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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104.
“하연이에게 준비한 자료 보내라고 해. 이은택에게도 이은수가 정이슬을 노린다는 걸 알려주고, 정이슬에게는 이은수가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알려줘. 진흙탕의 개싸움처럼 이전투구로 몰아가야 해.”
“하아. 알았어.”
“하린아, 괴롭겠지만, 어쩔 수 없어. 알지?”
“응.”
세라를 이용해 꿈으로 이은수와 이은택, 정이슬을 괴롭히며 사이를 틀어지게 하려던 계획은 당분간 보류였다.
교활한 세라에게 그 일을 시켰다간 나를 골탕 먹이려고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할 수도 있었고, 정반대로 일을 몰아갈 수도 있었다.
최악엔 내 위치와 지위도 모두 까발릴 수 있어 세라를 완벽하게 통제할 때까진 원래 계획인 Plan A로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오빠. 세라 말이에요.」
「어.」
「아무래도 지하 감옥에 가둬야 할 것 같은데요.」
「왜?」
「제가 자는 척하자 밤새 마법 족쇄를 풀려고 방안을 이 잡듯이 뒤졌어요. 지하 감옥에 가둬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네요.」
「알았어.」
하린이와 밤새 연무장에서 땀을 빼고 돌아와 씻고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자 하연이가 귓속말을 해왔다.
세라는 매우 교활했지만, 나이가 어린 탓인지 아니면 주변에 떠받드는 사람만 있어서 그런 것인지 참을성이 많이 부족해 첫날부터 탈출을 시도했다.
어쩌면 첫날이 경비가 가장 느슨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었고, 내가 영지 인물 간파로 자신의 성격을 파악했다는 걸 꿈에도 몰라 그럴 수도 있었다.
어쨌든 도망칠 생각이 확실한 만큼 하연이의 말대로 지하 감옥에 감금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 마법 족쇄를 끊고 도망칠지 알 수 없었다.
“세라.”
“네, 영주님.”
“나랑 어디 좀 가자.”
“아침도 안 먹고요?”
“급히 갈 데가 있어.”
“알았어요. 그런데 이대로 가나요? 신발도 없고, 옷도 잠옷인데요?”
“괜찮아. 멀리 가는 거 아니니까.”
영지에는 일반적인 범죄를 저질렀을 때 구금하는 경비대 감옥과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되는 사람을 구금할 때 사용하는 영주성 지하 감옥이 있었다.
세라를 데리고 영주성 건물 지하 2층에 있는 감옥으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지하로 내려가자 처음에는 뭔가 보여주려는 것인 줄 알고 좋아했다.
그러다 두꺼운 철창이 있는 지하 감옥에 들어가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차리고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깨끗이 청소해서 지내기에 불편하지 않을 거야.”
“갑자기 왜 이러세요?”
“알잖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이유를 설명해주세요.”
“밤새 마법 족쇄를 풀려고 했지?”
“아니요. 그런 적 없어요.”
“어두컴컴한 침실을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돌아다니며 마법 족쇄를 풀 수 있는 게 있는지 찾아다니는 모습을 하연이가 밤새워 지켜봤어.”
“그건 목말라서 그런 것이지 절대 족쇄를 풀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세라.”
“네, 영주님.”
“우리가 바보로 보여?”
“아니요.”
“그런데 왜 계속 속이려고 해?”
“그건...”
“말해.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들어줄 테니까.”
살짝 고민하던 세라가 마음을 정했는지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며 나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저는 서큐버스에요. 그것도 인간들이 가장 미워하고 증오하는 릴리트의 딸이죠. 그런데 제가 어떻게 영주님 말을 믿고 따르겠어요. 언제 죽일지 모르는데. 그래서 도망치려 했어요. 제가 잘못한 건가요?”
“아니.”
“그럼 풀어주세요.”
“그렇게는 안 돼.”
“왜요?”
“네가 필요하니까.”
“구해줬다고 마음대로 이용해도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목에 마법 족쇄를 채워놓고 그런 생각한 적이 없다? 그게 말이 되나요?”
“믿을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거야. 믿음이 생기면 풀어줄 생각이었어.”
“손발을 묶어 놓고 믿음이 생기길 바란다? 재미있는 논리네요. 아주 기발해요.”
세라 말이 맞았다. 목에 족쇄를 채워놓고 믿음이 생기길 바라는 건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겠다고 하는 짓과 같은 짓이었다.
그리고 세라의 행동도 잘못된 것이 없었다. 내가 세라 처지였어도 도망치기 위해 사력을 다했을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 종족도 다른 인간이 잘해보자고 했다고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나는 바보 멍청이라고 이마에 써 붙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의심하는 게 정상으로 세라가 잘못한 게 아니라 얌전히 있길 바란 내가 이상한 것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뭐라 할 말이 없다.”
“잘못을 인정했으면 놓아주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나는 네가 필요해. 꼭. 그래서 놓아줄 수 없어.”
“그렇게 필요한 존재라면 영주님 옆에 있어도 안전하다는 믿음을 주세요. 그러면 도망치지 않을게요.”
“어떻게 하면 믿음을 줄 수 있는데?”
“족쇄부터 풀어주세요. 그래야 없던 믿음이라도 생기죠.”
“풀어주면 도망갈 수도 있잖아?”
“영주님이 저를 믿지 못하는 거나 제가 영주님을 믿지 못하는 거나 결국 같은 거예요. 그러니 영주님이 먼저 저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셔야죠. 그래야 저도 믿고 따르죠.”
“맞는 말이야. 그러나 네가 지금 하는 말은 달아나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해.”
“먼저 손을 내밀진 않겠다는 말이군요?”
