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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의 죽음
145.
“하윽. 하응. 너무 좋아. 오빠, 너무 좋아 죽을 것 같아. 은수... 띠이. 띠이. 띠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붙잡고 있는 하린이의 손에서 전화기를 빼앗아 종료 버튼을 누르는 순간 은수라는 이름이 들렸다.
이은택의 형 이은수가 분명했다. 은수라는 이름을 쓰는 남자만 적어도 100명은 될 것이다.
동명이인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정이슬이 돈 많고 권력을 가진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과 하연이가 자료를 보낸 시점을 생각하면 확률이 99.9%였다.
「하연아.」
「네?」
「아까 목소리 이은수 같았어.」
「정말요?」
「끊는 순간 정이슬이 은수라는 이름을 불렀어. 맞을 거야.」
「이름을 불렀다면 확실하겠네요.」
「둘이 사귀는 거 이은택에게 알려줘.」
「알았어요.」
“뭐 저런 거지 같은 년이 다 있어? 살다 살다 저런 개 같은 년은 정말 처음 본다. 저년은 사람도 아니야.”
“이은택과 SUN 엔터테인먼트 사장보다 더 지저분한 년이네. 꿈에 나타날까 두렵다.”
“얼굴만 예뻤지 하는 짓은 창녀보다 더하네. 내가 그동안 저런 년을 부러워했다니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네. 아이씨.”
흥분한 다현과 민지, 수영, 연아가 육두문자를 쏟아냈다. 평소 예쁜 말만 골라 하던 아이들이 그런 말을 하자 살짝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정이슬의 지저분하다 못해 더러운 얘기를 듣고 욕이 안 나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화가 난 건 히어로걸스만이 아니었다. 하연이도 얼굴과 눈이 새빨개질 만큼 화가 많이 났다.
나 역시 속에서 불덩이가 치밀어 올라 전화기를 뺏어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골백번도 더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와 하연이가 화를 내면 하린이가 더 힘들어진다. 지근지근 밟아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났지만, 지금은 참고 하린이를 달래줘야 할 때였다. 그래야 하린이 마음이 덜 다쳤다.
그래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손톱이 부서지도록 주먹을 꽉 쥐며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전화하면 이런 일 생길 줄 알면서도 전화하겠다는 거 말리지 않았어. 미안해!”
“내가 사람을 잘못 사귀어서 그런 거지 오빠 잘못 아니야. 다 내 잘못이야.”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사귀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네 잘못 아니야. 자책하지 마.”
사람을 사귀기 전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족과 주변 사람부터 파악하라는 말이 있다.
아주 현명한 생각이지만, 하린이가 정이슬을 만난 건 중학교 때였다. 그럴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성우네 집 아는 사람이 없으니 어쩌지?”
“흐음... 알아봐 줄 사람이 한 명 있어.”
“누군데?”
“은하.”
“아 맞다. 은하 언니 학교에 아는 사람 있다고 했지. 어서 전화해봐.”
“어.”
은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하린이도 모욕을 참고 정이슬에게 전화했는데, 부탁하는 게 싫다고 모른척할 수는 없었다.
♩♪♩♪♬~ ♩♪♬♩♪~
“잘 지냈어?”
“응. 너는?”
“나도. ...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어.”
“말해.”
“학과 사무실에 아는 사람 있다고 했지?”
“응”
“나랑 같은 학년인 김성우라고 있어. 그 친구 어디 사는 좀 알아봐 줘.”
“알았어. 바로 전화 줄게.”
“고마워.”
“형필아. 고맙다는 말 하지 마. 거리감 느껴져서 싫어.”
“... 알았어.”
뚝
“오빠, 나 정말 못 났어.”
“무슨 소리야?”
“나는 친구 같지도 않은 친구 때문에 상처받는데, 오빠는 헤어진 지 6년이 넘은 여자 친구가 아직도 헌신적으로 믿고 있잖아.”
“그런 거 아니야. 큰 부탁이 아니라서 쉽게 응낙한 거야.”
“은하 언니, 왜 알아봐줘야 하는지 묻지도 않았어. 일의 경중 따위는 상관없다는 뜻이야. 오빠 일이라면, 오빠가 원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이야.”
“그렇지 않아. 오버하지 마.”
“내가 너무 앞서나가는 걸까?”
“어.”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아...”
하린이와 하연이가 들으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어 조용히 통화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린이는 정이슬과 통화할 때 창피함을 무릎 쓰고 스피커폰을 켜고 통화했다.
그런데 나만 은하와 둘이서 쏙닥쏙닥 통화할 순 없었다. 그건 하린이를 비참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스피커폰을 켜고 통화했다. 그렇게 배려해서 한 행동이 하린이를 더 힘들게 했다.
♩♪♩♪♬~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X산로 XX번길 XX 아파트 XXX동 10층 1004호.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어. 여동생도 한 명 있고. 집 전화는 인터넷 전화로 070-XXX-XXXX야.”
“조만간 밥 한 번 살게.”
“정말이지?”
“어.”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전화를 끊고 은하가 알려준 집 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신호만 갈 뿐 성우의 꺼진 핸드폰처럼 전화 받는 사람이 없었다.
“가봐야겠다.”
“전화 몇 번 더 해보고 안 받으면 그때 가. 그때 가도 늦지 않아.”
