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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
114. 은하
우우우웅 우우우웅
“오빠, 문자 왔어요.”
“어. 고마워.”
“그런데 아직도 소리 안 바꿨어요?”
“전화벨 소리는 하린이가 바꿔줬어.”
“문자 말이에요.”
“진동이 편해.”
“하연아, 말해도 소용없어. 무음 아닌 게 다행이야.”
“아오 옛날사람.”
하린이를 만나기 전까진 내 생활은 고요 그 자체였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오면 씻고 자는 게 일로 TV도 잘 틀지 않아 절간보다도 조용했다.
“.......”
“뭔데 그래?”
“어? 아.아무것도 아니야.”
“얼굴이 무슨 일 있다고 쓰여 있어. 말해봐. 뭔지.”
“은하 알지?”
“응. 오빠 고등학교 때 첫사랑.”
“은하가 문자를 보내왔어.”
“전화번호 알고 지냈어?”
“아니.”
“그런데 어떻게 알고 연락한 거야?”
“네가 봐봐.”
은하에게 문자가 왔다. 헤어진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문자를 봤을 때 스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만난 날짜와 장소 그리고 첫날밤을 보낸 날짜가 있었다. 그건 타인이 절대 알 수 없는 일로 나와 은하만 아는 일이었다.
나 은하야. 기억해?
우리 헤어진 지 벌써 7년이 다 돼가네. 잘 지냈지?
특전사 갔다는 얘기 들었어.
입대할 때 가고 싶었지만, 엄마가 반대해 갈 수 없었어. 미안해!
나는 너 입대하고 얼마 후에 대학에 들어갔어.
엄마가 사법 고시 패스하면 다시 만나도 된다고 해서 죽어라 공부했어.
겨우 합격해서 널 찾았지만, 그때는 살던 집도 옮기고 휴대폰 번호도 바꿔서 찾을 수가 없었어.
그러다 우연히 내가 졸업한 학교에 네가 입학했다는 걸 알게 됐어.
그래서 후배를 졸라 네 전화번호를 알아내 이렇게 문자 보낸 거야.
나는 지금도 기억해.
너와 처음 만나 XX야외 수영장과 XXXX년 X월 XX일을
그리고 우리가 함께 했던 XX일도...
너와 함께했던 날을 나는 하루도 잊지 않고 살았어.
아직도 화가 난 게 아니라면 만나줘.
만나고 싶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
“하아.”
“오빠, 저도 봐도 돼요?”
“어.”
언니의 깊은 한숨에 하연이가 은하에게 온 문자를 보여 달라고 했다. 보여주지 않아도 조만간 하린이를 통해 내용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솔직하게 보여주는 게 나았다.
“은하 언니 오빠 정말 사랑하나 보네요. 7년을 잊지 않고 지내다니. 나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
하연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은하의 행동을 멋지다고 할 수도 없었고, 고맙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바보 같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욕을 할 수도 없었다. 할 말이 없을 땐 침묵이 금이었다.
“만나.”
“아니야. 7년 전에 다 끝난 일이야. 만나봐야 좋을 거 없어.”
“그건 오빠 생각이고, 은하 언니 생각은 달라.”
“은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지금은 내 생각이 중요해.”
“오빠, 나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얘기하지 마. 그런다고 내가 기뻐할 것 같아?”
“나 은하에 대한 미련 없어.”
“미련을 말하는 게 아니야. 헤어질 때 은하 언니 엄마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헤어졌잖아. 그 때문에 마음에 앙금이 남았잖아. 그리고 오빠가 꼭 알아둬야 할 일이 하나 있어.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헤어지는 게 더 중요해. 특히 여자하고는. 나쁜 모습으로 헤어지면 언젠가 화살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어.”
“흐음...”
“이 문자가 사실이면 은하 언니 7년 동안 오빠 기다린 거야. 그러면 만나서 잘 지냈는지, 힘들진 않았는지 물어보고 위로해주는 게 맞아.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어. 그게 진정한 유종의 미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 하지만 그건 너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나는 평생 오빠랑 함께할 거야. 그런데 내 마음과 달리 오빠가 나를 싫어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어. 그때 오빠가 나를 매몰차게 버리지 않길 바라. 그러면 난 살 수 없을 거야. 은하 언니도 나와 같은 생각일 거야. 그러니 만나야 해. 만나서 마음속에 응어리진 걸 풀어줘야 해. 그게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야.”
“저도 언니와 같은 생각이에요. 힘들어도 만나는 게 맞아요.”
하린이는 은하를 걱정해서 만나라는 게 아니었다. 같은 남자를 사랑했다고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 안아 줄 거로 생각하면 절대 오산이었다.
그랬다면 지구는 지금보다 백배는 더 평화로웠을 것이다. 하린이는 자기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내 등을 미는 것이었다.
사랑은 불타오르면 죽고 못 살 것 같지만, 식으면 냉동 창고에 든 얼음보다도 더 싸늘했다. 그것을 알기에 유종의 미를 거두라고 한 것이었다.
“알았어.”
“마음을 굳혔다면 지금 전화해.”
“지금?”
“그래. 시간 끌면 머리만 복잡해져.”
“하아.”
하린이가 원하는 대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7년 만에 문자가 왔다고 쪼르륵 전화하는 게 우스웠지만, 머리 아픈 일일수록 빨리 해결하는 게 나았다. 질질 끌수록 나도, 은하도, 하린이도, 하연이도 상처만 늘었다.
♩♪♩♪♬~ ♩♪♬♩♪~
“잘 지냈어?”
“어. 너는?”
“나도 잘 지냈어.”
잘 지냈냐는 말이 끝나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로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7년이란 시간은 우리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서먹서먹하게 만들었다.
“많이 놀랐지?”
“조금.”