“그런 말은 한 적 없어.”
“말은 안 했어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잖아요. 아무래도 영주님과 저는 가까워지긴 틀린 것 같네요.”
“영원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방법을 찾으면 세상에서 가장 믿는 사람이 될 수도 있어. 어떤 방법이 서로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으니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자. 들어가.”
“정말 이기적이네요. 자기 편한 대로만 생각하고.”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이기적이야.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누구나 다 그래.”
“그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그래도 조금 더한 사람도 있고, 조금 덜한 사람도 있다는 거 잊지 마세요. 그중에서도 영주님은 아주 많이 더하다는 것도요.”
“명심할게.”
세라를 철창에 데리고 들어가 벽에 달린 강철 족쇄에 손발을 묶었다. 힘과 마나를 제어해 주는 마법 도구는 아니었지만, 쇠고랑 두께가 세라 팔뚝보다 두꺼워 힘으로 끊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무게도 상당해 힘이 제어된 세라는 팔을 드는 것도 어려웠고, 길이도 1m 정도에 불과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눕지도 못하고 종일 서 있어야 하나요? 제가 영주님을 죽이려고 했나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하나요? 이건 너무 하잖아요.”
“내일 중으로 강철 족쇄와 쇠사슬을 바꿀 거야. 그때 누울 수 있게 해줄게.”
“차가운 맨바닥에 누우라고요?”
“푹신한 이불도 줄 거고, 작은 화장실도 만들어 줄 거야. 불편해도 하루만 참아.”
“우리 영주님 이기적이긴 해도 마음씨는 나쁘지 않은 것 같네요. 고마워요. 진심으로요.”
“점심때 다시 올게. 대신 가기 전에 피 좀 빨고 가자.”
“네에?”
피를 빤다는 말에 세라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제는 잠들었을 때 피를 빨아 피를 빨렸다는 사실을 몰랐다.
입을 벌리자 날카로운 송곳니가 길게 자라났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반전에 세라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송곳니를 바라봤다.
잠시 눈을 마주친 후 무표정한 얼굴로 쇠고랑을 찬 하얀 팔을 끌어당겨 이빨을 박았다.
아그작
“아아악. 당신 뭐야? 뱀파이어야?”
“아니. 사람이야.”
“사람이 왜 피를 빨아. 그것도 송곳니가 길게 자라나서.”
“피 빤 다음에 알려줄게.”
“안 돼. 지금 나 죽이려는 거지? 잘못 했어요? 말 잘 들을 게요. 영주님. 다시는 반항하지 않을게요. 도망칠 생각도 안 할게요. 살려주세요.”
꿀꺽꿀꺽
“으으윽.”
- 서큐버스 세라의 피를 마셨습니다. 피의 갈증이 해소됐습니다.
- 서큐버스 세라가 상태 이상 효과 무기력증에 빠졌습니다. 무기력증으로 인해 60분 동안 모든 능력이 50% 감소합니다. 60분간 치유 스킬을 사용해도 생명력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 30분간 공격속도와 이동속도 10% 증가합니다. 30분간 서큐버스 세라의 공격력 10%를 차용합니다.
이름 : 세라
나이 : 10,133살
종족 : 서큐버스
계급 : 릴리트 성의 공주
직책 : 유배된 죄인
특기 : 환몽
충성심 : 10
성격 : 교활하고, 고집 세고, 4차원적임
레벨 : 60(보스)
상태 : 모모 레오 남작의 포로(마법 족쇄로 인해 모든 능력 봉쇄)
흡혈로 인한 무기력증(1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 50% 감소)
어제와 마찬가지로 피를 빨자 호감도가 5나 올랐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앞으로 18번만 피를 빨면 충성심 100이었다.
그러나 50까지는 무난히 오르겠지만, 50이 넘어가면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고, 80부터는 찔끔찔끔 오를 것이다.
그리고 호감도와 충성도는 주식(株式)처럼 오르락내리락해서 올랐다고 마음 놓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든 내려갈 수 있어 100을 찍기 전에는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
“대체 정체가 뭐에요?”
“아틸라 제국 남작.”
“그거 말고요.”
“반쪽짜리 뱀파이어.”
“뱀파이어면 뱀파이어지 반쪽짜리는 뭐예요?”
“뱀파이어 백작 베르니스타의 심장을 먹었거든. 그래서 그래.”
“절 구한 게 제 피가 필요해서 그런 건가요?”
“아니.”
“그런데 왜 피를 빠세요?”
“그건 심장이 매일 피를 원해서 그래.”
“피를 몽땅 빨아 먹진 않겠죠?”
“죽기 싫어?”
“세상에 죽고 싶은 생명도 있나요?”
“죽기 싫은데 왜 그렇게 당당해?”
“제가 필요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죽이진 않겠죠. 그리고 영주님이 말할 때 적대감이 없었어요. 그런 분이 저를 죽일 리 없잖아요.”
“교활하기는.”
“여자는 다 교활해요. 영주님 주변에 있는 여자들도 모두 그래요.”
인간은 착하고, 예의 바른 인성과 악독하고, 파괴적인 인성까지 모두 다 가지고 있었다.
교활함 역시 그중 하나로 세라와 하린, 하연이만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도 갖고 있고 세상 사람 모두 갖고 있었다.
세상에 나쁜 물건은 없었다.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다고 물건을 쓰는 사람에 따라 용도를 달리했다.
간사하고 꾀가 많다는 뜻인 교활 역시 이와 같아 쓰는 사람에 따라 주변 사람을 이롭게 하기도 했고, 괴롭히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하린이와 하연이가 갖고 있는 교활함은 나를 이롭게 하는 축복이었지 불행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