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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
115.
“검사? 변호사?”
“변호사야.”
“축하해.”
“네 덕분에 딴 거야. 너 아니었으면 따지도 못했어.”
“거기 왜 내가 들어가?”
“너랑 함께한 시간을 추억하며 힘들고 괴로워도 참았어. 합격해야 너를 다시 볼 수 있으니까. 그러니 모두 네 덕분이지.”
은하는 대학 3학년 때 사법 고시에 합격했다. 졸업 전에 사법 고시에 합격한 사람은 대한민국에 사법 고시가 생긴 후 한 손에 들 만큼 몇 명 없는 일로 천재 중의 천재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은하는 사법연수원도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법조계에선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고마운 말이야. 그런데 나는 너만큼 네 생각하지 않았어. 미안해.”
“내가 널 버렸으니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이해해. 그리고 생각해준 것만도 너무 고마워.”
“네 잘못 아니라고 했잖아. 내 잘못이야.”
“알았어. 인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이렇게 다시 만난 게 중요하지.”
은하는 나를 만난 게 정말 기쁜지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눈에도 습기가 가득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기세였다.
“많이 바쁘겠다.”
“연수원 나와서 일 시작한 지 이제 1년 조금 넘어서 일이 많지 않아. 아주 널널해.”
“어디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는데?”
“개인 변호사 사무실 차렸어. 대형 법률사무소는 내가 원하는 변론을 할 수 없어 들어가지 않았어.”
“혼자 일하려면 많이 힘들 텐데?”
“도와주는 사람 2명 있어. 그리고 힘들어도 재미있어.”
“무슨 변론하는데 재미있어?”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어. 특히 부모 때문에 힘들어하는 자녀들을 위해 일해.”
“나 때문에 그런 거야?”
“공부하는 내내 머릿속에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 그래서 하게 됐어.”
“그런 거 보면 기분이 별로일 텐데?”
“맞아. 마음 아픈 일이 참 많아. 그래도 일이 잘되면 기분 좋아.”
은하는 내가 부모에 때문에 힘들게 사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대형 법률사무소의 고액 연봉제의를 단칼에 거절하고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다.
매우 힘들고 고단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는 것으로 나 때문에 은하의 인생이 고달파졌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연예계 변론도 해봤어?”
“아니.”
“그렇구나.”
“무슨 일인데 그래?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도울게.”
“아니야. 아무것도.”
“그러지 말고 말해. 너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 돕고 싶어.”
다현이네 일을 말해야 하는 것이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다현이네 일을 은하가 맡으면 나를 봐서라도 자기 일처럼 해줄 게 확실해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다현이를 핑계로 계속 만나게 될 수도 있었다. 그건 하린이와 하연이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곤경에 처한 다현이를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학교에서 성우 빼고 유일하게 나와 하린에게 친근하게 대한 사람이 히어로걸스 멤버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다현이는 살갑다 못해 동생처럼 굴었다. 그런 다현이를 이은택을 처리하는데 이용한다고 생각하자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래. 이렇게라도 마음의 짐을 덜자.’
연아네 집이 좀 살아 변호사 비용을 댄다고 했지만, 산다는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부자를 얘기하는 건 아니었다.
네 명 중 가장 낫다는 뜻으로 간신히 중산층에 들 정도였다. 중산층이면 괜찮게 사는 집이었지만, 소송이 길어지면 변호사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SUN 엔터테인먼트만 해도 대형 법률사무소와 계약하고 있어 버거운 상대인데, 마림 재단은 국내 최대의 법률사무소를 끼고 있어 웬만한 변호사는 일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맞대응이 가능한 비싼 법률사무소에 일을 맡기면 기둥뿌리 뽑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금전적인 문제와 자기 일처럼 해줄 수 있느냐를 생각하면 은하에게 맡기는 게 가장 현명했다.
“같은 학과 동기 중에 히어로걸스 멤버들이 있어.”
“그래? 복 받았네. 가장 핫한 여자 아이돌 그룹과 같은 반이라니. 누구누구 있는데?”
“전부다.”
“우와! 너희 반 남자애들 정말 계 탔네. 학교 다닐 만하겠다.”
“그렇지. 그런데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
“마림 재단이라고 알아?”
“그럼. 나도 그 학교 나왔는데 당연히 알지.”
“둘째 아들 이은택이 히어로걸스 소속사인 SUN 엔터테인먼트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어. 히어로걸스 멤버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스폰서를 제안한 거야?”
“비슷해. 그래서 4명이 그룹을 탈퇴하려고 해.”
“데뷔한 지 1년 조금 넘지 않았어?”
“맞아.”
“그렇게 되면 소속사와 갈등이 심해지겠네?”
“그래서 사장과 담판을 지으려고 해. 스폰서를 제안하는 동영상이 있거든.”
“그 정도로 증거가 확실해?”
“보여줄까?”
“응.”
휴대전화기를 꺼내 다현이가 보낸 동영상과 문자를 은하에게 보여줬다.
