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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의 죽음
144. 성우의 죽음
“리히테나의 일기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오한 내용이 숨어 있어. 그걸 깨달을 수만 있다면 스탯 몇 개, 공격력 몇백 오르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어.”
“저도 그건 알아요. 하지만 그걸 알아볼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얼마 없겠지. 그리고 많은 사람이 알아보길 원하지도 않아.”
“그러면 팔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환인이 일기장을 준 건 유저들에게 보여주라는 의미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세요?”
“어.”
“오빠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파는 게 맞겠죠.”
“1개씩 올려. 팔리면 또 올리고.”
“알았어요.”
3억5,000만 명 중 로만 리히테나의 일기장 가치를 아는 사람은 0.001%도 안 될 것이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적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건 환인이 일기장의 심득을 얻지 못하게 농간을 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나와 함께 100번 정독한 하린이와 하연이는 일기장에서 지식은 습득했지만, 심득은 얻지 못했다.
하린이와 하연이의 자질이 나보다 못하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매는 운동신경, 센스, 명석한 두뇌까지 나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욱 이런 생각을 하게 한 건 내가 일기장을 읽고 느낀 점을 말해주고 단락까지 짚어줬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건 누군가 장난을 치지 않고선 있을 수 없는 일로 환인이 자신이 선택한 사람에게만 이해할 수 있게 조치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심득을 얻은 후 상대의 공격 흐름을 끊고, 허를 찌르는 능력이 탁월해졌지만, 공격력이 강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심득을 완벽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해 그런 것일 수도 있었고, 환인이 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아직 만개해서는 안 될 상황이라 제동을 걸어 놓은 것일 수도 있는 등 심득을 얻었지만 실질적인 소득은 없었다.
“레이첼.”
“네, 영주님?”
“조나단과 아서, 아더, 아라치, 쥬디를 불러줘.”
“네.”
“오빠, 일기장 한 권씩 나눠주려고 부르신 거예요?”
“어.”
“NPC들 수지맞았네요.”
“수지는 내가 맞은 거지.”
수지는 NPC들이 맞은 게 아니라 내가 맞은 것이었다. 리히테나의 일기장으로 조나단과 아서, 아더, 아라치, 쥬디의 실력이 급상승하면 그 이익은 고스란히 내게 돌아온다.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건 작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칭찬이 전부였다. 노동력 착취이자 임금 착취로 열정 페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우우우우웅
[형! 잘 지내시죠? 얼굴 못 뵌 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됐는데, 몇 년은 된 것 같네요. 형도 없고, 하린이도 없고, 히어로걸스도 없고... 강의실이 텅텅 비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마음이 텅텅 빈 것 같아요.]
[20일 전부터는 이슬이도 학교를 잘 나오지 않아 강의실은 적막하다 못해 삭막하기만 합니다. 저도 형 따라서 1년 쉬어야 할 것 같네요. 학교 다니는 게 너무 힘듭니다. 같이 얘기할 사람이라도 있으면 조금은 덜 할 것 같은데...]
[형! 하린이와 평생 행복하게 사세요. 하린이와 정말 잘 어울립니다. 질투 날만큼... 형필이 형! 친동생처럼 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언젠가 다시 볼 날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누군데 그래?“
“성우.”
“무슨 일 있어?”
“아무도 없어서 학교가 삭막하데.”
“이슬이도?”
“20일 전부터 잘 안 나온대.”
“그러면 하연이가 보낸 자료가 먹혔나 보네.”
“그런 것 같아.”
수업을 자주 빼먹는다고 정이슬이 이은수와 사귄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른 놈과 붙어먹느라 수업을 빼먹을 수도 있었고, 워낙 머리가 좋아 수업이 재미없어 딴짓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능성은 매우 컸다. 20일 전이면 하연이가 이은택과 이은수, 정이슬을 이간질하기 위해 첫 번째 자료를 보낸 시점과 맞아 떨어졌다.
그때부터 이은수와 정이슬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면 수업을 자주 빼먹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런데 문자가 좀 이상해.”
“왜?”
“학교 다니는 게 너무 힘들다고 자기도 한 학기 쉰다고 하고선 그동안 고마웠다고 몸 건강히 지내라고 썼어.”
“이슬이 때문에 많이 힘든가 보네. 그래서 그럴 거야.”
“그 정도 느낌이 아니야. 아주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
“불길한 느낌? 혹시... 그거?”
“어.”
“문자 보여죠.”
“오빠, 저도 봐도 되죠?”
고개를 끄덕이며 하린이와 하연이에게 성우가 보낸 문자를 보여줬다. 성우가 처한 상황을 모르는 하연이는 이상한 낌새를 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성우가 어떤 상황인지 잘 아는 하린이는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자살이었다.
“오빠, 빨리 전화해봐.”
“알았어.”
급히 캡슐을 빠져나와 성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원이 꺼져있어 통화할 수 없었다.
전화가 꺼져있자 불안한 마음이 더욱 커져 곤히 잠든 다현이와 민지, 수영이, 연아까지 깨워 성우네 집이 어디인지 아느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나와 하린이처럼 다현이네도 성우가 어디 사는지 몰랐다. 학교에서 하린이를 빼고 가장 친한 사람이 성우였다.
그런데 어디 사는지, 심지어 집이 어느 쪽인지도 몰랐다. 너무 무관심했다는 생각에 자책감이 몰려왔다.
“어떻게 하지?”
“오빠, 학교에 전화해서 알아보는 건 어때요?”
“본인 아니면 알려주지 않을 거야.”
“문자가 이상하다고 하면 되잖아요.”
“이 정도 문자로는 어림도 없어. 어떤 식으로 자살하겠다고 구체적으로 써도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안 알려줄 거야.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개인정보를 알려주면 처벌받을 수도 있으니까.”
