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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마수(魔手)
93. 검은 마수(魔手)
“문자와숑! 문자와숑!”
“다현이에게서 문자 왔어. 전화 걸고 올게.”
“점심 먹을 때 되지 않았어?”
“어? 그렇게 됐네.”
“밥 먹고 하자.”
“알았어. 하연아, 점심 먹고 하자.”
“응, 언니. 오빠, 밥 맛있게 드세요.”
“하연이도 많이 먹어.”
“네.”
캡슐 밖으로 나온 하린이가 아침에 먹다 남은 고등어조림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히어로걸즈 리더 다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분간 학교 안 나오는 게 좋겠다.”
“왜?”
“영웅관과 강의실 주변에 처음 보는 남자애들이 3~4명씩 조를 이뤄 50명도 넘게 어슬렁거리고 있어. 그리고 너와 오빠에 대한 이상한 소문도 어제부터 돌기 시작했어.”
“무슨 이상한 소문?”
“고등학교 때 이 남자 저 남자 만나 놀았다는 얘기와 선생님들과도 안 좋은 소문이 났다는 얘기야.”
“오빠는?”
“군대에서 사고치고 불명예 제대했다는 소문이야.”
“누가 퍼뜨리는지 모르지?”
“내가 너무 황당해서 누가 그런 소리 하고 다니는 건지 알아보려고 아이들에게 일일이 물어봤어. 화장실에서 우연히 들었다는 여학생이 다섯 명,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는 남학생도 세 명 있었어. 그리고 친구의 친구가 하린이 너 하고 같은 학교에 다녀서 그런 소문을 들었다고 말한 애도 두 명이나 있었어. 모두 한 다리 이상 건너서 들었다고 했어.”
“철저하게 카더라 통신이네?”
“이은택의 공작대 놈들이 자연스럽게 접근해서 누가 그런지 모르게 퍼뜨리는 거야.”
“알려줘서 고마워.”
“하린아. 그 소문 믿는 사람 학과 아이들 중에 절반도 안 돼. 그러니 너무 낙담하지 마.”
“알았어.”
“그런데 소문도 문제지만, 오빠와 네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놈들이 더 문제야. 학교 오면 공격할 게 분명해. 내가 연락할 때까지 절대 학교 나오면 안 돼. 알았지”
“오빠랑 휴학하기로 했어.”
“휴학?”
“응.”
“하아... 차라리 그게 낫겠다. 그런데 1년 휴학한다고 달라질까?”
“현실 시간 1년이면 게임 시간으로 4년이니까 뭔가 변화가 있겠지.”
“마림 길드가 무너져도 학교 다니기 쉽지 않을 거야. 소문도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거고.”
“안 되면 다른 학교 가거나 유학 가면 되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른 학교에 가도 마림 길드 공작대가 퍼뜨린 소문이 꼬리표처럼 따라와 괴롭힐 것이다.
해외로 나가기 전에는 어디를 가나 따라붙을 소문으로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도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속물들은 살을 더해 우리를 헐뜯을 것이었다.
이런 속물들을 근절할 방법은 쓰레기 입을 놀릴 수 없게 강력한 힘을 갖추는 것밖에 없었다.
결국, 성공해야 한다는 뜻으로 성공하지 못하면 평생 거짓 소문에 주눅 들어 살게 될 수도 있었다.
“정말 어이없다. 선배들 잘못한 거 말했다고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이런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우리야 그만두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지만, 너희는 학교 그만두면 언론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야. 짜증 나도 참고 다녀.”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슨 일 있어?”
“이은택이 민지와 수영이를 불러내려고 계속 사람을 보내고 있어. 팬으로서 가볍게 만나는 거면 좋겠지만, 지금까지 이은택이 한 짓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은 없어. 놈은 민지와 수영이를 망쳐놓으려는 거야.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슬이가 있는데도 그런단 말이야?”
