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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120.
“저녁 6시까지 가기로 했어.”
“고생했어.”
“고생은 무슨...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부, 고모, 이모부, 이모, 삼촌들도 오신다고 했어.”
“친척들 다 오는 거야?”
“응.”
“후유.”
“한숨 쉬지 않아도 돼. 짓궂게 굴 사람 없으니까. 어제 얘기했던 대로만 말하면 돼.”
“알았어.”
어젯밤 부모님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할지 하린이와 의논했다. 마음은 당장 결혼하고 싶었지만, 결혼하려면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집도 있고, 가구도 있고, 전자 제품도 있어 준비할 것도 없지만... 따져야할 것도 많아 올겨울이 가기 전에 결혼하겠다고 말하기로 했다.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해 한창 공부할 시기에 결혼하겠다고 하면 다른 부모님들은 무조건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하린이네 부모님은 대학 1학년에 결혼해 아주 잘살고 있어 반대할 확률이 매우 낮았다.
문제는 결혼이 아니라 어른들이 내 부모님에 관해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느냐 그것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부모에게 버림받고 쭉 혼자 살았다고 말하면 100이면 100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고 걱정한다.
그러나 내 자식이 그런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부모 100명 모두 결사반대를 외쳤다.
부모에게 버려진 자식이 바르게 컸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고, 피는 대물림된다고 부모가 했던 것처럼 나도 똑같이 자식을 버리고, 아내도 버리고 다른 여자를 찾아갈 수 있다고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린이는 절대 그런 일은 없다고 가족을 설득하겠지만, 내가 부모라도 그런 사위를 얻고 싶지 않아 반대할 게 분명했다.
“하연아, 엄마가 음식 만든다고 도와달라고 오래.”
“알았어. 오빠, 음식 맛있게 만들어 놓을게요. 이따 봐요.”
“그.그래.”
“언니, 오빠랑 재미있게 놀고 있어.”
“짐 정리해야 해. 놀 시간이 어디 있어?”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도 사랑은 꽃핀다고 했어. 입술 적당히 빨아. 퉁퉁 부어오면 할아버지, 할머니 놀라셔.”
“이게 또 죽으려고...”
“나 간다.”
밝은 척 웃으며 나가는 하연이의 모습이 너무 슬퍼 보였다. 가슴에 품고 등을 쓰다듬어주고 싶을 만큼 애처로웠다.
그러나 한껏 들떠 있는 하린이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하린이가 동생을 끔찍이 사랑해도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할 순 없었다.
“하연이가 많이 힘들어하지?”
“어?”
“하연이 오빠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
“그랬어?”
“어떻게 그걸 모르겠어. 둘도 없는 동생인데.”
“가깝게 지내서 좋아하는 것뿐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연이 성격 나랑 비슷해. 한번 좋아하면 끝까지 좋아할 거야.
“우리 결혼하면 달라질 거야.”
“아니. 하연이 절대 바뀌지 않을 거야. 내가 알아.”
“좋은 사람 만나면 바뀔 거야.”
“그랬으면 좋겠는데...”
하린이도 하연이가 날 좋아하는 걸 알았다. 처음에는 언니 남자 친구에 대한 호감 정도로 생각했는데, 나를 바라보는 눈빛과 행동이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모습이란 걸 알고 남자로서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자매가 한 남자를 좋아해선 안 되는 일이었지만, 아파할 동생을 생각하면 그러지 말라고 화를 낼 수도 없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원인 제공자가 타인도 아닌 자신이기에 누굴 원망할 수도 없었다.
인생은 이렇듯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 같았다.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우리를 힘들게 했다.
그러나 정해진 순서대로 흘러간다면 그 인생 역시 지루하고 따분하고 재미없는 인생이었다.
어디로 갈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자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며 사는 게 인생인지도 몰랐다.
“다 잘 될 거야.”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
하연이가 이민 가서 살자고 한 말을 하연이게 말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힘들어하는데 그 말을 했다간 무너질 수도 있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된 거지? 하아...’
시간은 나와 하린이와 하연이의 걱정 따위는 까맣게 모르는지 약속 시간 저녁 6시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오빠, 빨리 오세요.”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어른들 30분 전부터 기다리고 계세요.”
“그래? 알았어. 그런데 언니는 어디 가고 네가 왔어?”
“언니 꽃단장하고 있어요.”
“꽃단장?”
“네.”
이범석 상사를 만나러 갈 때도 하린이는 화장하지 않았다. 눈썹도 안 그리고, 눈 화장도 안 하고, 립스틱도 바르지 않은 채 로션 하나만 바르고 갔다.
화장은 여자를 아름답게 변신시키는 마법의 도구지만, 본판이 예쁜 여성에겐 마법의 도구로도 이길 수 없었다.
죽도록 공부해도 천재를 이길 수 없는 것처럼 타고난 미인 앞에선 화장을 떡칠해도 돋보일 수 없었다.
화장하지 않아도 예쁜 하린이가 화장하자 만화를 찢고 나온 여주인공처럼 변신했다.
아주 옅게 화장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귀여움과 여성미가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여신처럼 보였다.
“이상하지 않아?”
“아니. 너무너무 예뻐.”
“놀리는 거 아니지?”
“정말이야. 연예인보다 네가 더 예뻐.”
“다행이다. 화장해본 적이 없어서 이상하게 된 것 같아 걱정이었거든. 마음에 든다니 앞으로 계속해야겠다.”
“하린아, 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더 좋아.”
“그럼 별로라는 얘기잖아?”
