 배고프지?”

“응.”

“먹고 싶은 거 골라.”

“고마워.”

식탁에 놓인 메뉴판을 건넸다. 식탁에 앉자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 4월이라 해가 짧아 6시 30분밖에 안 됐지만, 밖은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길게 늘어진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춤을 추듯 반짝이는 네온사인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린이가 6년 만에 만난 옛사랑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잡아준 호텔방은 고풍스러운 탁자와 소파, 식탁, 의자 등이 아름답게 방을 꾸미고 있었다.

원목 침대는 남녀가 뒹굴어도 될 만큼 컸고, 샤워실도 성인 남녀가 물장구를 칠 만큼 넓었다.

하룻밤 투숙비가 못해도 200~300만 원은 할 것 같았다. 이은택의 사설 금고에서 훔친 돈을 빼고 100억을 넘게 벌었지만, 여전히 영세민의 새가슴을 버리지 못해 방에 들어서는 순간 헉 소리가 났다.

그러나 하린이가 신경 써서 잡아준 방이었다. 값을 따질 게 아니었다. 무조건 고마워해야 했다.

“나는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시켜줘.”

“알았어.”

띠링 띠링

“룸서비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녁 식사시키려고 해요.”

“말씀하십시오.”

“고기는 안심스테이크에... 술은 XXX 와인으로 한 병 주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은하가 아주 여유롭게 음식을 주문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는 말을 척척 하는 것으로 보아 고급 식당에 자주 간 것 같았다.

다른 남자와 고급 식당에서 밥 먹는 모습이 그려지자 화가 났다. 이제는 내 여자 아닌데 화를 내는 내 모습이 너무 황당했다.

‘남 주긴 아깝다는 건가? 나도 정말 속물이네.’

은하는 변호사였다. 그리고 집도 살 만큼 살았다. 고급 식당에 가보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고급 식당에 간다고 남자와 밥을 먹으라는 법은 없었다. 여자끼리 갈 수도 있고, 일 때문에 갈 수도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질투하는 내 모습이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주 다녔나 봐?”

“어디?”

“고급 식당.”

“오해하지 마. 아니야. 나 비싼 식당 일 때문에 서너 번 간 게 전부야.”

“그래?”

“응. 나 맛있는 음식 먹으러 다니는 프로그램 좋아해. TV에서 자주 봐. 그래서 어렵지 않게 시킨 거야. 그리고 메뉴판도 있잖아. 그대로 읽은 것뿐이야.”

아니라는 말에 부글부글 끓던 속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빼앗겼던 사탕을 다시 찾은 느낌이라고 할까?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알려줘도 못 해.”

“안 해봐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누구나 할 수 있어. 그리고 너 나보다 공부 잘했잖아.”

“네가 더 잘했어.”

“거짓말하지 마. 너는 전교 10위권이었고, 나는 50위 안에도 못 들었어.”

“그럼 뭐해. 나는 이제 겨우 대학 들어갔고, 너는 변호사인데.”

“그거야 우리 엄마·아빠 극성 때문에 한 거고, 너는 집안 사정 때문에 못한 거잖아. 네게 기회가 주어졌다면 판사 하고 있을 거야.”

“너무 띄워주지 마. 떨어지면 아파.”

“진짜야. 거짓말 아니야.”

은하와 둘이 있으면 어색해서 말도 못 할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잠시 어색했지만, 은하가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자 고등학교 3학년 때처럼 편해졌다.

그렇게 은하의 주도로 우리는 옛 얘기에 빠져들며 아름다운 과거를 추억했다. 사귄 시간은 고작 6개월에 불과했지만, 붙어 있던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얘기가 끝도 없이 나왔다.

웃기는 건 그때는 분명 힘들고 아픈 기억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기억이 왜곡됐는지 지금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룸서비스가 도착해 음식을 세팅하고 나가자 와인을 마시며 다시 옛 얘기에 빠져들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 안심스테이크보다 더 재미있는 은하의 얘기에 빠져 나도 모르게 와인을 연거푸 마셔댔다. 식사를 시작한 지 30분도 안 돼 와인 한 병을 비워졌다.

“한잔 더 할 거지?”

“그래.”

은하가 와인을 한 번에 2병이나 시켰다. 과한 느낌이 들었지만, 오늘은 은하 생일이었다. 오늘만큼은 은하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둬야 하는 날이었다.

채앵

“생일 축하해.”

“고마워.”

“약소하지만, 선물이야.”

“선물도 준비했어? 방만 해도 엄청나게 비쌀 텐데.”

“6년만의 만남이잖아.”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우리 형필이 인간됐네.”