“이은택 같은 놈들은 여자를 서너 명은 거느려야 자기 체면이 선다고 생각하는 속물 부류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자신을 왕으로 생각하는 놈이니까.”
“완전히 미친놈이네.”
“그런 놈 한둘 아니야. 셀 수 없이 많아.”
민지와 수영이는 히어로걸스에서 가장 돋보이는 멤버로 얼굴도 예뻤고, 키도 크고, 몸매도 좋아 남자 팬들이 가장 많았다.
이은택은 한 번 찍은 목표물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손에 넣는 난봉꾼이자 아이돌 킬러로 놈이 민지와 수영이를 찍었다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다.
“너희는 SUN 엔터테인먼트 간판스타잖아. 이은택이 찝쩍댄다고 나쁜 일이 일어나겠어?”
“작년이라면 어림도 없는 얘기지. 하지만 올해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 동생 그룹인 핑크 루비가 낸 첫 번째 앨범이 대박을 쳤거든. 그리고 우리는 쪽박은 아니지만, 왕창 밀려났고. 당장 며칠 후부터 스케줄도 없어. 우리가 하던 걸 핑크 루비가 몽땅 가져갔거든. 이제 우리는 찬밥신세나 다름없어. 기획사 사장이 값이 나갈 때 팔아치우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게 된 거지.”
“겨우 한 번 주춤한 거잖아. 그리고 일본과 중국, 동남아 시장도 있고.”
“우리는 전원이 한국인이야. 핑크 레이디는 일본인 2명, 중국인 2명, 태국인 1명으로 구성됐고. 그리고 우리보다 나이도 어리고. 경쟁력을 따져도 상대가 안 돼.”
올해 2월에 데뷔한 핑크 루비는 16살부터 18살까지 나이 어린 소녀들로 구성된 11인조 다국적 여성 아이돌 그룹으로 최고의 작곡가, 최고의 프로듀서, 최고의 안무팀을 붙이는 등 과감한 투자로 단번에 정상을 밟았다.
그렇게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었던 배경은 히어로걸스가 큰 성공을 거두며 작년 한 해 엄청난 돈을 벌어 들여서였다.
결국, 1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죽어라 일해 회사 돈만 벌어준 셈으로 히어로걸스 멘버들은 심한 허탈감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부하면 되잖아?”
“우리 뜻대로 되는 게 아니야. 회유해서 안 되면 얼마든지 자리를 만들 수 있어. 중요한 손님이라고 끌고 나가 방에 밀어 넣고 문을 걸어 잠글 수도 있고, 약 탄 술을 먹일 수도 있어. 그렇다고 기획사 사장과 이은택을 고소할 수도 없어. 그러면 이 바닥에서 영원히 쫓겨나.”
“다른 기획사 가면 되잖아?”
“지금 나가면 무일푼으로 쫓겨나. 앞으로 5년은 더 버텨야 우리도 돈을 만질 수 있어. 그리고 지금 나가면 계약 위반으로 걸려. 소송에 지면 엄청난 위약금을 물게 될 거야.”
“큰일이네.”
“더 큰 일은 기획사 사장이 아직 쓸모가 있다고 판단해도 이은택의 뒤에 있는 마림 재단을 두려워해서 민지와 수영이를 넘겨줄 가능성이 커. 그러면 다음은 연아와 아리, 진아, 선아, 주하, 내가 되겠지. 민지와 수영을 손에 쥐면 우리 모두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나쁜 새끼.”
“그런 놈이 한둘인 줄 알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 세상 참 지저분해.”
히어로걸스 소속사 SUN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선 알아줄 만큼 큰 연예 기획사지만, 마림 재단과 비교하면 티라노사우루스 렉스 앞에 선 작은 도마뱀 수준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마림 재단은 ㈜판타스틱의 투자자로 마림 재단이 히어로걸스를 The Age of Hero에서 퇴출시키라고 ㈜판타스틱에 압력을 넣으면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SUN 엔터테인먼트는 The Age of Hero 협찬사로 등록되어 있지만, 모양새만 그럴 뿐 실상은 The Age of Hero가 절대 갑이었고, SUN 엔터테인먼트는 바닥에 납작 업드려 눈치를 봐야 하는 절대 을이었다.
