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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고털이
169. 금고털이
“오빠, 마림 재단까지 박살 내려면 이은택만 털어선 부족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그렇지.”
“그럼 이은수 측근이나 마림 재단 이사진을 털죠. 그래야 확실하게 보내죠.”
“마림 재단을 직접 건드리자?”
“이은택은 개인 문제라 여론은 나빠져도 재단은 큰 어려움이 없을 거예요. 그러나 재단 이사진이나 이은수 측근을 털어 재단 비리를 잡으면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어요.”
“하연이 생각에 나도 찬성이야. 쥬디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국민 여론이 마림 재단과 사학 비리를 끝장내야 한다고 성토할 때 확실하게 밟아야 해. 안 그러면 잡초처럼 살아날 거야.”
“가능할까?”
“가능한지 안 한 지는 해보면 알겠지.”
“으음... 알았어. 은하에게 마림 재단 실세들 명단 뽑아달라고 할 테니까, 하연이는 Hero 하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
“네.”
잠깐 주저한 건 경영진을 건드리면 마림 재단 전체를 적으로 만들 수도 있어서였다.
그러나 이은수와 이은택을 건드린 이상 마림 재단과는 이미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였다.
아직은 우리 정체가 발각되지 않아 안전했지만, 길어도 1년 안에 우리 정체가 발각될 것이다.
그러면 지금처럼 두 발 뻗고 잘 수 없었다. 놈들이 우리 정체를 모를 때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지근지근 밟아야 한다. 그래야 두 발 뻗고 편안하게 잠잘 수 있었다.
“오빠, 아까 사냥 끝나고 쥬디가 할 말 있다고 한 거 잊으셨어요?”
“아 맞다. 깜짝했네.”
“많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빨리 가보세요. 은하 언니에게는 제가 전화할게요.”
“그러면 나는 다현이네 좀 보고 들어갈게.”
“알았어.”
생각 깊은 쥬디가 할 말이 있다면 가벼운 얘기는 아닐 게 분명했다. 급히 게임에 접속해 레이첼에게 쥬디를 불러오게 했다.
“레이첼, 쥬디 좀 불러줘.”
“잠시만요. 금방 갔다 올게요.”
“잔심부름을 왜 네가 해? 시녀 한 명 두라고 했잖아.”
“싫어요. 영주님이 시킨 일은 제가 다 할 거예요.”
“너도 참 답답하다.”
“답답해도 할 수 없어요. 영주님이 시킨 일은 제가 다 하고 싶어요.”
“마음대로 해라.”
“네.”
가장 중요한 NPC를 꼽으라면 단연코 쥬디였다. 명석한 두뇌로 항상 옳은 조언을 해줬고, 혜안으로 이은택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게 해주는 등 엄청난 도움을 줬다.
리히테나 검술을 익혀 앞으로 엄청난 도움을 줄 아서와 아더보다 몇십 배는 더 중요한 존재로 The Age of Hero가 없어질 때까지 함께 해야 할 인재였다.
그러나 농노 한 명만 내 소유로 할 수 있다면 주저 없이 레이첼을 골랐다. 레이첼은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언제나 옆에서 살뜰하게 챙겨줘 곁에 없으면 불안하고 허전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게 가장 먼저 마음을 연 NPC가 레이첼이었고, 충성도 100을 가장 먼저 찍은 NPC도 레이첼이었다. 또한, 나를 깊이 사랑해 평생 옆에 있으려 했다.
무엇보다 내가 정이 깊이 들어 레이첼이 없는 The Age of Hero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능력이 뛰어난 인재를 곁에 두는 것도 중요했지만,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을 옆에 두는 것도 소홀해선 안 됐다.
“미안해. 급한 일이 있어서 깜빡했어.”
“아니에요. 제가 미안하죠. 큰오빠 바쁜데 시간 뺏었으니까요.”
“그렇지 않아.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언제든 말해. 쥬디가 하는 얘기는 밤을 새워서라도 들어줄게.”
