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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 파탈(Femme Fatale)
50.
단합대회가 시작되기 직전 호프집에 도착한 히어로걸스 멤버들이 최수민과 남자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가장 구석에 앉은 우리 곁에 와서 앉았다.
하린을 눈여겨봤는지 리더 다현이 스스럼없이 말을 붙였고, 5분도 안 돼 아주 친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린과 히어로걸스가 수다를 떨자 눈치 빠른 사내놈들이 내 곁으로 와 술을 권하며 친한 척 말을 걸었다.
하린과 히어로걸스에게 마음이 있어 친한 척한다는 걸 알았지만, 모르는 척 얘기를 들어줬다.
맥주로 시작한 단합대회는 위스키와 보드카가 추가되자 단합대회라는 취지가 무색하게 술판으로 변질됐다.
술판이 벌어진 지 1시간도 안 돼 했던 얘기 또 하고 했던 얘기 또 하는 남학생, 헤어진 남자 친구를 생각하며 우는 여학생,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곯아떨어진 아이까지 테이블마다 1~2명은 술에 취해 주정을 부렸다.
“언제 일어날 거야?”
“다현이네 30분 후에 일어나야 한다고 했어. 우리도 그때 일어나자.”
“알았어.”
히어로걸스 멤버들과 의기투합했는지 하린이도 얼굴이 빨개지도록 맥주를 마셨다. 취하도록 마신 건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하 수상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내가 이토록 불안해하는 건 정이슬이 독사 같은 눈으로 연신 하린이를 훔쳐보기 때문이었다.
정이슬은 술이 무척 센지 위스키와 보드카를 원액으로 20잔 넘게 마시고도 멀쩡한 모습으로 주변 남자들... 추종자들을 자기 입맛대로 컨트롤하며 하린이의 상태까지 살폈다.
그러나 하린이는 히어로걸스와 수다를 떠느라 정이슬이 자신을 감시하는 걸 알지 못했다.
이것만 봐도 하린이는 정이슬의 적수가 못 됐다. 열 장정이 도둑 한 명을 못 잡는다고 했다.
그만큼 방어하는 것이 공격보다 어렵다는 뜻으로 정이슬은 주변 남자들을 관리하며 호시탐탐 하린이를 노리는 여유마저 보여줬다.
그렇다고 하린이가 정이슬보다 못났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린이는 여전히 이슬이를 감싸려고 노력했다.
하린이가 정이슬을 정말 미워했다면 학교와 가족에게 정이슬이 한 짓을 모두 밝혔을 것이다.
그러나 2년 넘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그러지 않았다. 그건 아직도 정이슬을 걱정하며, 친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이슬은 달랐다. 자신이 방탕하게 된 것도, 사갈같이 변한 것도 모두 하린이 탓으로 돌리며 적개심을 불태웠다.
한쪽은 싸울 마음이 없는데 한쪽은 죽자고 달려들면 승패는 이미 판가름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슬아, 너 내게 왜 이래? 내가 뭘 잘못 했다고 그러는 거야? 잘못한 게 있으면 말을 해야 내가 고칠 거 아니야.”
“고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잘못한 게 있냐고 물어본 거야.”
“아니 없어.”
“그런데 왜 다른 놈을 만나.”
“다른 놈을 만나다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나랑 사귀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귈 수 있냐고 말한 거잖아. 무슨 뜻인지 몰라?”
“내가 언제 너랑 사귀었어?”
“나랑 밥도 먹고, 술도 마셨잖아.”
“친구와 밥 먹고, 술 마시면 사귀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내가 너랑 안기를 했어? 뽀뽀를 했어? 네가 같이 밥 먹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밥 먹어준 거고, 차 마시고 싶다고 계속 전화해서 차 마셔줬어. 그리고 술 한 잔만 마시자고 노래를 불러서 술도 마셔줬어. 그런데 내가 잘못한 거야? 네 부탁을 들어준 게 잘못이야?”
“.......”
정이슬의 날카로운 반론에 할 말을 잃은 최수민이 고개를 떨어뜨리자 단합대회에 참석한 학생들이 싸늘한 눈으로 최수민을 힐난하듯 바라봤다.
