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8 / 0310 ----------------------------------------------
세상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
68.
1년에 100억을 벌 수 있다는 하린이의 말에 둔기로 뒤통수를 오지게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
애초 목표는 6개월 동안 3억2,364만 원 벌어 원룸 전세를 더 해 작은 아파트를 사는 것이었다.
이것만 해도 맨드레이크 던전을 발견하기 전까지 꿈꾸지도 못한 일로 영지를 발전시켜 돈을 버는 건 빨라도 현실 시간으로 1년은 걸린다고 생각해 원룸을 벗어나는 건 내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잘 됐을 때 얘기로 외부 침입, 내부 반란, 몬스터 준동 등으로 영지가 박살이 나면 빈털터리가 되어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엄청난 금액을 벌 수 있다고 하자 계산이 안 돼 머릿속이 멍해졌다.
“오빠 이제 재벌이야. 아무것도 없다고,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기죽지 않아도 돼. 누구도 오빠를 무시할 수 없어.”
“내가 재벌이라고?”
“일 년에 100억 벌면 재벌이지. 1조 원 벌어야 재벌인 줄 알았어?”
“그게 아니라 내가 재벌이 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래.”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줄 알아. 아니야. 그 자리를 차지하면 그 사람이 왕후장상이야. 정해진 씨 같은 건 없어.”
“흐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말은 억압받는 하층민이 토해내는 피맺힌 절규로, 쉽게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을 말했다.
이 벽은 21세기 대한민국에도 존재했다. 태어날 때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느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려운 자수성가를 해야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지 못하면 평생 고생만 하다가 가난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놈은 평생 놀고먹어도 돈과 권력, 미인이 줄을 이었다.
현대 사회는 돈이 돈을 벌어주는 사회로 부자들은 임대업만으로도 많은 돈을 벌었고, 고급 정보도 아주 손쉽게 접근할 수 있어 이를 이용해 수십, 수백억의 부동산 차익을 남겼다.
하지만 가난한 하층민은 1만 원도 안 되는 시급을 받기 위해 온종일 땀 흘려 일해야 했고, 비정규직이란 이름으로 정규직의 몇 배나 많은 노동과 반도 안 되는 월급을 받아야 했다.
그런 불합리한 사회에서 사는 내가 바늘구멍을 뚫은 낙타가 되기 직전이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내가 왕후장상의 씨가 되기 직전이었다.
“오빠, 부자 됐다고 나 버리지 않을 거지?”
“그런 일 없어.”
“남자들 돈 많이 벌면 여자도 많아진다고 하는데?”
“나는 절대 그러지 않아. 이 여자 저 여자 집적대는 스타일이 아니야. 너도 알잖아.”
“지금이야 그렇지만, 나이 먹으면 달라질 수도 있잖아. 내가 아기 낳고 몸매가 망가질 수도 있고, 질릴 수도 있고, 나보다 더 사랑하는 여자가 생길 수도 있고.”
“내가 여자를 밝히는 남자였으면 널 지금껏 내버려뒀겠니?”
“사람은 변한다고 했어. 오빠도 변할 수 있어.”
“안 변할 거야. 죽어도 안 변할 거야. 나는 우리 부모 같은 사람은 절대 안 될 거야. 그런 일이 있다면 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야.”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마. 겁나게 왜 그런 소리를 해?”
“그만큼 나는 변하지 않는다는 거야.”
나는 절대 부모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수백만 번도 더 다짐했다. 내 안에 부모에게 물려받은 못된 기질이 있을까 봐 그런 것으로 부모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매일 밤 다짐했다.
그러나 내일 일은 아무도 몰랐다. 멀쩡한 사람이 죽고, 건물이 무너지고, 비행기가 떨어지는 게 세상이었다.
하린이에겐 그런 일은 절대 없다고 했지만, 나 역시 그럴 수 있었다. 내가 무서워하는 것도, 하린이가 무서워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오빠, NPC하고 노는 거 허락해줄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여자 생기는 것보다 그게 나을 것 같아서.”