대다수 연예인이 SUN 엔터테인먼트와 같은 처지로 The Age of Hero는 전 세계 3억5,000만 명이 실시간으로 즐기는 게임으로 다국적 기업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게임 업계의 황제이자 초거대 육식 공룡이었다.
여기서 퇴출당하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어 연예인이라면 ㈜판타스틱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이은택이 마림 재단을 등에 업고 민지와 수영을 내놓으라고 압박하면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일도 아니네. 어떻게 할 거야?”
“고민 중인데 뾰족한 방법이 없어.”
“도와주고 싶은데 그럴 힘이 없다. 미안해 다현아.”
“아니야. 얘기 들어준 것만 해도 고마워. 하소연할 데도 없어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어. 너에게 얘기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마음이 가벼워졌다면 다행이다. 그런데 그걸로 해결되지 않으니 그게 걱정이네.”
“방법을 찾아봐야지.”
“견딜 수 없으면 언제든 찾아와. 해줄 건 없지만, 재워주고 먹여줄 순 있어.”
“고마워. 그 말만으로도 정말 힘이 된다.”
“농담으로 한 얘기 아니야. 진짜야.”
“알아. 너 의리 있는 거.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는 거야.”
우리만 이은택과 정이슬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히어로걸스 멤버들도 위협을 받고 있었다.
스타인 히어로걸스가 괴롭힘을 당할 정도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까지 합치면 몇 명이나 둘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다현이네와 성우만 괴롭힘을 당하는 게 아닐 거야. 수십 명? 어쩌면 수백 명이 우리처럼 학교를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고 있을 거야.”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고 이은택과 정이슬이 주위 사람을 다 망치고 있네.”
“그런 행동이 자신도 망친다는 걸 이제는 알 때도 됐는데...”
“알아도 어쩔 수 없을 거야. 인제 와서 멈춘다고 했던 짓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받아줄 사람도 없으니까. 그리고 멈출 수 없을 만큼 깊이 빠져들어서 이제는 누군가를 괴롭히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을 거야.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깊이 중독됐을 테니까.”
술과 담배, 섹스, 마약만 중독되는 것이 아니었다. 거짓말, 협박, 사기, 갈취, 폭력 등 사람을 괴롭히는 일도 중독성이 매우 강해 한 번 빠져들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런 일이 마약만큼 중독성이 강한 건 누군가를 괴롭히고 짓밟을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와 자기가 뭐라도 된 것 같은 우월감 때문이었다.
조직폭력에 가담한 사람이 쉽게 손을 씻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볼 때 보이는 두려움이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해 자아도취에 빠져 계속 폭력을 행사하게 됐다.
“하린아, 밥부터 먹자.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거 아니니까.”
“알았어. 그런데 밥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
“그럴수록 잘 먹어야 해. 배고프면 머리도 안 돌아가.”
“아는데 잘 될지 모르겠어.”
“노력하면 돼.”
고민이 많자 밥이 모래알처럼 느껴져 넘어가질 않았다. 그럴수록 잘 먹어야 한다는 걸 알아 평소보다 두 배나 많은 밥을 먹었다.
부모가 나를 버리고 떠나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그러나 평소보다 더 많이 먹으려고 애썼다. 나를 버린 부모에게 잘사는 모습을 보여야 복수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억지로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이때 생긴 버릇인지 군대에 있을 때도 선임, 후임들이 다음 날 빡센 훈련과 사역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할 때도 나는 꾸역꾸역 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가 버틸 수 있는 건 건강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모래알 같은 밥을 억지로 삼켰다.
♩♪♩♪♬~ ♩♪♬♩♪~
억지로 두 그릇을 비우고 숟가락을 내려놓자 하린이 휴대폰이 울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전화벨이 울리자 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부터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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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