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의 시대-168화 (168/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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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 털기

168. 원혼이 넘겨준 증거

남자가 아내와 딸아이라도 살리려고 재빨리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그러자 이은택은 잔인하게 웃으며 더욱 강하게 차를 밀어붙였다.

대형 외제차에 밀린 소형 국산차는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한 채 굉음을 내며 가드레일을 부수고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더 황당한 건 이런 일이 생기면 동승자는 운전자를 말렸다. 하지만 정이슬은 신이 나서 더 밀어붙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정이슬은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일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프로페셔널로 일가족의 비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반대로 괴로워하는 가족의 모습에 희열을 느끼며 즐거워했다.

이은택과 정이슬은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일가족을 밀어붙여 낭떠러지에 떨어뜨리는 내내 괴성을 질러대며 좋아했다.

그렇게 30대 초반의 부부와 5살 된 여자아이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이은택과 정이슬이란 괴물을 만나 산 아래로 추락해 모두 죽었다.

1시간 후 지나가는 차가 가드레일이 부서진 걸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서져 추돌사고가 났다는 것도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남편의 운전 부주의로 일가족이 죽었다는 기사가 아주 작게 났다. 죽은 것도 억울한데 누명을 뒤집어쓴 채 사고로 처리된 것이었다.

“이게 뭐야? 살인 사건이잖아. 누가 준 거야?”

“깊게 말씀드릴 수 없는 점 양해해주십시오.”

“믿어도 되는 거지?”

“네.”

“하아... 이게 사실이면 이놈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야. 악마!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어.”

“상사님,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 서류 누가 줬는지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유저의 기억을 송두리째 읽을 수 있는 NPC가 있다는 것을 절대 알려선 안 됐다. 사실이 알려지면 쥬디의 목숨은 물론 우리도 안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범석 상사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않고 말할 수 없다고 양해를 구했다.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있어 이상한 상상을 하진 않을 것이었고,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쥬디가 기억을 읽었다는 것만 모르면 됐다. 최악에는 제3자에게 받았다고 우기면 된다.

그것도 안 되면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된다. 오리발은 이럴 때 사용하라고 있는 것이었다.

“시체가 아직도 별장에 있다면 놈을 잡는 거 어렵지 않을 거야. 그런데 놈이 자신이 죽인 게 아니라고 우기면 어쩌지?”

“시체를 옮긴 넘들과 납치를 도운 놈들입니다. 모두 7명으로 이것이 놈들 신상명세서입니다. 어디 있는지 소재를 파악해 주십시오.”

“놈들까지 잡아들이면 놈도 발뺌하기 어렵겠군. 그런데 일가족을 교통사고로 위장해 죽인 건 입증하기 어려울 거야. 증거가 없으니까.”

“블랙박스 영상이 담긴 메모리 카드가 사고 지점에서 5km 떨어진 산에 있습니다. 위치는 으음... 여기입니다.”

“그게 왜 여기 있어?”

“이은택이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버렸습니다. 꼭 찾아야 합니다. 그 안에 정이슬이 사고를 부추기는 음성과 장면도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게 있어야만 정이슬도 끝장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찾아야지. 꼭 찾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상사님만 믿겠습니다.”

사고 영상이 담긴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는 포맷해도 복원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래서 사고 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산에 버린 것이었다.

메모리 카드를 불태우면 완벽하게 증거를 인멸할 수 있었지만, 술에 취한 이은택은 산에 버리면 절대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놈과 정이슬을 잡을 기회를 얻었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이범석 상사가 김상호 상사와 정동일 상사, 새로 들어온 김영우 중사, 손필영 중상, 김동양 중사, 이연숙 중사, 박미향 중사를 데리고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를 찾으러 갔다.

다섯 명 모두 이범석 상사와 같은 부대에서 5년 이상 한솥밥을 먹은 부하들로 여자도 두 명이나 있었다.

따르릉따르릉

“찾았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 하나도 안 했다. 믿기지 않을 만큼 쉽게 찾았어.”

