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의 시대-103화 (10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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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103.

“왜 깨어나는 않는 거지?”

“오빠,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읽어보셨죠?”

“읽진 않았지만, 어떤 내용인지는 알아. 수십 년 동안 TV와 케이블 방송에서도 수백만 번 재탕한 만화영화니까.”

“공주가 어떻게 깨어났죠?”

“왕자의 키스. 설마 그걸 믿는 건 아니겠지?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차이콥스키가 발레 작품으로 쓴 거야. 설화나 전설이 아니야.”

“제가 몇 살인데 그걸 믿겠어요. 저 다리 밑에서 아이 주워온다고 믿는 그런 나이 아니에요. 그 다리는 아니라도 결국 다리 밑에서 받은 건 사실이지만요.”

“.......”

“오빠 또 당황했다. 오빠하고는 정말 농담도 못 하겠네요.”

같은 다리는 아니라도 다리 밑은 맞다고 19살 처제가 천연덕스럽게 말하는데 맞장구를 치며 깔깔 웃으란 말인가?

그럴만한 숫기도 없었지만, 있다고 해도 미성년자인 처제 앞에서 그런 짓을 한다면 변태이자 미친놈이었다.

이럴 땐 가만히 입 닫고 있는 게 상책으로 분위기를 전환하겠다고 입을 열면 전환이 아니라 지옥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적당히 좀 해.”

“내가 너무 심했어?”

“그게 19살짜리가 할 농담이야?”

“여자가 다리 사이로 아기 낳는 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

“하아. 말을 말아야지.”

“히히히히.”

하린이도 하연이를 감당하지 못했다. 싸우면 언니인 하린이가 당연히 이기지만, 조금 야한 농담을 했다고 머리끄덩이 잡고 싸울 수도 없었다.

그리고 하린이가 정말 화나면 영악한 하연이는 바로 꼬리를 내리고 하린이에게 달라붙어 애교를 부렸다.

엄청난 고단수로 나만큼이나 유들유들한 면이 없는 하린이는 앞에선 이기고 뒤에선 언제나 하연이에게 지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오빠, 세라의 피를 빠세요. 그럼 깨어날지도 몰라요.”

“흡혈한다고 깨어나겠어?”

“깨어나지 않아도 호감도를 올리는 거니까 손해날 건 없잖아요.”

“나도 하연이와 같은 생각이야. 한 번 해봐.”

“알았어.”

하린이와 하연이가 생각대로 세라의 가녀린 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마족이라 그런지 조금은 색다른 체취가 코를 자극했다.

그러나 하린이와 하연이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한 척 길게 자라난 송곳니를 팔 깊숙이 밀어 넣었다.

꿀꺽꿀꺽

- 서큐버스 세라의 피를 마셨습니다. 피의 갈증이 해소됐습니다.

- 서큐버스 세라가 상태 이상 효과 무기력증에 빠졌습니다. 무기력증으로 인해 60분 동안 모든 능력이 50% 감소합니다. 60분간 치유 스킬을 사용해도 생명력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 30분간 공격속도와 이동속도 10% 증가합니다. 30분간 서큐버스 세라의 공격력 10%를 차용합니다.

“흐응.”

“정신이 들어?”

“여기는 어디죠? 제가 왜 이곳에 있는 거죠? 엄마는 어디 계세요?”

“이곳은 아틸라 제국이야. 내가 환몽의 신전에 갇혀있던 너를 구해 내 영지로 데려왔어.”

“아!”

“이제 기억나?”

“네.”

“무슨 일로 환몽의 신전에 갇히게 된 거야?”

“그건... 정말 이상하네요.”

“뭐가?”

“처음 보는데 왜 당신이 친근하게 느껴지죠? 이해가 잘 안 되네요.”

팔에서 입을 떼자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세라가 잠에서 깨어났다. 반짝이는 커다란 눈으로 좌우를 둘러본 세라는 낯선 곳에 있다는 두려움에 잠시 머뭇거리다 마구 질문을 해댔다.

