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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시대-119화 (11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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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119. 인사

“도청은 불법이잖아?”

“납치 강간을 막으려면 더한 짓도 해야지.”

“그렇긴 하지만... 그러다 상사님 일행이 경찰에 잡히면 어쩌려고?”

“발각될 것을 염두에 두고 이중 삼중으로 탈출로를 확보해 잡힐 일도 없고, 증거도 남기지 않아 도청당한 것만 알 뿐 누가 했는지 몰라.”

최정예 특전사 요원인 이범석 상사와 김상호 상사, 박무윤 상사, 정동일 상사는 정보수집 능력도 최고 중의 최고로 이은택의 집을 도청하는 건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보다 쉬웠다.

“인스턴트 던전용 캡슐은 언제 와?”

“5일 후에 와.”

“원래 3일 전에 왔어야 하는 거 아니야?”

“3인용으로 바꾸며 일주일 이상 늦어졌어. 대신 12월에 종료하기로 한 인스턴트 던전을 한 달 연장하기로 했어.”

“다현이와 민지, 수영, 연아가 쓸 캡슐은?

“그것도 같은 날 도착해.”

심리적 안정을 주기 위해 다현이와 민지, 수영, 연아가 쓸 캡슐을 구입했다. 조만간 경찰에 SUN 엔터테인먼트 사장과 실장, 이은택을 고발할 계획이라 학교도 다닐 수 없어 캡슐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집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건 정신건강에 도움이 안 됐다. 사냥도 하고 다양한 콘텐츠도 즐기는 것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어 다현이네가 사용할 캡슐도 구입하게 됐다.

“집에는 언제 찾아뵙지?”

“최대한 빨리 가는 게 좋겠어. 나와 하연이가 이 집에 있는 거 알고 계셔. 아저씨가 어제 얘기했어.”

“그럼 오늘 저녁에 찾아뵙자.”

“오늘? 그렇게 빨리?”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미운털 박힐 텐데 빨리 찾아뵙는 게 좋잖아.”

“그렇긴 하지. 근데 오빠 마음의 준비는 한 거야?”

“어.”

마음에 준비가 될 턱이 없었다. 25년을 살면서 하도 더러운 꼴을 많이 봐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혼하겠다고 여자 집에 찾아가는 건 고난으로 단련된 멘탈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흔들리다 못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울 만큼 정신이 혼미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조차 까먹게 하였다.

“그런데 입고 갈 양복이 없어.”

“하연이에게 설명 다 했으니까 설치 기사들 오면 알아서 할 거야. 나랑 같이 나갔다 오자.”

“하연이 혼자 두고 가자고? 안 돼. 위험해.”

“그런가?”

“그럼. 여자 혼자 있는 집에, 그것도 하연이처럼 예쁜 소녀 혼자 있는 집에 남자들 오는 거 정말 조심해야 해.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다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어.”

“그런 말 하지 마. 무서워.”

“그러니까 다음부터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지 마. 알았어?”

“응. 다시는 안 그럴게.”

강간범이 이마에 ‘내가 당신을 강간하겠소.’라고 써 붙이고 다니지 않았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 험한 인상의 남자가 강간범이 되라는 보장도 없었다.

옆집 오빠, 건넛집 아저씨, 음식 배달부 등 친근한 얼굴이 갑자기 돌변해 한 사람의 인생을, 그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것이었다.

낯선 사람이든, 낯익은 사람이든 혼자 있을 때는 문을 열어줘서는 안 된다. 상대가 기분 나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자기 인생이, 가족의 인생이 달린 일이었다. 욕을 먹더라도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했다.

“침대하고 소파 몇 시에 오기로 했어?”

“2시간 뒤.”

“그러면 빨리 갔다 오면 되겠다. 하연아!”

“네, 오빠.”

“아울렛 갈 거니까 옷 입어.”

“네에~”

정리하던 짐을 모두 내팽개치고 근처 아울렛으로 향했다. 아울렛에서 아르바이트는 많이 했지만, 물건 사러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내가 아닌 남을 위해 물건을 나르고, 음식을 나르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나라를 지키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9년을 살았다.

그러나 내게 돌아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멸시와 천대, 비웃음 그리고 병신이나 다름없는 상처뿐이었다.

‘남들은 이렇게 즐겁게 사는데 나는 그동안 뭐 하고 산 거지? 병신 같은 놈!’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가는 아이들, 다정하게 옷을 고르는 연인, 맛있는 걸 나눠 먹으며 웃고 떠드는 여자들,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옷을 고르는 중년 부부... 모두 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바라던 모습이었지만,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러나 저들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웃고 떠들고 있었다.

‘이제부터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해, 하린이을 위해, 하연이를 위해 사는 거야. 다른 사람들 눈치 볼 거 없어. 나와 하린이, 하연이만 행복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사는 거야. 욕을 먹더라도 그거면 되는 거야.’

사람들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자 더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바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를 버린 부모, 나를 버린 국가 그리고 내게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해 뒤에서 땀 흘리며 살고 싶지 않았다.

나와 하린이, 하연이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살 것이다. 그것이 지독한 이기주의라고 사람들이 욕해도 앞으로 나는 그렇게 살 것 생각이었다.