“흐흐.”

하린이가 방을 잡아줬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오늘은 끝까지 은하 기분을 맞춰줄 생각이었다. 그렇게라도 6년 전 잡아주지 못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다.

“이거 세계적인 명품 시계 파텍 필립(Patek Philippe)의 그랜드 컴플리케이션(Grand Complication)이잖아.”

“어떻게 알았어?”

“나 시계 정말 좋아해.”

“그래? 그럼 시계 많겠네?”

“이런 명품 살 돈 없어. 나 가난한 변호사야. 그냥 좋아만 하는 거야. 그래서 잡지에서 사진으로만 감상했어.”

파텍 필립(Patek Philippe)는 시계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최고라는 찬사를 보내는 스위스 시계브랜드였다.

넘버2인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 브레게(Breguet), 아 랑에 운트 죄네(A. Lange & Sohne)만이 파텍 필립의 명성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었다.

“이거 엄청나게 비싼 건데 받아도 돼?”

“나 때문에 고생 많잖아. 한동안 계속 그래야 하고.”

“그래도 너무 비싸.”

“이거 6년 동안 모은 적금 보태서 산 거야.”

“적금?”

“우리 사귈 때 너 다음 생일 때 선물 사주려고 적금 들었었어.”

“그걸 깨지 않고 아직까지 가지고 있었어?”

“어.”

“형필아!”

“감동할 거 없어. 겁이 나서 깨지 못한 것뿐이니까.”

6년이나 적금을 깨지 않고 넣었다는 사실에 감동했는지 은하의 눈에 눈물이 찰랑찰랑 고였다.

그러나 은하 생각처럼 잊지 못해서 깨지 않은 게 아니었다. 미련이 남아서도 아니었다.

방금 말한 것처럼 겁이 나서 깨지 못한 것이었다. 은하 생각이 계속 날까 봐 그래서 깨지 못한 것이었다.

”너 시계에 관해서 잘 알아?”

“아니. 전혀 몰라.”

“그런데 어떻게 시계 살 생각을 했어? 그것도 명품 시계를.”

“뜻깊은 선물을 주고 싶었어. 그래서 고민하다가 우리가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시계를 샀어. 마음에 들어서 정말 다행이야.”

“흑흑흑.”

“갑자기 왜 울어?”

“너무 기뻐서. 나는 네가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을 까맣게 잊은 건 아닌지 매일 걱정했어. 그런데 네가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말을 들으니까 너무 기뻐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 고마워. 정말 고마워 형필아!”

“내가 고마워해야지. 내게 행복이란 게 뭔지 알려준 최초의 시간이니까. 그런 시간을 선물해줘서 고마워 은하야! 죽을 때까지 영원히 잊지 않을 게.”

“나도 잊지 않을 거야.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매일 생각할 거야. 그리고 그 시간이 다시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릴 거야. 이 시계와 함께.”

“.......”

나는 우리가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시계를 선물한 것이지, 시간을 되돌리겠다고 선물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은하는 시계를 선물 받는 순간 내가 자신만큼 과거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그 시간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선물한 시계를 품에 꼭 안은 채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자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1초의 고통도 참지 못해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그런데 은하는 6년을 인내하며 나를 기다렸다.

상상할 수 없는 기나긴 고통을 참아온 은하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그건 사랑해준 사람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형필아, 나 당장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는 거 아니야. 네 옆에 하린이가 있는데 그걸 바라면 사람도 아니지. 오늘처럼 계속 이렇게 만나다가 내게 마음이 더 쏠린다면 그때 만나자는 거야. 이 말도 하린이가 듣는다면 크게 화내겠지만, 너에 대한 사랑을 지울 수가 없어. 내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줘. 부탁이야.”

“네 모습을 봐. 너무 아름다워 눈이 멀 지경이야. 너의 아름다운 모습과 재능에 반한 수많은 남자가 네가 바라만 봐주기를 기다리고 있어. 그들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성공한 사람들이야. 그리고 장래도 밝아. 미래도 불확실하고 과거도 거지 같은 나는 그만 잊어버려. 그리고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줄 사람을 만나. 그게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야.”

“너는 그럴 수 있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다른 여자가 돈과 명예를 준다고 따라갈 수 있어?”

“........”

“그것 봐. 아니잖아. 나도 그래.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싫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어.”

“하아...”

“그리고 왜 자신을 형편없는 사람으로 몰아? 넌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야. 공부도 운동도 항상 최고였고. 그리고 네 부모님과 너는 달라. 네가 지금 다현이네를 도와주고 보호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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