“네?”

“하늘이 도왔다고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아니지. 원혼이 도운 거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빵 봉투에 담겨있었어. 밀봉한 것처럼.”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가 비와 습기에 심하게 부식됐다면 복원할 수 없을 수도 있어 밤새 한잠도 못 잤다.

그런데 이범석 상사의 말처럼 억울하게 죽은 일가족의 원혼이 도왔는지 이은택이 던진 메모리 카드는 흠집 하나 없는 깨끗한 상태로 발견됐다.

놈이 산 아래로 던진 메모리 카드는 빈 빵 봉투 속으로 정확히 빨려 들어갔다. 3점 슛보다 백만 배 어려운 일을 이은택이 해낸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메모리 카드를 집어삼킨 빵 봉투가 있는 장소로 비와 습기를 절묘하게 피할 수 있는 바위틈 아래였다.

이은택의 멋진 슛과 빵 봉투의 노력 덕분에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로 이범석 상사의 손에 들어왔다.

“영상 상태는 어떻습니까?”

“화질도 좋고, 음성도 아주 깨끗해. 두 달 가까이 밖에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선명해. 비싼 차 몰고 다니는 놈이라 그런지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도 끝내주네. 고화질 TV보다 백배는 더 선명해.”

“얼굴도 나왔습니까?”

“나왔어. 그것도 둘 다 나왔어. 하하하하.”

“다행이다. 정말 다행입니다.”

“원한이 하늘에 닿아 그런 거야. 죽은 일가족이 이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무겁네요.”

“그 새끼 잡아넣은 후에 일가족 죽은 장소에 술이라도 한 병 뿌려야겠어. 얼마나 원통했으면 이런 일을 다 하겠어. 안 그래?”

“술은 제가 구해놓겠습니다.”

“그러면 안주는 내가 준비하지.”

“조심해 돌아오십시오.”

“알았어.”

놈을 옭아맬 그물이 완벽하게 준비되자 여고생과 20대 남성을 이은택이 죽였다는 내용을 대형 신문과 방송국, 경찰서에 익명으로 투서했다.

죽은 사람의 이름, 사고 장소, 시간, 입었던 옷, 죽인 방법, 묻힌 장소, 시체 유기에 동참한 사람들의 이름과 사진까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프레젠테이션을 하듯이 자료를 만들어서 보냈다.

그리고 곧바로 이은수와 이은택, 정이슬이 마약 한 증거를 경찰에 넘겼다. 경찰이 사건을 축소하지 못하게 어디서 마약을 했고, 누구에게 샀고, 누구와 함께했는지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해서 넘겨줬다.

그러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국내 최대 사학 재단의 차기 재단이사장과 동생 그리고 여자 친구가 연루된 사건은 기레기들이 애타게 찾아 헤매던 특종 중의 특종이었다.

하루 만에 관련 기사가 수천 개가 인터넷에 올라왔고, 방송국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등 하루 종일 이은수와 이은택, 정이슬 기사로 대한민국을 도배했다.

문자왔숑 문자왔숑

“그만하고 나가봐야겠다.”

“무슨 일인데 그래?”

“이은택 긴급 체포한대.”

“정말?”

“경찰이 이은택 잡으러 집으로 출발했어.”

인스턴트 던전을 끝내고 집무실로 돌아와 수다를 떨고 있자 이범석 상사가 문자를 보내왔다.

이은택이 긴급 체포될 예정이라는 문자로 예상보다 많이 늦었지만, 재벌에 부럽지 않은 사학 재단이란 걸 생각하면 빠른 조치라고 할 수 있었다.

세상이 발칵 뒤집힌 지 삼 일째 되던 날 경찰이 이은택을 긴급체포했다. 증거가 너무 뚜렷해 처음에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신원과 날짜, 장소가 정확히 일치하자 장난이 아니란 걸 확신했다.

부랴부랴 전담팀을 꾸려 은하가 보낸 자료에 나오는 범행가담자들을 체포해 조사하자 내용이 완벽히 일치한다는 걸 알았다.