내 굳은 결심도 모르는 하린이와 하연이는 내 팔 하나를 점유한 채 좌우로 끌고 다니며 옷을 구경하느라 좋아 죽으려고 했다.

하린이와 하연이가 골라주는 대로 검은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 파란색 넥타이, 심플한 구두 그리고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괜찮아?”

“멋져.”

“오빠, 정말 근사해요.”

“놀리는 거 아니지?”

“모델해도 되겠어. 진짜야.”

“언니 말이 맞아요. 잘 나가는 모델보다 오빠가 더 멋있어요.”

“둘 다 미쳤구나. 제정신이 아니야.”

“진짜라고.”

“정말이에요.”

눈에 콩깍지 백만 개가 씌운 하린이와 하연이는 내가 뭘 입어도 멋지다고 했다. 이것이 사랑의 힘이자 제정신이 아닌 모습으로 정신을 차리는 순간 웬 놈팡이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렇다고 초라한 모습은 아니었다. 가진 건 없지만... 이제는 그렇지도 않지만... 180cm의 호리호리한 몸에 다리도 긴 편이고 운동도 열심히 해 군살도 없어 뭘 입어도 추레해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무릎이 왕창 튀어나온 운동복과 목이 가슴까지 늘어진 면티를 입고도 구질구질하지 않을 만큼 인물이 뛰어나진 않았다.

“나는 엄마 좀 만나고 올게.”

“어.”

“긴장하지 마. 우리 부모님 나쁜 사람 아니야.”

“알았어.”

저녁에 인사하러 간다는 얘기를 하러 하린이가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갑자기 남자를 데리고 온다면 하린이 부모님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기쁜 표정을 짓긴 어려울 것이다. 이제 겨우 20살인 딸을 데려가겠다고 시커먼 늑대가 나타났는데 좋아할 부모는 없었다.

“오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부모님 자식이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화내지 않아요. 그리고 아빠·엄마도 대학교 1학년 때 결혼해서 언니와 사귀는 거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가족 중에 반대할 사람 저 하나밖에 없어요.”

“뭐라고?”

“아니에요.”

“지금 반대한다고 하지 않았어?”

“못 들은 거로 해주세요. 하아...”

“하연아?”

“네?”

“나도 네가 좋아. 하지만 언니를 더 사랑해. 이해해줄 거지?”

“그걸 이해해달라고 하는 거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언니를 먼저 만났고, 더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니까.”

“먼저 만난 게 더 좋아하는 이유라면 유치원 때 만난 여자와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억지 부리지 마.”

“죄송해요. 답답해서 그랬어요.”

언니 하린이를 하연이보다 조금 일찍 만났다는 이유로, 조금 더 사랑한다는 이유로 빠져달라는 말은 지독한 모순이었다.

A를 더 사랑하니까 B는 빠져달라는 건 산술적으로는 아주 타당한 얘기였다. 그러나 사랑은 많고 적음을 논할 수 있는 숫자놀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A를 조금 더 사랑한다고, 내일도 사랑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내일은 B를 죽도록 사랑할 수 있는 게 사랑이었다.

사랑이 그렇게 쉽게 변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것도 시대가 발전할수록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주변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1분 1초도 떨어져 있지 못할 만큼 열렬히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다. 남자가 군대에 갔다. 여자는 눈물을 뻥뻥 쏟았다.

한 달이 지났다. 두 달이 지났다. 석 달이 지났다. 여자는 더는 남자가 그립지 않았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게 바로 인간의 사랑이었다. 인간의 사랑은 갈대보다 더 쉽게 흔들렸고, 몇 달도 지나지 않아 까맣게 잊혀졌다.

은하처럼 7년을 기다린 사랑도 있지만...

“오빠, 우리 이민 가서 살래요?”

“어디로?”

“모로코나 남아공으로요.”

“거긴 왜?”

“일부다처제 국가니까요.”

사랑을 갈구하는 하연의 모습에 당황스럽기보다 애처롭고 미안했다. 19살 소녀가 가슴 아파하는 모습이 애처로웠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그건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일이었다. 잔인해도 지금 아픈 게 모두를 위한 일이었다.

“부모님 안 보고 살 수 있어? 오빠, 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친구들은?”

“그건...”

“그곳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 그래도 괜찮아?”

“그게... 그게...”

“그런 거 다 떠나서 언니가 싫다고 하면 어쩔 거야?”

“언니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저를 사랑하니까요.”

“그 사랑과 우리 사랑은 달라. 같다고 혼동하지 마.”

“아니요. 언니는 다 이해할 거예요.”

“하연아, 감정에 치우면 당장은 좋은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엄청나게 후회하게 돼. 괴롭고 힘들어도 현실을 직시해야 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하린이와 하연이 둘 다 가지고 싶었다. 현실 같은 거 개나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이 나라를 떠나도 아쉬울 것이 없지만, 하린이와 하연이는 달랐다.

떠난 지 한 달도 안 돼 가족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리움은 병이 되고, 병은 원망이 되어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오빠, 결혼하지 말고 우리 지금처럼 셋이 살면 안 돼요?”

“하아...”

사랑은 아끼고 베풀며 따뜻하게 여기는 마음,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전쟁도 멈추게 하는 위대한 마음이었지만, 이성을 마비시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드는 무서운 질병이기도 했다.

하연이처럼...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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