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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 파탈(Femme Fatale)
48. 팜므 파탈(Femme Fatale)
“안녕하세요. 과대표 최수민입니다. 오늘 수업 끝나고 XX호프에서 5시부터 1학년 단합대회 있습니다. 점심시간 전까지 회비로 은화 3개씩 내주시기 바랍니다. 빠지면 벌금 은화 5개입니다. 히어로걸스도 모두 참석하니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해주십시오.”
정이슬의 가짜 남자친구이자 1학년 과대표인 최수민이 강의가 시작되기 전 단합대회 시간과 회비를 공지했다.
현실 시간으로 오늘이 첫날 강의인데, 첫날부터 단합대회를... 물론 게임 안에서지만... 한다는 게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며칠 후에 하든 오늘 하든 한 번은 해야 할 일이었고, 처음에는 무조건 참석할 생각이라 불만은 없었다.
재미있는 건 공지사항을 전달하기 전 최수민이 자기 직책과 이름을 먼저 말한 것이었다.
처음이라 학생들에게 자기 이름을 기억시키기 위해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자신을 돋보이거나 상대에게 자기 직책을 알려 강압하기 위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말할 때마다 ‘X과장이 말합니다.’ 이렇게 자기 이름과 직책을 말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자존감이 떨어져서 그럴 수도 있고, 과시욕이 지나쳐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몹시 나쁜 버릇으로 그렇게 해야 만족감이나 심리적 안정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듣는 상대는 얼마나 못났으면 저렇게 말할까 생각하며 비웃음이 가득한 눈으로 X과장을 바라봤다.
“오빠, 시원한 녹차 마셔.”
“고마워.”
“하린아, 내 거는 없어?”
“내가 왜 네 녹차까지 사야 해? 네 돈 주고 사 먹어.”
“녹차 한 잔에 인심 너무 야박한 거 아니야?”
“어제 오빠랑 종일 사냥해서 먹은 게 하급 녹슨 칼 한 자루와 구멍 난 신발 한 켤레야. 너 같으면 그거 벌고 녹차 사겠냐?”
“크크크크.”
“지금 비웃은 거야?”
“미안해. 갑자기 웃음이 나와서.”
“비웃은 거 맞지?”
“그게...”
“비웃은 죄로 아이스커피 한 잔 사와.”
“커피 한 잔에 얼만 줄이나 알고 하는 소리야?”
“은화 10개.”
“6개월밖에 안 된 초보자에게 10만 원짜리 커피 사 오라고 하는 거 너무한 거 아니야?”
“누가 비웃으래?”
“그거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서 그런 거지 일부러 작심하고 그런 거 아니야.”
“잘못 했으면 남자답게 사과하고 커피 사와. 구질구질하게 변명하는 남자 여자들이 싫어해.”
“여자들이 싫어한다고?”
“그래.”
“알았어. 그래도 커피는 너무 비싸. 다른 거 사오면 안 될까?”
“계속 쪼잔하게 굴래? 빨리 사와.”
“우씌.”
조잔하다는 말에 풀이 팍 죽은 성우가 고개를 푹 숙이고 강의실 문을 열고 매점으로 향했다.
유저만 이용하는 시설에는 현실과 다름없는 현대식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이런 시설에는 NPC가 들어올 수 없었다.
중세 시대를 사는 NPC에게 대학과 백화점, 아울렛, 공공기관, 회사의 모습은 낯설다 못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공간으로 정신적 세계와 문화 모두 상충해 출입이 완전히 통제됐고, NPC들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게임이라 가능한 일로 아틸라 제국의 수도 크라쿠푸스와 10대 도시, 파르톤 제국 수도 파르티나와 3대 도시, 6개 왕국 연합 수도, 아말 왕국의 수도만 이런 일이 허용됐다.
그러나 음식 재료는 모두 아틸라 제국에서 공급하는 것만 사용해야 했고, 물가 역시 제국 물가를 따라야 해 현실과 가격 차이가 아주 심했다.