“정말요?”
“그럼.”
“저 그런 얘기 평생 처음 들었어요. 고마워요. 큰오빠!”
밤새 얘기를 들어준다는 말에 크게 감동받은 쥬디가 품에 안겨 왔다. 쥬디는 작은 칭찬에도 감동했다.
평생 칭찬을 듣지 못해 그런 것으로 하연이가 웃기려고 한 농담에도 감동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어릴 적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나는 부모에게 못 받은 정을 유모에게 받았지만, 쥬디는 유모조차 없어 정에 많이 굶주려 있었다.
그런데도 구김살 없이 큰 걸 보면 자라난 환경도 중요하지만, 태어날 때 갖고 태어나는 인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이은택에 관해 말씀드린 것 중에 빼먹은 게 있어요.”
“뭔데?”
“청계천이라고 불리는 곳에 사설 금고를 갖고 있어요. 그곳에 달러라고 불리는 지폐와 황금, 국채 등 많은 돈을 은닉해 놓았어요.”
“이은택이 모은 거야?”
“아니요. 이은택의 엄마가 아버지란 사람에게 20년 넘게 야금야금 빼돌린 돈이에요. 1년 전에 이은택이 엄마에게 받아 사설 금고에 넣은 거예요. 비자금으로.”
“얼마나 되는데?”
“큰오빠 나랏돈으로 500억 원은 넘을 거예요.”
“500억? 많이도 빼돌렸네.”
수조 원에 달하는 마림 재단 재산에 비하면 이은택 엄마가 빼돌린 500억 원은 돈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마림 재단 재산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5조 원이 넘었다. 숨겨진 것까지 하면 최소 7~8조 원은 된다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많은 재산을 갖게 된 건 부동산 투기를 이용한 것으로 마림 재단은 그린벨트나 학교를 지을 수 없는 땅을 사들인 후 매수한 정치인을 이용해 학교와 상가를 지을 수 있는 땅으로 용도 변경했다. 이때 주변 땅까지 모두 사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대학과 명문 고등학교를 수십 개나 거느린 마림 재단이 학교를 지으면 학생들이 몰리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고, 헐값에 사들인 땅값은 100배 이상 치솟았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또다시 학교를 짓고, 각종 이권 사업에도 투자하는 등 마림 재단은 합법적인 범죄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였다.
“말씀드릴 게 너무 많아 모두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그 많은 걸 어떻게 다 기억해. 지금까지 얘기한 것만 해도 대단해. 나는 너처럼 기억 읽어도 머리가 나빠 내가 기억 못 해 10분의 1도 말하지 못했을 거야.”
쥬디가 알려준 건 이은택의 기억 중 전체의 1할도 안 됐다. 굵직굵직한 것만 말해준 것으로 그것만 해도 5시간을 넘게 들었다.
또한, 말한 내용도 최대한 간추려 핵심만 말한 것으로 있는 그대로 말했다면 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랐다.
그리고 사설 금고를 말하지 않은 것도 우선순위에 밀려서였다. 내가 살인, 강도, 강간, 폭력을 우선순위에 뒀기 때문에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게 금고에 있는 것 같아요.”
“중요한 거? 그게 뭔데?”
“이은택 엄마가 아버지 몰래 빼돌린 장부예요.”
“어떤 장부?”
“정치인과 검찰, 경찰, 언론에 돈 준 걸 기록한 장부에요.”
“그런 중요한 게 어떻게 이은택의 엄마에게 있어?”
“이은택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잠든 사이 엄마가 몰래 복사한 거예요. 이은택 아버지는 이은택 엄마에게 장부가 있다는 것도 몰라요.”
“만약을 위해서 빼돌린 거구나?”
“네.”
첩의 삶은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았다. 엄청난 부자를 만나 풍족한 삶을 살았지만, 어디를 가나 첩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그리고 앞에서는 머리를 90도로 숙이며 아양을 떨었지만, 돌아서면 걸레라고 욕하며 비웃었다.