“전화번호 알게 된 지 일주일 넘었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 고민하다가 문자 보낸 거야. 그 문자 쓰는데 이틀 밤 꼬박 새웠어.”
“전화하지 그랬어?”
“용기가 안 났어. 그때 엄마 때문에 그렇게 됐지만, 나도 잘한 거 없었거든. 그래서 미안해서 전화 걸 수가 없었어.”
“네 잘못 아니야. 보듬어 안지 못한 내 잘못이야.”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하지만 내가 말한 게 사실이야.”
“모두 지난 일이야. 마음에 담아둘 거 없어. 난 이미 잊은 지 오래니까.”
“너는 어쩔지 몰라도 난 잊지를 못하겠어. 매일 매일 생각나.”
“잊으려 노력하면 돼. 그러면 잊혀져.”
하린이와 하연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어 은하에게 잊으라고 말한 게 아니었다.
지난 일을 계속 곱씹으면 괴롭기만 했다. 잊고 현재에 충실해야 했다.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의 기억을 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아픈 기억은 잊으려 노력한다고 잊히는 게 아니었다.
잊으려 노력하는 것 자체가 기억을 계속 더듬게 했다. 노력할수록 잊히지 않는 게 기억이었다.
“형필아. 우리 전화로 얘기하지 말고 만나서 얘기하자. 그래 줄 수 있지?”
“전화로 얘기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전화로 하기엔 할 얘기가 너무 많아.”
“오빠, 만나. 그런 얘기 전화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전화로 얘기를 끝내려 하자 하린이가 손사래를 치며 은하를 만나라고 했다. 은하는 나를 만날 날을 7년을 기다렸다. 할 얘기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데 나는 하린이를 생각해 전화로 이야기를 끝내려 했다. 그러나 잘못 생각한 것으로 하린이가 원하는 유종의 미가 아니었다.
만나서 위로해주고, 이해시키고, 아픔을 달래주는 것 하린이가 원한 건 그런 것이었다.
“알았어. 날짜와 장소 잡아. 나갈게.”
“오늘은 시간 없어?”
“오늘?”
“응. 나 1초도 못 기다리겠어. 널 너무 보고 싶어.”
“흐음... 알았어. 어디로 갈까?”
“지금 어디 있어?”
“덕수궁 근처야.”
“나는 을지로야. 내가 그리로 갈게.”
“아니야. 내가 갈게.”
“그럼 을지로 입구 지하철 4번 출구 앞에 XXX커피 전문점 있어. 큰 매장이라 잘 보일 거야. 거기 2층에서 만나자.”
“알았어.”
“오는데 얼마나 걸려?”
“넉넉잡고 1시간이면 갈 수 있어.”
“알았어. 나도 늦지 않게 갈게.”
“그래.”
전화를 끊고 하린이를 바라봤다. 은하를 만나라고 했지만, 막상 만나게 되자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가까이 다가가 살며시 품에 안자 고개를 들어 입술을 빨아댔다.
하린이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입술을 빨았다. 그러나 하린이만 불안해하는 게 아니었다.
하연이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손을 내밀지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마음인지 양손으로 내 손을 꽉 잡았다.
“집에 가 있어. 금방 갈게.”
“나도 따라가면 안 될까? 옆에 있겠다는 게 아니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집에 가서 편히 쉬고 있어.”
“오빠가 은하 언니와 뭘 어떻게 할까 봐 감시하려는 게 아니야. 이대로는 불안해서 집에 갈 수가 없어서 그래.”
“오빠, 절대 방해하지 않을게요. 언니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게요.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네?”
“하아. 알았어. 같이 가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하린이와 하연이를 집에 보낼 수 없어 택시를 타고 함께 을지로입구로 향했다.
“먼저 들어가서 자리 잡고 있어. 나는 10분 후에 들어갈게.”
“네.”
하린이와 하연이를 XXX커피 전문점에 먼저 들여보내고 잠시 주위를 서성이다 3시 정각에 들어갔다.
낮 시간인데도 유명 커피 전문점이라 그런지 테이블이 절반 넘게 차 있었다. 약속 장소인 2층으로 올라가 좌우를 훑었다.
검은색 치마 정장을 입은 은하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고등학교 때 모습 그대로로 나처럼 은하도 바뀐 게 없었다.
하린이와 하연이는 테이블 다섯 개 떨어진 오른쪽 구석에서 눈만 돌려 나와 은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도 안 변했다. 올라오는 순간 바로 알아봤어.”
“너는 더 예뻐졌네.”
“고마워.”
가벼운 인사가 끝나자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숫기는 없지만, 바보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도 할 짓이 아니라서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마실래?”
“커피.”
“따뜻한 거?”
“응.”
“기다려. 금방 사올게.”
자리에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가 따뜻한 커피 두 잔을 사서 올라왔다. 커피 전문점에 커피를 마시러 온 적은 없었지만, 아르바이트는 해봐서 커피도 사 오지 못할 만큼 얼빵하진 않았다.
“학교는 다닐 만해?”
“아직 잘 모르겠어. 그냥 다니는 거지 뭐.”
“나는 네가 문과를 선택할 줄 알았어. 그런데 가상현실 온라인게임 학과를 택한 거 보고 깜짝 놀랐어. 넌 게임하고는 담쌓고 살았잖아.”
“나도 변해보고 싶었어. 평생 얌전한 샌님으로 살 순 없잖아.”
“좋은 생각이야. 혼자보다는 많은 사람과 어울리며 사는 게 좋아. 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잘할 거야.”
“그래야지.”
은하도 내가 사람들 만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만나라고 조언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상현실 온라인게임 학과에 간 건 많은 사람을 만나 소통하며 살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순전히 팔 때문으로 팔을 다치지 않았다면 훨씬 조용한 학과를 갔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