“아니. 예쁘다고 한 말 진심이야. 하지만 나는 로션만 바른 깨끗한 모습이 더 좋아. 그게 진짜 너니까.”
“나도 화장하는 거 체질에 안 맞아. 계속한다고 했지만, 그럴 수 있을지 자신 없었어. 안 해도 된다고 하니까 너무 좋다. 히히히히.”
화장한 모습은 진심으로 정말 예뻤다. 그러나 로션만 바른 촉촉한 모습이 더 좋았다.
여자가 입술에 바른 립스틱의 절반은 남자가 먹는다고 했다. 보여주기 위해 꾸민 모습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부스스한 모습을 보여주라는 뜻은 아니었다. 최대한 순수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인위적으로 아름답게 꾸민 모습보다 아름답다고... 지극히 개인적으로...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전형필입니다.”
“어서 오게. 하린이 할아버지일세.”
“어서 와요. 하린이 할머니에요.”
하린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큰절을 올리자 분위기가 대번에 좋아졌다. 예의를 중시하는 대한민국에선 어른께 절을 하는 것만큼 많은 점수를 따는 것도 없었다.
“어서 오게. 하린이 아빠 송재윤이네.”
“하린이와 같은 학교 다닌다는 얘기 들었어요. 반가워요. 하린이 엄마 김영아에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형필입니다.”
낮에 아울렛에서 선물로 사 온 술과 고기를 어머니께 드리고 자리에 앉자 아버지와 어머니, 친척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하린이 말로는 군대 갔다 왔다고 하던데? 그것도 직업군인으로. 사실인가?”
“네. 1공수 특전여단 중사로 5년간 복무 후 작년 초에 제대했습니다.”
“그러면 해외파병도 다녀왔겠군?”
“중사로 진급하고 1년 넘게 레바논 XX 부대에 있었습니다.”
“레바논이면 위험한 일도 많았겠군?”
“아닙니다. 내근 업무만 담당해 위험하지 않았습니다.”
“행정병이었나?”
“아닙니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 같군. 그렇지?”
“죄송합니다.”
하린이 아버님이 특전사 갔다 온 걸 물어왔다. 하린이와 동갑이거나 한두 살 많으면 신의 아들이 아닌 한 반드시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
딸 가진 부모 입장에서 결혼하겠다고 찾아온 남자 친구가 군대도 갔다 오지 않은 햇병아리라면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군대도 갔다 왔고 특전사까지 제대하자 특수병과에 대한 로망이 살아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고모부, 이모부, 삼촌들이 아주 좋아했다.
보병 1111(병과 주특기 번호)을 부여받은 남자들은 자신과 다른 군복과 모자만 봐도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다.
특히, 특전사의 검은 베레모와 해병대 팔각 모자를 보면 선망과 호기심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주눅 들어 했다.
그런 모습이 인사드리러 간 자리에서도 재현됐다. 다른 게 있다면 가족으로 들어올 아랫사람이라 주눅이 아닌 자랑스러움이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고모부, 이모부, 삼촌이 들떠 있을 때 하린이 아버지는 레바논 XX 부대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는지 넌지시 위험한 일이 있었냐고 물어왔다.
인질 구출 작전과 기밀문서 수거 작전에 투입돼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기밀 사항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사실을 알기라도 하듯 하린이 아버지가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계속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서 죄송하다는 말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을 대신했다.
“오빠, 레바논에서 위험한 일 있었죠?”
“없었어.”
“그런데 왜 말을 못해요?”
“제대할 때 말하지 않겠다고 서약서를 썼어. 그래서 말 못하는 것뿐이야.”
“위험한 일도 없었는데 서약서를 써요?”
“군대는 사소한 일도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싫어해. 그래서 그래.”
“아닌 것 같은데요? 무슨 일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저 그렇게 촉이 없는 여자 아니에요. 사실대로 말하세요.”
“정말 아무 일 없었어.”
“솔직하게 말하세요. 안 그러면 언니 걱정돼서 잠 못 자요.”
“으음... 작전에 몇 번 참가했어. 그러나 목숨이 위험한 작전은 없었어.”
“그 말 하늘에 맹세할 수 있죠?”
“어.”
하린이가 꼭 알아야 할 일도 있지만, 몰라서 좋은 일도 있었다. 레바논 파병 일은 몰라서 좋은 일로 수류탄이 터져 죽을 뻔했던 일은 모르는 게 약이었다.
이런 자리에선 절대 빠지지 않는 게 호구조사인지 가장 우려했던 질문을 하린이 어머니가 던졌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살아 계세요?”
“네.”
“형제는 어떻게 돼요?”
“... 혼자입니다.”
“외동아들이면 엄청 사랑받고 컸겠네요?”
“... 그렇습니다.”
“이런 거 물어봐도 되는지 모르겠네?”
“편하게 물어보십시오.”
“부모님은 뭐 하세요?”
“두 분 다 대학교 교수십니다.”
“교수요?”
“네.”
“어디 계시는데요?”
“아버지는 XXX 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이고, 어머니는 XX 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십니다.”
“부모님 두 분 다 명문대 교수라니 정말 대단하네요.”
“감사합니다.”
부모는 내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전혀 몰랐다. 이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린 부모에게 나는 지어버리고 싶은 치부이자 영원히 사라져줬으면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나는 부모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았다. 알고 싶어 아는 게 아니라 TV에 이름이 나와 알 수밖에 없었다.
TV를 잘 보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TV 볼 시간이 없는 것도 있었지만, 시사 프로와 뉴스에 자주 얼굴을 비치는 부모를 보기 싫어서였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