“이슬이에게 물어볼까?”
“모를 것 같은데.”
“아는지 모르는지 전화해보면 알겠지.”
“좋은 소리 안 할 텐데, 괜찮겠어?”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 정도는 참아야지.”
전화기를 꺼낸 하린이가 재빨리 이름을 검색해 정이슬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쳐다봤다.
막상 누르려니 선뜻 손이 가지 않아 그런 것으로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어주자 그제야 마음을 안정시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
“이게 누구야? 내 베스트 프렌드 하린이잖아. 몇 년 만에 전화한 거지? 3년? 4년?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네.”
“뭣 좀 물어볼 게 있어 전화했어.”
“네가 나에게 물어볼 게 있어? 남자에 대한 거야? 섹스? 아니면 나랑 즐기고 싶어진 건가? 그것도 아니면 임신? 누구 애야? 형필씨 애야? 병원에 혼자 가기 창피해서 전화한 거야? 같이 가 줄까?”
“성우 집이 어딘지 알아?”
“애 아빠가 성우였어?”
“헛소리 그만하고 알면 빨리 말해. 급해.”
“성우가 책임지지 못하겠다고 했어? 남자 새끼가 쩨쩨하네. 여자가 싫어져도 그렇지 아기 뗄 돈은 주고 헤어줘야지. 안 그래?”
“성우가 형필 오빠에게 이상한 문자를 보냈어.”
“무슨 문자? 죽겠다는 문자라도 보냈어? 그런 거 나는 100통도 넘게 받았어. 나 없으면 못 살겠다. 제발 한 번만 만나 달라. 시키는 건 뭐든지 할 테니 얼굴 한 번만 보여 달라. 옆에만 있게 해주면 개·돼지라고 불러도 좋다. 죽을 만큼 사랑한다. 등등 매일 수십 통씩 보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 새끼 마음이 졸라 여리거든. 킥킥킥킥.”
“그래 너 잘났으니까 성우 집 주소나 알려줘.”
“싫은데 어쩌지?”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 장난할 때가 아니야.”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는 줄 알아? 사람 목숨 생각보다 질겨. 내가 잘 알아. 많이 해봤거든.”
“많이 해봤으면 성우가 어떤 심정인지 알 거 아니야?”
“알지. 오줌을 질질 쌀 만큼 짜릿하다는 거 잘 알고 있지. 손목을 그을 때의 느낌, 몸이 공중에 떠 숨이 끊어지려 할 때의 느낌 정말 끝내주거든. 히로뽕 하는 것보다 백배는 좋아. 너도 해보고 싶지 않아? 내가 도와줄게.”
심한 왕따로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한 정이슬은 그때 일을 쾌감이라고 말했다. 은유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일부 상습적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 중에는 그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마약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것으로 보아 상습적으로 마약을 투약할 가능성도 매우 컸다.
그러나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성우를 구해야 했다. 상습적으로 마약을 투약하는지는 다음에 알아봐도 늦지 않았다.
“그만 좀 해.”
“재미없어?”
“급하다고 했잖아. 장난칠 때 아니라고 했잖아.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 했잖아. 진지하게 굴어.”
“내 목숨도 아닌데 내가 왜 진지하게 굴어야 해? 그리고 성우랑 나랑 애인 사이라도 돼? 결혼할 사이야? 죽고 못 사는 사이야? 아니잖아. 아무런 사이도 아니잖아. 그런데 내가 왜 그 새끼에게 관심을 둬야 해?”
“그러지 말고 알면 말해줘. 부탁이야.”
“너 정말 성우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였구나. 부탁을 다 하고. 그런 줄 알았으면 한 번 주는 건데 그랬네. 너랑 구멍 동서하는 게 내 소원이었는데, 정말 아깝다. 지금이라도 들어줄까?”
“헛소리 그만하고 주소나 불러.”
“형필 오빠. 듣고 계시죠? 오빠가 원한다면 저는 언제나 콜이에요. 오빠와 환상적인 밤을 보내고 싶어요. 하린이와 쓰리섬이면 더욱 좋고요. 셋이서 쾌락의 끝이 어딘지 찾아봐요. 호호호호.”
“미친년!”
“나 미친년인 거 이제 알았어? 하하하하하~”
예상했던 대로 정이슬은 하린이는 놀려대며 성우네 집이 어디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하린이가 정이슬에게 전화한다고 했을 때 이런 일이 생길 걸 예상했었다. 그런데도 성우가 걱정돼 말리지 않았다.
지금은 모욕당하는 걸 두려워할 때가 아니었다. 사람 생명이 걸린 일이었다. 성우를 살릴 수 있다면 모욕쯤은 백 번, 천 번도 참아야 했다.
“알아 몰라?”
“그딴 놈 집 주소를 내가 어떻게 알아.”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잖아.”
“내가 왜? 너 놀리는 재미가 쏠쏠한데.”
“누군데 그래? 친구야?”
“아니. 장난감. 호호호호.”
“그런 쓰레기와 놀지 말고 빨리 이리와. 하던 거 마저 해야지.”
“아이 색마. 오늘만 벌써 세 번이나 했어.”
“네가 날 미치게 하는데 세 번이 대수야? 백 번도 할 수 있어.”
“꺄아아아악.”
추웁 추웁
“하악... 하악... 하악...”
전화기 너머로 낯선 목소리의 남자가 하던 짓을 다시 하자며 정이슬을 불렀다. 그리고 하린이와 나에게 들으라는 듯이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정이슬은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는지 고의적으로 음탕한 신음을 전화기에 대고 질러댔다.
더럽고 파렴치한 행동을 더는 볼 수 없었다. 하린이의 손에서 전화기를 빼앗아 전화를 끊었다.
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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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