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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자 확인
141. 친자 확인
“둘이서 한 방씩 쓰면 돼.”
“고마워. 하린아.”
“모두 오빠가 한 거야. 내가 한 거 아니야.”
“오빠, 고마워요.”
“오빠, 정말 고맙습니다.”
다현이와 민지, 수영, 연아는 이범석 상사와 김상호 상사의 각별한 보호 속에 새벽 4시 아무도 모르게 우리 집에 도착했다.
다현이와 민지, 수영이, 연아의 히어로걸스 이탈 소식은 다현이네가 숙소를 빠져나와 SUN 엔터테인먼트 사장을 만난 다음 날 신문과 방송, 인터넷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며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100명이 넘는 기자가 SUN 엔터테인먼트에 쳐들어가 사실을 확인하려 아우성을 쳐댔고, 일부 기자는 히어로걸스가 머물던 숙소에 몰려가 사실을 확인하려 했다.
핑크 루비에 묻혀 인기가 크기 떨어졌지만, 아직은 히어로걸스가 SUN 엔터테인먼트의 간판 여자 아이돌 그룹이었고, 좋아하는 팬들도 많이 남아있어 이슈를 노리는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기자 출입을 철저하게 막았다. 이러자 마약을 해 경찰서에 갇혀 있다는 소문을 시작으로 집단으로 성접대를 하다 걸렸다는 소문, 자살했다는 소문까지 온갖 악성 소문이 인터넷을 가득 채웠다.
이 때문에 우리 집에 있다는 게 알려지면 난리가 날 게 분명해 007작전처럼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집으로 들어왔다.
“재판 끝날 때까지 앞으로 이 집이 너희 집이야.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히 지내.”
“오빠, 언젠가 이 은혜 꼭 갚을게요.”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짐 풀고 어서 쉬어. 밥은 한잠 푹 잔 다음에 일어나서 먹어. 하린이가 너희 먹인다고 랍스터에 소고기 등심까지 사다 놨어.”
“고마워 하린아.”
“하린아! 정말 고마워. 흑흑.”
“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떨어져. 나 여자랑 끌어안는 거 싫어해.”
“나는 좋단 말이야.”
“우리도.”
“야 너희 때문에 내가 레즈비언으로 찍혀서 오빠에게 소박맞을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럼 나랑 살자. 평생.”
“우리도.”
“나가. 이 집에서 다 나가~”
계약해지와 성접대 강요 소송은 내일 은하가 법원에 소장을 접수하며 본격화할 예정이었다.
아주 지루한 공방과 함께 진흙탕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서면 다현이와 민지, 수영, 연아는 SUN 엔터테인먼트의 노예가 돼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몸을 팔아야 할 수도 있었다.
원하지 않는 남자와 그 짓을 한다는 건 지독한 고통이자 치욕으로 죽을 때까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억만금을 줘도 치료할 수 없는 병으로 힘들어도 싸워서 이겨내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내일 아침 10시에 법원 들어간다고 은하 언니한테서 전화 왔어.”
“그래.”
“궁금한 거 있으면 전화 달라고 했어.”
“그 일은 네가 맡아서 하기로 했잖아. 알아서 해.”
“전화 줬으면 하는 것 같던데?”
“나 할 얘기 없어. 하고 싶지도 않고.”
“너무 매정하게 굴지 마.”
“매정하게 구는 게 아니라 정말 할 얘기가 없어서 그래. 할 얘기 있으면 그때 전화할게.”
“알았어.”
다현이네 소송과 관련된 일은 모두 하린이에게 일임했다. 은하가 다현이네 소송을 맡은 건 나를 만나려는 의도였다.
그걸 알기에 은하와 접촉을 최대한 피했다. 다현이네가 우리 집에 들어온 이상 뻔질나게 드나들겠지만, 될 수 있는 한 얼굴도 마주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은하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내 곁에 아무도 없었다면 다시 은하와 예전처럼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옆에는 하린이가... 하연이도... 있었다. 결혼할 사람을 옆에 두고 과거의 여자를 만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짓이었다. 남자는 맺고 끊음이 분명해야 했다. 일이 요상하게 꼬여 은하를 다시 만나게 됐지만, 선을 확실하게 그어 모두가 불행해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상사님,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매일 하는 일인데.”
“이은택의 움직임은 언제쯤 파악할 수 있습니까?”
“이따 오후에 박 상사와 정 상사가 KT 직원을 사칭해 놈의 집에 들어갈 거야. 그때 거실과 침실, 주방 등에 도청장치를 심으면 밤부터는 놈이 무슨 짓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겠지.”
“다행이군요.”
이사한 첫날 XX 경비회사와 계약을 맺고 무인 경비 시스템과 CCTV 출입구와 집밖에 잔뜩 설치했다.
또한, 이범석 상사와 김상호 상사, 박무윤 상사, 정동일 상사가 돌아가며 밤에도 집을 지킬 계획이라 밖에 나가지 않는 한 다현이와 민지, 수영, 연아가 공격받을 확률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이은택을 감시할 필요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구석에 몰린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다. 하물며 놈은 재벌 아들이자 마림 길드 길마로 현실에서도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이 최소 수백 명은 됐다.
그리고 그중에는 돈만 주면 못할 짓이 없는 양아치들도 수십 명에 달해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상사님, 부탁드릴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
“지극히 개인적인 일입니다. 소문나지 않게 상사님이 해주셨으면 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일인가 보군?”