사람들의 비웃음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돈을 보고 이만철을 만났으니까 비웃음 따윈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악착같이 돈을 빼돌렸고, 자신과 아들을 절대 버릴 수 없는 약점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20년을 노력했고, 1년 전에야 이만철과 이은수의 목줄을 움켜쥘 장부를 복사할 수 있었다.
장부에는 이만철이 준 돈만 기록된 게 아니었다. 이은수가 정치인과 검찰에 준 돈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은택이 아니면 금고에 접근할 수 없잖아?”
“이은택 이름으로 계약한 게 아니에요. 사설 금고는 철저한 비밀을 원칙으로 해 누가 금고를 대여했는지 아무도 몰라요.”
“그러면 어떻게 돈을 넣고 빼는 거야?”
“고객 번호 12자리와 영어와 숫자, 특수문자로 조합된 암호 24자리, 암구호 2개로 입출금을 해요.”
“그것만 알면 누구나 금고에 물건을 넣고 뺄 수 있다고?”
“네.”
이은택이 개설한 사설 금고는 일 년에 사용료가 무려 1억 원이었다. 대신 누가 금고를 개설하는지 물어보지도 않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또한, 보안 시설도 철통같아 건물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안에 든 내용물을 빼낼 수 없었다.
그리고 금고에 갈 때는 가면과 모자를 쓰거나 후드로 얼굴을 완전히 가려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었다.
“출입이 너무 간단한 거 아니야?”
“반대로 아주 엄격해요. 입구에서 고객 번호를 입력하면 첫 번째 암구호를 요구해요. 터치패드에 입력하면 강철로 된 엄청나게 두꺼운 문이 열려요. 안에 들어가면 두꺼운 쇠창살이 또 있어요. 거기서 두 번째 암구호를 터치 패드에 입력해야 해요. 그렇게 문 두 개를 열고 들어가면 경비가 또 한 번 강철로 된 문을 열어줘요. 그 안에 조그마한 철문이 좌우로 쭉 늘어선 방들이 있어요. 고객 번호가 적힌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개인 금고가 나와요. 마지막으로 암호 18자리를 입력하면 금고문이 열려요.”
은행 금고문보다 더 두꺼운 철문 외에도 가스총과 전기충격기 등으로 무장한 경비원이 20명이나 있었다.
번호와 암호가 세 번 이상 틀리고, 이상한 행동을 하면 바로 공격하는 등 철옹성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그거 말고 또 다른 건 없어?”
“차명 계좌와 차명 부동산, 페이퍼컴퍼니도 있어요.”
“거긴 또 얼마나 되는데?”
“다 합하면 200억 원쯤 돼요.”
“많이도 꼬불쳤네. 사설 금고 암호와 함께 모두 써줘.”
“네.”
고객 번호 : 8452-3251-1178
암호 : [email protected]Ħð79-6H3&-05FL-ЖЁ44
첫 번째 암구호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성공하라!
두 번째 암구호 : 돈이 그대를 천국에 들게 할 것이다.
암구호 두 가지 모두 이은택의 인간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문구로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마모니즘(Mammonism)이었다.
황금만능주의, 물질만능주의를 뜻하는 마모니즘은 돈을 인생의 최고 가치로 두고 모든 행위를 돈에 연관 지어 생각했다.
그러나 황금만능주의는 이은택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였다.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에게 장래에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깜짝 놀랄 만한 대답을 듣게 된다.
전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아이가 꿈이 아닌 부자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대통령, 의사, 경찰, 소방관, 과학자 등을 꼽았다. 그러나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어른들 덕분에 아이들은 꿈을 잃어버린 채 부자가 되고 싶어 했다.
이런 생각은 나도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었다. 나를 버린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그래서 부자가 되고 싶었다. 부자만 되면 복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황당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이은택을 마모니즘에 빠진 놈이라고 욕할 자격이 있겠는가? 당연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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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