“그런 일 없다고 했잖아.”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거야. 오빠는 믿지만, 남자의 성욕은 믿을 수 없어. 그리고 오빠는 성주라 시녀들하고 놀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잖아. 현실에서 그랬다가는 집안 쑥대밭 돼. 그것보다는 NPC와 노는 게 백번 낫잖아.”
“그만해. 한 번만 더 하면 화낸다.”
“나 심각하게 얘기하는 거야. 깊게 생각해봐.”
“흐음...”
남자는 세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말과 주먹과 고추 세 가지 중 하나만 잘못 써도 패가망신을 당했다.
TV에도 종종 나오는 일로 입을 잘못 놀렸다가 고위 공직자에서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하고, 그것도 모자라 온 국민이 손가락질하는 대상이 됐다.
정치인만 그런 게 아니라 연예인도 마찬가지로 주먹질과 성폭행으로 최고의 자리에서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부자가 될지도 알 수 없고, 된다고 해도 내가 변한다는 보장도 없어. 미리 걱정할 일이 아니야.”
“알아. 그런데도 걱정돼.”
“하린아. 우리 평생 변하지 말고 지금처럼 살자. 그게 내가 네게 바라는 유일한 바람이야.”
“정말?”
“그래.”
“고마워 오빠. 나 많이 불안했는데, 오빠 얘기 들으니까 좀 안심이 돼. 사랑해!!!”
“나도 사랑해!”
내가 엄청난 부자가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해진 하린이 전에 없던 생각을 했다.
일시적으로 마음이 불안해 그런 것으로 소유욕이 강한 하린이의 성격으로 볼 때 진심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NPC와의 사랑을 불륜이라 생각하지 않는 유저도 많았고, 게임 속에서 유저끼리 육체관계를 맺는 것도 꺼리지 않는 유저도 많아 하린이의 생각이 즉흥적이라고만 생각할 순 없었다.
그렇게라도 영원히 나를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으로 하린이의 마음이 많이 불안하다는 증거였다.
‘부자가 되면 난 어떻게 변할까? 부모처럼 변하는 건 아닐까? 지금처럼 하린이 한 명만 끝까지 사랑하는 순수한 남자로 남아 있을까? 부자가 되면 모든 게 좋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은가 보네. 하아. 사는 게 정말 어렵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다음 달 1일과 2일 1·2학년 다 함께 가는 MT 겸 학과 사냥 있습니다. 장소는 파우드론 황금 어금니 오크 부족입니다. 자는 건 야영할 테니 각자 야영 도구 챙겨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 명도 빠지지 말고 참석해주십시오. 엊그저께 단합대회 때 10명이나 빠져 선배들 심기가 많이 불편합니다.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 학과의 단합된 모습을 위해 모두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가 군대야? 회사야? 일이 있으면 못 갈 수도 있는 거지 빠지면 안 된다는 말이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해?”
“학교도 엄연한 단체 생활이야. 함께 움직여야 할 때는 따라줘야 해.”
“웃기고 있네. 그렇게 단체 생활 좋아하면 군대나 가.”
“누가 상명하복을 요구한다는 거야?”
“선배들 심기가 나쁘다며? 그래서 다 참석해야 한다고 했잖아. 그 말이 선배들 시키는 대로 따르라는 말이잖아.”
“첫 번째 모임은 얼굴을 익히는 중요한 자리야. 그래서 선배님들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 나오셨어. 그런데 우리는 10명이나 빠졌어. 기분 나쁜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일방적으로 날짜 잡고 나오라고 강요해 놓고 빠졌다고 화내는 게 바로 군대식이야.”
“단체가 움직이는 거야. 일일이 물어볼 수 없어서 그랬던 것뿐이야.”
“그런 핑계 TV에서 정치인들이 자주 쓰는 거란 건 알고 있지? 이래서 어쩔 수 없고, 저래서 어쩔 수 없고, 매일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대지. 동의를 구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날짜를 급하게 잡지도 않았을 거고, 빠졌다고 지랄 떨지도 않았겠지.”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애들 얘기 들어보니까 선배들이 그날 제대로 군기 잡았다고 하던데, 그게 얼굴 익히러 나온 거야? 기합주고 모욕 주는 게 그게 선후배의 애정이야?”