“비웃은 것도 아닌데 비싼 커피는 왜 사 오라고 했어?”
“계집애처럼 징징대서 일부러 그런 거야. 좀 고쳐 놔야겠어. 안 그러면 평생 여자 친구 못 사귀어.”
“여자 친구가 없어 외로워서 그런 거야. 착한 애니까 말로 해도 잘 알아들을 거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좀 심했어. 남자가 진중함이 있어야지 촉새처럼 나대면 누가 좋아하겠어. 저런 건 고쳐줘야지 놔두면 안 돼.”
“이제 겨우 스무 살이야. 군대 갔다 오면 나아질 거야.”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어. 지금도 많이 늦었어.”
하린이 성우를 조금 심하게 다그치는 것도 있었지만, 성우가 어린아이처럼 징징댄 것도 사실이었다.
성우는 착하고 싹싹하고 붙임성도 좋았다. 그러나 말이 지나치게 많고, 감정 기복이 심하고, 나약한 것이 흠이었다.
이런 모습은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성격으로 외모가 특출하거나, 돈이 많지 않다면 여자 사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성우만 단점이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매우 소극적인 성격으로 하린이 없었다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학교생활을 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 단점이 있었다. 세상에 단점 없는 사람은 없었다. 단점보다는 장점을 봐주려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형, 직업은 정했어요?”
“어.”
“뭐로 하셨는데요?”
“... 기사.”
“방패 쓰세요?”
“어, 원형 방패하고 아밍 소드.”
“저는 투 핸드 소드인 소드 브레이커를 사용해 전사를 택했어요. 형도 저처럼 소드 브레이커 쓰세요. 살점이 뚝뚝 떨어지는 게 손맛이 기가 막혀요.”
날이 톱니처럼 소드 브레이커(Sword breaker)는 상대를 베는 동시에 살까지 뜯어내는 잔인한 검으로 강도도 무척 뛰어나 얇은 검은 톱니에 끼여 부러지는 일도 잦았다.
이 때문에 몬스터를 잔인하게 죽이고 싶어 하는 일부 유저들이 소드 브레이커를 사용했다.
성격이 온순한 줄로만 알았는데, 소드 브레이커를 무기로 쓴다는 걸 알게 되자 내면에는 짐승 같은 잔인함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었다. 겉은 양처럼 온순해 보여도 속에는 잔인하고 난폭한 야수가 웅크리고 있는 게 사람이었다.
“너는 뭐로 했어? 궁수 했어?”
“남 일에 관심 그만 갖고, 네 일이나 잘해. 징징대지 말고.”
“우씌.”
「정이슬 왔다.」
「저 얼굴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 거야. 과를 옮기든지 해야지 도저히 못 참겠네.」
「옮겨도 쫓아올 거야. 참고 이겨내야 해. 그러지 못하면 평생 도망 다녀야 해.」
「알았어.」
성우와 하린이 아웅다웅 다투는 사이 정이슬이 강의실에 들어왔다. 최수민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지만, 정이슬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하린이가 어디 있는지 찾았다.
하린을 발견한 정이슬은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혀로 입술을 핥으며 눈에 사악한 웃음을 가득 품고 입꼬리가 올라간 채 다가왔다.
“하린아, 안녕.”
“너만 안 보면 안녕할 것 같다. 이제 그만 좀 아는 체하면 안 되겠니?”
“그러지 마. 우리는 자매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잖아.”
“너 말 잘했다. 가까운 사이였지. 그 말은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잖아. 안 그래?”
“나는 여전히 하은 언니와 하연이보다 너랑 더 가깝다고 생각해. 너는 아닌지 모르겠지만.”
“너랑 얘기하면 벽에 얘기하는 것보다 더 답답하다. 얘기하면 엉뚱한 얘기만 하니... 하아. 이제 인사했으니까 네 남자 친구에게나 가봐. 저러다 목 빠지겠다.”
“남자 친구 아니라니까.”