하린이가 늦지 않다고 한 말은 시간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사고가 났다면 가봐야 이미 늦었다는 뜻이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믿고 싶지 않은 얘기였지만, 하린이 말이 맞았다. 문자가 온지 이미 1시간이나 됐고, 수원까지 가려면 날아가도 최소 1시간은 걸렸다. 사고가 났다면 지금 출발해도 늦은지 오래였다.
뚜우~ 뚜우~ 뚜우~
“여보세요?”
“거기 혹시 김성우 학생 집 아닙니까?”
“맞아요. 누구세요.”
“성우하고 같은 학교 다니는 형입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했는데, 핸드폰 배터리가 떨어졌는지 전화를 받지 않아 집으로 전화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성우 집에 있으면 바꿔주십시오.”
“이 시간에 오빠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30분 동안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아 성우네 집이 있는 수원으로 출발하려는 순간 앳된 소녀 목소리가 들렸다.
은하가 말한 고등학교 1학년인 여동생이었다. 문자를 받았는데 성우가 자살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전화했다고 하면 미친놈 소리를 들을 수도 있어 성우에게 물어볼게 있다고 핑계를 대고 바꿔달라고 했다.
“꺄아아아악.”
“여보세요. 여보세요.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에요.”
“오빠! 오빠! 오빠! 으아아아앙~”
“여보세요. 여보세요...”
택시를 타고 급히 성우네 집을 찾아갔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119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고 난 다음으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 병원으로 갔는지 아파트 주민들에게 물어봤지만, 구급차와 경찰차가 왔다 간 것을 아는 사람도 몇 명 없었다.
사람이 없는 낮 시간인데다 옆집에 강도가 들어도 모르는 체하는 세상이라 요란하게 사이렌이 울린 것도 알지 못했다.
성우가 실려 간 병원이 어딘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근처 병원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자살을 시도한 환자가 들어왔는지 물어봤다.
그러나 도떼기시장이나 다름없는 응급실은 누가 들어왔는지 바로바로 알 수 없어 직접 와서 찾으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짐을 챙기러 동생이나 아버지가 올 거란 생각에 집 앞에서 5시간 넘게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었다.
도저히 안 되겠단 생각에 근처 큰 병원 응급실을 다 뒤졌지만, 서울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다시 은하에게 전화를 걸어 성우 가족 전화번호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러나 학적부에도 가족 전화번호는 없었다.
다현이가 학과 아이들 전화번호를 몇 개 알아... 첫 단합대회 때 남자 놈들이 억지로 입력해준 번호... 하린이가 일일이 전화해 성우 소식 들은 게 있는지 물어봤다. 그러나 며칠째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만 알뿐 지금 상황은 아는 아이가 없었다.
일주일 후 성우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자식의 죽음에 넋을 잃은 부모님은 성우 고등학교 친구들에게도 죽음을 알리지 못해 장례가 끝나고 일주일 후에야 성우가 죽었다는 소식이 학교에 전해졌다.
나와 정이슬 그리고 친한 친구 몇 명에게 문자를 보낸 성우는 욕실에서 손목을 그어 생을 마감했다.
왜 죽었는지, 누구 때문에 죽는지, 무엇이 그토록 힘들었는지 아무것도 밝히지 않은 채 성우는 영영 우리 곁을 떠났다.
더욱 슬픈 일은 부모보다 먼저 죽었다는 이유로, 자살한 불효자식이란 이유로 성우 장례식은 하루 만에 단출하게 끝났다
죄인이란 이유로 삼일장도 치르지 못한 성우는 한 줌의 재가 되어 할아버지 산소 주변에 뿌려지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성우 자살했어.”
“그런데?”
“너 때문에 죽었어.”
“무슨 헛소리야?”
“몰라서 묻는 거야?”
“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네.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해. 개처럼 멍멍 짖지 말고.”
“네가 나 괴롭히려고 성우 꼬셔서 죽은 거잖아. 정말 몰라?”
“웃기고 있네. 남자 새끼가 마음이 약해서 자살한 걸 왜 나에게 덮어씌워? 그리고 원인은 내가 아니라 네가 제공한 거야. 네가 성우와 친하지 않았다면 그 새끼 뭘 볼 게 있다고 내가 만나줬겠어. 안 그래?”
“너 때문에 사람이 죽었어. 그런데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밖에 없어?”
“사실을 얘기한 건데 왜 화를 내고 그래? 내 말이 틀렸어?”
“모르는 사람이 죽어도 슬퍼하는 게 최소한의 도리야. 그런데 너는 자기 때문에 친구가 죽었는데 사과는커녕 놀리고 있어. 이게 사람이 할 짓이야? 너는 사람도 아니야.”
“나 사람 아닌 거 이제 알았어? 네가 나를 버린 순간 나는 사람이길 포기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사람이길 바라는 거야?”
“나는 너 버린 적 없어. 네 자격지심과 질투가 우리 사이를 이렇게 만든 거야. 궤변 늘어놓지 마.”
“네가 나보다 잘난 게 뭐가 있다고 질투해? 머리도 내가 너보다 똑똑하고, 미모도 앞서고, 몸매도 좋고, 남자도 백만 배 더 잘 꼬셔. 대체 뭘 질투한다는 거야?”
“너에게 없는 게 나에게 있으니까.”
“그게 뭔데?”
“친구! 마음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친구!!”
“.......”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