성우와 다정히 말하는 정이슬의 모습에 화가 난 최수민이 연거푸 술을 마시다 취해 사건을 일으켰다. 그러나 돌아온 건 최수민을 비난하는 눈초리뿐이었다.
손잡았다고 뽀뽀했다고 애인이 되는 세상이 아니었다. 심지어 밤새 떡을 쳐도 다음 날 남남처럼 행동하는 세상이었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남녀가 같이 밥 먹고, 차 마시고, 술 마시면 애인이자 연인이었다.
그러나 서양 신식(?) 사랑에 빠르게 휩쓸려간 대한민국의 청춘남녀는 더는 그런 고리타분한 조선 시대적 행동을 애인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서로 사귄다고 말하고, 주위 사람에게 알리고, 기념 파티도 하는 등 촌극을 벌이고, 같이 여행도 다녀와야 사귀는 것이었다.
이러고도 한 달도 안 돼 성격 차이 또는 섹스 차이 등으로 헤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이건 약과였다. 신혼여행 갈 때는 죽고 못 사는 사이처럼 닭살을 떨다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공항에서 등 돌리고 가는 커플도 한둘이 아니었다.
이혼조차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회에서 밥 먹고, 차 마시고, 술 마신 것으로 자기 여자라고 우기는 건 돌 맞을 짓이었다.
“수민아. 나도 네가 좋아. 친구로서. 그래서 내가 밥 먹자고 했을 때 싫다고 거절하지 않았고, 차 마시자고 했을 때도 웃으며 마셨어. 술 마실 때도 기분 좋게 건배하며 마셨어. 너도 알지?”
“어. 알아.”
“넌 내가 앞으로도 계속 친구였으면 좋겠어?”
“... 어.”
“나도 그래. 그래 줄 거지?”
“미안해. 내가 취해서 그만... 다시는 안 그럴게.”
“역시 너는 좋은 친구야. 사과할 줄 아는 멋진 친구. 이래서 난 네가 정말 좋아.”
“고마워!”
“앞으로도 내 곁에 있어 줘. 영원히.”
“알았어.”
“얘들아. 오늘 수민이가 술이 좀 과해서 그랬어. 그리고 날 좋아해서 그런 거야. 이해해줄 거지?”
“그럼. 싸운 것도 아닌데 그 정도야 당연히 이해해야지. 안 그래?”
“맞아. 술 마시고 치고받고 싸워도 다음 날 웃으면 인사하게 친구잖아. 수민아, 괜찮아. 나는 더한 짓도 했어. 신경 쓰지 마.”
“모두 이해하는 분위기니까 우리 다 같이 건배하자. 모두 잔 들어. 나와 수민이 그리고 XX대학교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 학과 친구들의 영원한 우정을 위하여 건배!”
“건배!!”
「아주 영리하네. 내칠 줄 알았는데, 감싸 안네.」
「이슬이는 남자를 내치지 않아. 꼼짝 못 하게 사로잡아 호위병처럼 이용할 뿐이야. 그래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아.」
「쉽지 않은 상대네.」
「이슬이 아이큐 나보다 높아. 중학교 2학년 때 152 나왔어.」
「아이큐 148 넘으면 멘사 회원 아니야?」
「맞아. 그리고 멘사 회원이기도 해.」
「천재네.」
「전체 부수석에 우리 학과 수석이 이슬이야. 천재 맞아.」
멘사(Mensa)는 인구대비 상위 2%의 지능지수(표준편차 24 기준, IQ 148 이상)만 가입할 수 있는 국제단체로 우리나라도 2015년 기준 2,000명가량이 가입되어 있었다.
세상을 바꿀 천재까지는 아니었지만, 일반인 기준으로 천재에 속하는 수재들로 멘사 회원인 것만 해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정이슬보다 조금 낮다고 했지? 아이큐가 얼만데 그래?」
「148.」
「148이나 152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절대 그렇지 않아. 엄청난 차이야. 이슬이가 수석이고, 내가 부수석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4면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야.」
「헉! 주변에 천재투성이네. 갑자기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야.」
「오빠는 얼만데 그래?」
「85.」
「정말?」
「농담이야.」
「놀랐잖아. 바보인 줄 알고.」
「크크크크.」
초등학교 때 검사한 내 아이큐는 139였다. 상위 5% 안에 드는 아이큐로 절대 낮은 수치가 아니었지만, 하린과 정이슬에 비하면 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검사한 아이큐라 지금도 그때처럼 머리가 좋다는 보장도 없었다.