“붙어 다니는데 남자 친구가 아니라고?”
“그냥 친구야. 좋은 친구.”
“그러세요. 네 마음대로 하세요.”
“네 남자 친구 옆에 있는 멋진 남자는 누구야? 소개 좀 해줘. 딱 네 이상형이야.”
“순진한 애 건들지 말고 그만 가라.”
“설마 둘 다 좋아하는 거야? 양다리?”
“꺼지라고 했다.”
“정말이구나. 와우! 원더풀!!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내 친구 하린이가 대학생이 되더니 한 번에 두 명과 사귀네. 역시 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야. 아주 멋져!”
정이슬은 오늘도 어김없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하린이를 자극했다. 그러다 눈을 크게 뜨고 정신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있는 성우를 발견했다.
맹수는 수많은 먹잇감 중에 가장 잡기 쉬운 먹잇감을 단번에 알아봤다. 맹수인 정이슬은 성우의 눈을 보자 단번에 알아차렸다. 손만 뻗으면 잡아먹을 수 있은 손쉬운 먹잇감이라는 것을.
“안녕. 하린이 친구 정이슬이야. 만나서 반가워.”
“나.나는 기,김성우야. 반가워.”
“너 하린이 사귀는 거야?”
“아.아니야. 하린이 남자 친구는 형필이 형이야. 나는 그냥 친구야. 친구!”
“그렇구나. 내가 오해했네. 하린아 미안해. 마음에 드는 이상형을 발견해서 내가 좀 흥분했어. 이해해줄 거지?”
“무슨 수작이야?”
“성우야, 우리 점심 같이 먹을래?”
“점심?”
“내가 너무 직설적이었나? 내가 누굴 좋아하면 참지를 못하는 성격이라. 이해해줘. 호호호호.”
하린의 말을 싹 무시한 정이슬이 눈을 성우에게 맞추고 먹이 사냥에 들어갔다. 순진한 성우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좋아한다는 말에 정신이 혼미해져 정이슬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정말 내가 마음에 들어?”
“그렇다니까. 너는 어때? 내가 싫어?”
“아.아니. 조.좋아.”
“그럼 같이 점심 먹는 거지.”
“어.어.어.”
“우리 같이 앉자. 점심 뭐 먹을지 얘기해야지.”
“아.알았어.”
초식동물은 절대 맹수를 이길 수 없었다. 특히, 성우처럼 연약한 먹잇감은 사나운 맹수 정이슬이 찍는 순간 끝이었다.
정이슬을 따라가는 성우를 말리고 싶었지만, 녀석의 눈을 보자 마음을 접었다. 녀석의 눈은 술에 취한 것처럼 반쯤 풀어헤쳐진 모습으로 이미 정이슬의 포로가 된 지 오래였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오직 정이슬의 말만 들렸다.
「어떻게 하지?」
「방법 없어. 이슬이가 찍어서 안 넘어간 남자 없어.」
「크게 상처받을 텐데?」
「알아. 그래도 어떻게 할 방법 없어. 말리면 이슬이에게 더 빠져들 거야. 그리고 우리가 말리면 이슬이가 성우를 놓아주지 않을 거고. 지금은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야. 그래야 성우가 빠져나올 수 있어.」
「마음이 약해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아. 나도 그게 걱정이야.」
강의시간 내내 성우와 정이슬의 뒤통수만 바라봤다. 둘을 갈라놓을 방법이 있을까 고민했지만, 머리만 아플 뿐 방법이 없었다.
‘내가 성우였다면 정이슬이 내민 손을 뿌리칠 수 있었을까? 못 했을 거야. 나도 성우처럼 끌려갔을 거야.’
내가 성우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정이슬의 치명적인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을 것이다.
하린이가 내 곁에 있어 정이슬의 마력을 이겨낸 것이지, 하린이가 없었다면 나도 성우처럼 사랑의 포로가 되어 정이슬을 쫄래쫄래 따라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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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