“장난이 조금 심했지만, 네가 생각하는 정도는 아니야. 그리고 모욕을 느낀 사람도 없었어.”
“웃기고 있네. 술 잔뜩 먹여놓고 길거리에서 남자애들 웃통 벗기고, 여자애들 엎드려 뻗치게 한 게 네가 말하는 조금 심한 거야? 짧은 치마 입은 여자애들 팬티 다 보이게 해놓고 그게 장난이야? 너는 애들 옷 다 벗기고 길거리에 세워두는 걸 장난이라고 하니?”
“그건...”
“너 계속 선배들 대변인 노릇 할 거면 과대표 그만둬. 너 그러라고 애들이 과대표 시켜준 거 아니야. 우리를 위해 일하라고 시켜준 거야. 몰랐어?”
“나는 중간에서 양쪽의 입장 차이를 말한 거지, 누굴 편들려고 한 거 아니야. 나는 우리 학과가 XX대학교 최고의 학과가 될 수 있도록 선후배 사이를 돈독히 하고 싶을 뿐이야. 다른 생각은 없어.”
“하여간 입만 산 것들이 말은 뻔지르르하게 잘해. 알맹이는 하나도 없으면서. 안 그래?”
“그건 네가 나를 오해해서...”
“헛소리 그만해. 듣고 싶지도 않아. 나는 그런 짜증 나는 자리에는 절대 안 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딴소리하지 마.”
합동 단합대회가 있은 며칠 후 1학년 대표 최수민이 심각한 얼굴로 MT 일정을 말하며 한 명도 빠져선 안 된다고 분위기를 험악하게 몰아갔다.
그러자 하린이가 참지 못하고 조목조목 따졌고, 최수민도 선배들을 옹호하며 모두 참석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형필이 형, 형은 오실 거죠.”
“아니. 못 가.”
“형은 특전사 부사관 출신이잖아요.”
“그게 MT하고 무슨 상관이야?”
“형은 일반병도 아니고 특전사 직업군인을 갔다 오셨잖아요. 그럼 이해하셔야죠.”
“여기가 군대라면 당연히 이해해야지. 하지만 이곳은 공부하는 대학교지 군대가 아니야. 학생이 학생을 강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자유롭게 공부하고 토론하는 곳이야.”
“2학년 선배들이 1학년을 강압하거나 몰아붙이지 않아요.”
“아니라면 다행이고. 어쨌든 나도 일이 있어서 참석 못 할 것 같다. 미안하다.”
“형필이 형!”
“우리도 그날 행사 잡혀 있어서 못 갈 것 같아. 분명히 말했어. 못 간다고. 뒤에 가서 딴소리하지 마.”
“너희까지 왜 그래?”
“일 있어서 못 간다는데 너희까지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하린이하고 친해서 일 있다고 하는 거잖아.”
“제정신 아니구나. 혼자 별의별 상상을 다 하네.”
“그럼 스케줄 표 보여줘.”
“네가 뭔데 우리한테 스케줄 표를 보여 달라는 거야? 네가 우리 매니저라도 돼? 기획사 사장이야?”
“그건 아니지만...”
“최수민, 내말 잘 들어. 너 학과 애들 도와주는 도우미지 왕 아니야. 도우미면 도우미답게 굴어. 지금 네 모습 대단한 감투라도 쓴 것 같아. 역겨워.”
“.......”
하린이가 MT에 가지 않겠다고 하자 최수민이 나를 걸고넘어졌다. 확실한 이유 없이 MT에 빠지는 건 옳은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럴 만한 사유가 있다면 MT에 꼭 참석할 이유도 없었다.
MT는 Membership Training으로 친목 도모를 말했다. 집안에 일이 있거나 나와 맞지 않는다면 가지 않아도 되는 친목행사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학은 Masigo Tohagi... 마시고 토하려 MT를 가기도 했고, Midnight Technic라는 용어를 쓰며 아주 더럽고 추잡한 짓을 하기 위해 MT를 계획하기도 했다.
극히 일부분으로 건전하게 놀다 오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탈선의 장소가 되기도 했고, 선후배가 같이 가면 후배를 길들이는 모임이 되기도 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