지능지수 검사는 사람마다 조금 다르게 나왔고, 머리가 깨는 시기도 달라 초등학교 때 공부를 못했다고 중·고등학교 때도 못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반대로 어릴 적 머리가 좋다고 나이 들어서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해와 암기 등 여러 분야로 나뉘어 국어는 잘해도 수학은 못하는 영재도 있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걸 다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린아, 우리 그만 가야 해. 스케줄이 있어.”
“나도 일어나야 해. 같이 나가자.”
“좀 더 있다가 가. 오빠 술 좋아하는 것 같은데?”
“오빠 술 안 좋아해. 나 때문에 앉아 있는 거야.”
“그래? 술 잘 마셔서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싫어도 분위기 맞춰주는 성격이거든. 그래서 그렇게 보이는 거야.”
“형필 오빠 정말 착하다. 나 착한 남자 좋아하는데. 내가 먼저 알았으면 사귀는 건데 아깝다.”
“연애금지라고 하지 않았어?”
“몰래 사귀면 되지.”
“오빠 좋아해 주는 건 고마운데, 건들지는 마라. 내가 평생 데리고 살 남자니까.”
“결혼까지 생각한 거야?”
“아까 말했잖아. 끝까지 간다고.”
“진짜 멋지다. 나도 너 같은 사랑하고 싶어.”
“멋진 거 알았으면 전화번호나 불러. 심심할 때 전화하게.”
“다른 사람 알려주면 안 돼.”
“걱정하지 마. 오빠에게도 안 알려줄 거야.”
“오빠에겐 알려줘도 되는데. 그래야 나랑 몰래 만나지.”
“죽고 싶어?”
“히히히. 농담이야.”
하린이는 사교성이 정말 좋았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과도 금세 친해졌다. 그리고 남자보다 여자가 더 좋아했다.
머리도 짧고, 옷도 남자처럼 입자 보이시한 매력이 철철 흘러넘쳐 남학생들보다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더 많았다.
그러나 나 때문에 남학생들이 곁에 다가오지 않는 것이지 내가 없었다면 들러붙을 놈들이 한 트럭도 넘었다.
“우리 이제 가야 해. 스케줄 있어.”
“이제 시작인데 벌써 가면 어떻게 해?”
“조금만 더 놀다가.”
“미안해. 더 늦으면 스케줄 펑크 나. 내일모레 봐.”
“안 돼! 가지 마.”
“다현아! 민지야! 수영아! 연아야! 아리야! 진아야! 선아야! 주하야! 너희 가면 우린 어쩌란 말이냐?”
술에 취한 남학생들이 히어로걸스에 매달리는 사이 하린과 함께 조용히 술집을 빠져나왔다.
성우에게 간다고 말하려 했지만, 인사불성으로 취해 탁자에 머리를 처박고 있어 그냥 조용해 나왔다.
「오빠, 빨리 귀환하자. 이슬이 오면 시끄러워.」
「알았어.」
정이슬이 우리가 사라진 걸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가게를 빠져나와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 귀환 주문을 사용해 영지로 돌아왔다.
정이슬과 싸우는 게 겁나서 도망치듯 영지로 돌아 온 건 아니었다. 무서워서 피한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 것으로 일부러 싸우려고 달려들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하린이가 입으로는 정이슬을 미워한다고 말해도 마음에는 여전히 정이슬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어 최대한 충돌을 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하린이를 지금처럼 괴롭히는 수준이 아니라 상처 주려 한다면 그때는 절대 가만있지 않았다.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 곳인지, 남자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군대에서 받은 교육 중에는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것만 있진 않았다.
아주 더럽고 추잡한 것도 있었다. 정이슬이 하린을 망가뜨리려 한다면 그걸 하나도 빠짐없이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더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나이가 어려 부모에게 유모를 빼앗기고, 사랑을 빼앗겼지만, 이젠 절대 뺏기지 않을 것이다.
죽으면 죽었지 하린이를 절대 뺏기는 일은 절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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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