그러다 나와 몇 마디 나눈 후 한참을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눈으로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알 수 없는 친근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나에게 피를 빨린 여성은 호감도가 오른다. 그러나 얼마나 오르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린이와 하연이는 NPC가 아니라서 충성심과 호감도가 표시되지 않았고, 레이첼은 충성심이 100이라 더 오를 게 없었다.

아라치는 나를 백마 타고 나타난 왕자로 생각하는 순간 충성심이 80까지 단번에 치솟았다.

이후 어느 날은 1, 어느 날은 1도 안 되게 충성심이 오르며 기복이 매우 심했다. 이는 흡혈로 인한 효과와 나에 대한 환상이 동시에 일어나서 그런 것으로 한 번 흡혈할 때마다 호감도가 얼마나 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세나를 통해 얼마가 오르는지 확인했다. 충성심 0이었던 세라는 피를 빨리자 정확히 5가 올랐다.

충성심이 높아질수록 수치는 떨어지는 게 확실해 계속 5가 오르지는 않겠지만, 호감도 0인 상대에게 얼마가 오르는지 알았다는 것만도 큰 수확이었다.

문제는 5가 오른 세라가 보인 행동이었다. 어둠의 종족인 뱀파이어와 서큐버스가 만나 조금은 색다른 모습을 보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겨우 호감도 5로 친근감을 표시할 순 없었다.

인간을 기준으로 호감도 5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처음 본 사람에게 누구나 느끼는 수치였다.

적어도 30~40은 되어야 가끔 친근한 표시를 하고, 60~70은 되어야 살갑게 지냈다. 다시 말해 세라는 의도적으로 친한 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엄마는 제가 최고의 서큐버스가 되길 원했어요. 하지만 저는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그 짓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엄마 말을 듣지 않았어요. 100년 넘게 그 일로 다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인간 세상으로 몰래 도망쳤어요. 잡혀오면 또 도망가고 또 도망가고 그런 일이 반복되자 화가 난 엄마가 환몽의 신전에 저를 가둔 거예요.”

“겨우 그딴 일로 사랑하는 딸을 1만 년이나 가둬?”

“딸이 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에요. 100명도 넘어요. 제가 막내라 언니들보다 좀 더 관심을 받은 것뿐이에요. 1만 년이 지났으니 그사이 못해도 몇십 명은 낳았을 테고, 저는 완전히 잊힌 존재가 됐을 거예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어요. 돌아가 봐야 알아보지도 못할 테고, 알아본다고 해도 또다시 싸우다 유배되겠죠. 이번에는 유배가 아니라 죽일지도 모르죠.”

“갈 곳 없어?”

“없어요.”

“그럼 나랑 같이 있을래?”

“그래도 돼요?”

성격이 4차원적이라고 나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서큐버스 사회에서 최고의 미덕은 남자의 정액을 최대한 많이 모아 인큐버스에게 공급하는 것이었다.

우리 기준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서큐버스 사회에선 그게 진리이자 보편타당한 행동이었다.

그런 사회적 통념을 세라가 부정했다. 그래서 성격이 4차원적이라고 나온 것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4차원이 아니라 서큐버스 사회에서 생각하는 4차원이었다.

“대신 내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해. 그럴 수 있어?”

“엄마가 시켰던 그 일만 아니면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다른 사람에 꿈에 나타나 괴롭히는 건 괜찮고?”

“그 짓만 아니면 돼요. 그리고 제 특기가 그건데 그거 아니면 영주님께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밥값은 해야죠.”

“좋아. 대신 나뿐만 아니라 하린이와 하연이 말도 잘 들어야 해. 그럴 수 있지?”

“네.”

“오늘은 피곤할 테니까 일찍 쉬어.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내일 아침 먹고 의논하자. 그리고 방이 남는 게 없어서 당분간 하연이와 같은 방 써야 해. 괜찮지?”

“하연님이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그럼 쉬어.”

“영주님도 쉬세요. 하린님도 쉬시고요.”

당분간 세라가 지낼 방은 하연이 방으로 3층에는 레이첼과 아이린, 아만다, 에밀리, 아만다가 함께 쓰는 방을 빼면 방이 3개밖에 없어 내줄 방이 없었다.