“으음... 내가 그쪽 전문 변호사가 아니라서 검토를 더 해봐야겠지만, 이걸로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왜?”
“SUN 엔터테인먼트 사장과 실장이 멤버들에게 직접적으로 성상납을 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 풍기는 뉘앙스는 아주 강해 어떤 뜻인지 유추할 수 있지만, 법정에서 아니라고 우기면 입증하기가 어려워.”
“동영상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법으로는 안 된다?”
“우리나라 법이 허점투성이에 있는 자들을 위해 만들어져서 그래. 너무 열 받지 마. 혹시 이 동영상 찍은 이후에 일이 벌어진 건 아니지?”
“어.”
“이은택이 보낸 문자는 노골적으로 치근댄 게 확실해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어. 그러나 집행유예가 떨어질 거야. 기대할 수 있는 건 사회적 책임 정도야.”
“SUN 엔터테인먼트는 100% 소송으로 가겠네?”
“그렇게 되겠지.”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변호사에게 직접 듣자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상대가 나쁜 의도로 한 게 명백한데도 죄를 입증하기 어렵다니... 역시 이 나라는 썩을 대로 썩은 나라였다.
그리고 온갖 협박이 난무하는 문자를 수십 통 받고도 처벌은 집행유예와 사회봉사 몇 시간이 고작이었다.
웃기는 건 이런 놈은 감옥에 보내도 일반인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편하게 지낸다는 것이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했다. 그러나 돈 앞에는 평등하지 않았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내가 맡을게.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반드시 이길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당사자인 다현이에게 물어봐야 해.”
“그럼 전화해. 아직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면 나를 선임하라고 해. SUN 엔터테인먼트 사장 만날 때도 같이 가줄 테니까.”
“물어볼게.”
♩♪♩♪♬~ ♩♪♬♩♪~
“다현아.”
“네, 오빠,”
“변호사 선임했어?”
“아직 안 했어요.”
“내 친구 중에 변호사가 있어. 연예계 쪽은 아닌데 내 일처럼 해주겠다고 했어. 어떻게 할래?”
“오빠, 정말 고마워요. 고마워요. 흑흑흑.”
“울지 마. 다 잘 될 거야.”
“네.”
펑펑 우는 다현이를 달랜 다음 휴대전화기를 은하에게 넘겨줬다. 내일 아침 이범석 상사가 다현이 일행을 숙소에서 빼내러 간다고 하자 자신도 그곳에 가겠다고 했다.
변호사가 입회하면 경찰도 함부로 할 수 없어 다현이 일행에게는 아주 잘 된 일이었다.
이범석 상사에게 전화해 김은하 변호사가 시간 맞춰갈 거란 것과 잘 협조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끊었다.
“우리 소주 한잔할까?”
“술 마시자고?”
“응.”
“미안해.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안 돼.”
“저기 앉아 있는 예쁜 아가씨 두 명?”
“어떻게 알았어?”
“힐끔힐끔 계속 쳐다보기에 유심히 관찰했어. 그리고 네가 여자 친구 있다는 얘기도 들었고. 머리 짧고 연예인보다 더 예쁜 여자 친구 있다는 말. 그래서 단번에 알아봤어.”
“미안해. 속이려 그런 건 아니야. 같이 있는데 문자가 와서 어쩔 수가 없었어.”
“나 네 첫 번째 여자야. 네 성격 어떤지 모를 것 같아? 다 알아. 그러니 애써 변명하지 않아도 돼.”
“고마워.”
“그럼 이제 언니들 불러서 같이 소주 한잔 하자고 말해. XX대학교 구석진 골목에 아주 맛있는 고깃집 있어. 내가 쏠 테니까 가자.”
“미안하지만, 술은 다음에 하자. 오늘은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알았어.”
처음 만났을 때 불안함과 초조함이 잔뜩 묻어있던 은하의 얼굴에 한껏 여유가 생겼다.
다현이네 변호를 맡으며 바뀐 것으로 나와 계속 만날 수 있게 되자 마음의 안정을 찾아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의 안정을 찾자 조급함이 사라져 다음에 마시자고 해도 실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형필이 고등학교 친구 김은하예요.”
“아! 네, 안녕하세요. 송하린입니다.”
“송하연이에요.”
“같이 저녁이라도 먹으면 좋겠는데, 오늘은 형필이가 바쁜 일이 있다고 하네요. 조만간 같이 식사해요.”
“네? 아 네.”
“그럼 먼저 가볼게요.”
“네.”
술은 다음에 하자고 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은하가 하린이와 하연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은하가 다가오자 놀라 토끼 눈이 된 하린이와 하연이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얼떨결에 인사를 나눴다.
“내일 전화할게.”
“알았어.”
“다시 못 보면 어쩌나 걱정 많이 했어. 이렇게 만나니 꿈만 같다.”
와락
은하가 내 품에 안겨 왔다. 하린이와 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지만, 밀어낼 수 없었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은하를 밀어내는 건 너무 잔인한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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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