거기다 냄새를 맡은 기레기들이 마림 재단이 무서워 경찰이 봐주기 수사를 한다고 몰아붙였다.

가만히 있다가는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경찰청장이 지시를 내렸고, 사건이 공개된 지 3일 만에 이은택의 손에 은색 팔찌가 채워졌다.

이은택 체포와 함께 별장을 압수 수색해 시체가 있는지 확인했다. 자료에 나온 대로 땅을 파자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남자와 여자 시체가 한 구씩 나왔다.

시체까지 나오자 더 의심할 것도 없어 은하가 준 자료에 나오는 관련자는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잡아들여 조사했고, 주변 인물도 줄줄이 소환하는 등 수사에 탄력이 붙었다.

“자동차사고는 언제 터뜨릴 거야?”

“당분간 갖고 있어. 검찰 하는 짓 보고 할 거니까.”

“알았어. 그런데 정이슬이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래?”

“이범석 상사님이 24시간 감시하고 있어. 달아날 기미가 보이면 바로 연락할게.”

마약 건으로 잡혀 들어간 이은수와 이은택은 도주 위험이 없다는 이유로 밤샘 조사 후 집으로 돌려보냈다.

구치소에 있을 줄 알았는데 하루도 안 돼 감금에서 풀려나자 허탈하다 못해 화가 났다.

“오빠, 경찰청에 용역비 신청할까요?”

“용역비라니?”

“독수리 경호팀이 범죄자를 지키고 있잖아. 경찰을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으니까 돈 달라고 해야지요.”

“좋은 생각이다. 청구해.”

“진짜요?”

“어.”

“우이씌. 화가 나서 한 말을 진짜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내 마음도 너 하고 같아서 그런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덕분에 죄 없는 독수리 경호팀 식구들이 정이슬을 감시해야 했다. 목마른 놈이 우물을 찾는다지만, 경찰이 해야 할 일까지 우리가 하자 짜증이 솟구쳤다.

별장에서 확실한 증거인 시체 두 구가 나왔지만, 이은택은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뗐다.

마림 재단도 시체에서 이은택의 DNA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누군가 마림 재단을 흠집 내기 위해 음모를 꾸민 거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면서 은밀히 유괴와 시체 처리에 관여한 사람들을 돈으로 회유했다. 입을 막는 동시에 이은택이 저지른 범행을 뒤집어 써줄 인물을 찾는 것이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마림 재단에 돈을 받아먹은 정치인과 부패한 일부 검찰, 경찰이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범석 상사가 경찰과 검찰에 있는 후배들을 통해 알아낸 것으로 이런 식으로 가다간 다른 놈이 살인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차 사고가 담긴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를 공개하지 않은 것이었다.

메모리 카드에는 이은택이 가족이 탄 차를 밀어붙어 산 밑으로 떨어뜨리는 장면만 있는 게 아니었다.

둘의 목소리는 물론 산 아래로 차가 제대로 떨어졌는지 나와서 구경하는 모습과 웃고 떠드는 장면까지 아주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할 명확한 증거로 이은택과 마림 재단이 국민을 마음껏 희롱한 다음 승리를 자신할 때 터뜨릴 계획이었다.

이은택만 손보면 놈이 재기를 노릴 수도 있어 이 기회에 마림 재단까지 치명적인 상처를 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마지막 남은 희망의 불씨가 사라져 놈이 삶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이은택처럼 평생 호의호식한 놈은 비좁은 감방에 들어가면 견디질 못한다. 더군다나 든든한 버팀목인 마림 재단마저 무너지면 같은 방에 있는 죄수들이 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똑같이 나쁜 짓을 했지만, 방에 있는 사람 대다수는 가난이 원인이 돼 죄를 저지른 것으로 재벌에 대한 반감이 아주 컸다.

그러면 내가 가장 원했던 시나리오대로 이은택은 이 세상과 영원히 빠이빠이 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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