그리고 방이 있어도 혼자 둘 수 없었다. 말 몇 마디에 서큐버스를 믿을 만큼 나는 대인배가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짓을 하는지 24시간 감시할 감시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연이와 방을 같이 쓰게 했다.

귓속말로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라는 말을 하연이에게 남긴 후 하린이와 함께 집무실로 이동했다.

“자신에 대해 말했지만, 어느 것 하나 명확한 게 없어. 그리고 딸이 도망쳤다고 1만 년이나 가둬두는 엄마도 없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나도 그렇게 느꼈어.”

“그런데 왜 믿는 것처럼 행동했어?”

“그래야 안심하고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실천에 옮길 테니까.”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한 거야?”

“어.”

“그러면 하연이하고 같이 두면 안 되잖아?”

“혼자 두면 숨어서 감시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마법 족쇄를 자르고 달아날 수도 있고.”

세라는 엄마 릴리트와의 관계부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모두 말했다. 그리고 내가 시키는 건 정액을 뺏어오는 일만 아니면 뭐든지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말하는 중간중간 아주 미세하지만,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고, 재빠르게 좌우를 흘끔대는 등 머릿속으론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친한 척하는 것도 눈에 보였고, 무엇보다 성격에 교활하다는 대목이 있어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었다.

“릴리트와의 관계도 사실일까?”

“하연이가 알아온 내용도 있고, 캠비온과 보스 타야르가 한 말도 있어 크게 틀리진 않을 거야. 네가 말한 것처럼 가둬둔 건 다른 이유일 가능성이 크겠지.”

“무슨 이유일까? 혹시 릴리트의 보물을 훔쳐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러면 우리를 찾아올 수도 있잖아.”

“릴리트가 아끼는 보물을 훔쳤다면 1만 년이나 가둬두진 않았겠지. 그리고 인간의 땅을 유배지로 선택하지도 않았을 거야. 아주 심하게 눈 밖에 나는 짓을 해서 미움을 샀거나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겠지.”

“그럼 우리에게 피해올 일은 없겠네?”

“1만 년이나 버려뒀다면 영원히 잊힌 거라고 봐야겠지.”

하린이가 걱정하는 것처럼 세라가 릴리트의 보물을 훔쳐 유배됐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딸을 1만 년이나 가둬둘 만큼 중요한 보물이었다면 가둬두는 게 아니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되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릴리트가 세라를 되찾기 위해 나타날 가능성도 매우 낮았다. 인간이 자식을 바라보는 관점과 수많은 자식을 낳고 지금도 낳고 있는 릴리트가 바라보는 관점은 전혀 달랐다.

인간에게 자식은 자신의 분신이자 꿈과 미래, 희망이지만, 릴리트에게 자식은 힘을 키우기 위한 수단이자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세라의 말처럼 1만 년이나 관심을 끊었다면 잊혔거나 유배되는 순간 버려진 것이었다.

“그럼 왜 환몽의 신전을 만들어 가둬둔 거지?”

“내 생각에는 단순히 가둬둔 게 아니라 벌을 준 것 같아.”

“어떻게?”

“릴리트는 몽마잖아. 꿈을 통해 세라를 벌주었겠지.”

“그건 너무 잔인하다.”

“예상일 뿐이야.”

“그런데 순순히 우리말을 들을까?”

“아닐 거야.”

“그러면 꿈에서 이은수와 이은택을 괴롭히는 일을 할 수 없잖아?”

“그렇겠지.”

“이거야말로 계륵보다 못한 존재네?”

“흡혈 스킬에 기대해봐야지.”

0이었던 충성심이 5까지 오른 것으로 보아 흡혈 효과가 사람보다 탁월할 가능성이 컸다.

이것을 이용해 세라를 완벽한 내 사람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호감도, 충성심이 100을 찍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충성심 100과 99는 1 차이밖에 없지만, 중대한 갈림길에 서면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였다.

그 1%가 배신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세라는 100이 되기 전에는 절대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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