“네. 제 뿌리에 관한 일입니다.”
“뿌리?”
“XXX 대학교 전종명 교수와 XX 대학교 윤선숙 교수가 제 부모가 맞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뭐라고?”
다현이네가 방에 들어가자 이범석 상사와 단둘이 응접실에 앉았다. 이은택에 관한 일로 서두를 연 다음 분위기가 무르익자 전종명과 윤선숙이 내 친부·친모가 맞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무턱대고 부모가 맞는지 알아봐 달라고 할 순 없었다.
최소한 의심하는 이유는 말해줘야 했다. 그래야 조사하는 사람도 성심성의껏 알아봤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어 웬만한 일에는 눈도 깜박이지 않는 이범석 상사도 내 얘기를 듣자 너무 황당해 눈만 깜박였다.
이범석 상사도 아들 한 명과 딸 둘을 둔 가장이었다. 자식이 미울 때도 잦지만, 못 나도 내 자식이라 감싸는 게 부모였다.
그런데 방치한 것도 모자라 버린 걸 알게 되자 황당함을 넘어 어처구니가 없어 했다.
“많이 힘들었겠다.”
“아닙니다. 힘들지 않았습니다.”
“힘들지 않긴 뭐가 힘들지 않다는 거야? 그런 일 겪고 힘들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야. 짜식아! 얼굴에 구김이 없어 아주 평범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인생 참 엿 같다.”
“저만 그런 거 아닙니다. 누구나 아픔 하나쯤은 있는 겁니다.”
“지랄하고 있네. 세상 사람이 다 너 같으면 망한 지 오래야. 그래도 단련이 많이 됐나 보네. 고통에서 벗어난 거 보면.”
“시간이 약이니까요.”
시간이 약? 헛소리였다. 시간이 지나도 마음의 상처를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이 씹고 또 씹어 상처를 덧낼 뿐이었다.
상처 입으면 사람은 보통 두 부류로 아픔을 표현한다. 아파 죽을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 아프지 않은 것처럼 죽을힘을 다해 고통을 참아내는 사람.
나는 전자가 아닌 후자였다. 고통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벗어난 것처럼 행동한 것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알아봐 줄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비밀로 해주십시오.”
“걱정하지 마.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무덤까지 가져갈 테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하린이와 하연이를 꼽았다. 그다음이 이범석 상사였다. 그래서 이범석 상사 혼자 처리해달라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종명과 윤선숙 양쪽을 다 확인해달라고 한 건 둘 중 한 명이 바람을 피워 낳은 자식일 수도 있어서였다.
둘이 합작해서 낳았다면 재혼한다고 해도 그 전까지 둘 중 한 명은 살갑게 대했어야 했다.
그런데 둘 다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그렇다면 둘 중 누군가 바람을 피워 원치 않는 아이를 낳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러면 TV 드라마에선 피가 섞인 쪽이 자식을 악착같이 보호했다. 하지만 현실은 원하지 않는 자식을 낳은 사람도, 자기 자식이 아닌 사람도 미워하긴 마찬가지였다.
“얘기했어?”
“어.”
“언제쯤 알아봐 줄 수 있데?”
“머리카락만 찾으면 되니까 1~2일이면 알 수 있다고 했어.”
혼자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 어제 하린이를 불러 친자 확인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하린이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동안 겪은 고통이 얼마나 크면 친자 확인까지 하겠냐고 끌어안고 한참을 엉엉 울었다.
“부모가 맞아도 걱정이고, 한쪽이 바람피워 낳았어도 걱정이고, 둘 다 아니어도 걱정이네.”
“둘 다 아니라...”
둘 다 아니면 정말 머리 아파지는 것이었다. 입양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다른 목적으로 데리고 있었다면 문제가 아주 심각해진다.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할 텐데, 내가 괜한 말 한 것 같아. 미안해.”
“아니야.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야. 괜찮아.”
“오빠, 맞든 틀리든 그건 결과 나오면 생각하자. 벌써부터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 없잖아. 안 그래?”
“그래. 그러자.”
둘 다 부모가 아니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찾아가서 묻는다고 답해줄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미 나는 그들과 인연이 끊긴 버려진 자식으로 만나주지도 않을 것이다. 억지로 만난다고 해도 내가 누군지, 어떻게 해서 그들 자식으로 살게 됐는지 말해주지도 않을 사람들이었다.
이범석 상사가 그들이 왜 나를 데려다 키웠는지, 내 진짜 부모가 누구인지, 진짜 부모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살아 있는지 알아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고민은 그때부터 해도 늦지 않았다. 부모가 맞아도 고민, 한쪽만이어도 고민, 양쪽 다 아니어도 고민, 고민할 것투성이였다.
“마틸다 회유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가야지.”
노예 시장에서 데려온 이탕가 산적의 우두머리는 26살 꽃다운 나이에 미망인이 된 마틸다였다.
남편과 함께 아슈뉴르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왔다가 경비병들의 손에 남편이 죽고 부하들과 함께 사로잡혔다.
졸지에 미망인이 된 마틸다는 이탕가 산적 중 누군가가 아슈누르 총독 베일리 후작에게 자신들이 도시에 들어간 걸 밀고해 남편은 죽고 자신은 잡혀 노예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