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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시대-42화 (4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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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눈물

42.

한바탕 시끌벅적한 소동이 끝나자 하린과 나란히 로그아웃하고 나가 The Age of Hero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원래 홈페이지에는 아무것도 없어. 운영진이 자료를 제공해도 결정은 The Age of Hero 절대신 환인이 하는 거니까. 그래서 내용이 틀릴 수 있어 패치 내용을 게시하지 않아. 내가 불러주는 사이트에 들어가. 거기 가면 뼈와 살이 되는 유용한 조언이 셀 수 없이 많고, 이번에 바뀐 패치 내용도 사람들이 올려놨을 거야.”

“어딘데?”

“히어로 에브리라고 치면 나와.”

“알았어.”

“보고 있어. 나 용달차 오면 캡슐 싣고 집으로 갈게.”

“출발하면 전화해. 나가 있을 테니까.”

“응.”

하린이 불러준 히어로 에브리 사이트에 접속하자 오늘 패치한 내용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하린이가 말한 것처럼 ㈜판타스틱에서 올린 내용이 아니라 유저들이 알아낸 내용으로 업적과 평판 시스템에 관한 내용도 자세히 올라와 있었고, 새로운 아이템 물약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이전까진 생명력과 마나를 보충해주는 물약이 없어 생명력과 마나가 떨어지면 유일한 치료방법인 붕대감기로 생명력을 보충하거나 게이지가 찰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이제 상점에서 물약을 팔아 무작정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또한, 40레벨 이상 몬스터도 일정 확률로 생명력 물약과 마나 물약을 드롭해 좀 더 빠르게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점에서 파는 물약의 가격이 너무 비싸 물약 신공을 사용해 몬스터를 학살하긴 쉽지 않았다.

생명력과 마나 100을 채워주는 가장 싼 물약 값이 은화 1개였고, 300은 은화 3개, 500은 은화 5개, 1,000은 은화 10개나 해 생명력과 마나 100을 채우기 위해선 현금 1만 원을 투자해야 했다.

그리고 몬스터가 드롭하는 물약도 확률이 1,000분의 1로 아이템만큼 구하기가 어려워 돈 많은 부자가 아니면 아주 위급할 때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는 직업 시스템이었다. 그동안 궁수, 전사, 기사, 도적, 마법사 등으로 직업을 불렀지만, 본인이 임의로 설정한 것으로 유저는 직업이 없었다.

이를 보완하고자 직업 시스템이 생겼다. 직업을 선택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해 직업 훈련소에서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면 끝이었다. 그러면 직업에 맞는 스탯이 새롭게 생성됐다.

기사 직업 스탯 - 기사도 : 기사도 1당 방어력과 생명력 1% 증가

궁수 직업 스탯 - 판단력 : 판단력 1당 원거리 공격력과 시야 1% 증가

전사 직업 스탯 - 용맹 : 용맹 1당 근거리 공격력과 생명력 1% 증가

도적 직업 스탯 - 교활 : 교활 1당 은신 시간과 치명타 확률 1% 증가

마법사 직업 스탯 - 지혜 : 지혜 1당 마법 공격력과 마나 1% 증가

조련사 직업 스탯 - 언어 : 언어 1당 동물 친화력과 동물 공격력 1% 증가

마검사 직업 스탯 - 자부심 : 자부심 1당 물리 공격력과 마법 공격력 1% 증가

프라나로 근력, 순발력, 체력, 지력 스탯을 올리는 것과 달리 직업 스탯은 평판 포인트로만 올릴 수 있었다.

한 번에 두 가지 효과를 발휘하는 대신 10만 포인트 당 스탯 0.1이 올라 프라나 보다 2배나 비쌌다.

또한, 직업에 맞는 직업 스킬도 평판 관리소에서 평판 포인트로만 살 수 있었고, 가격은 50만 포인트에 달했다.

가장 주의할 점은 직업은 언제든 바꿀 수 있지만, 바꾸면 그동안 쌓은 직업 스탯과 직업 스킬이 모두 사라져 신중에 신중을 기해 직업을 선택해야 했다.

따르릉따르릉

“오빠 출발했어. 2~3분이면 도착할 거야.”

“알았어. 지금 나갈게. 조심해서 와.”

“응.”

집 앞에 나가 3분쯤 기다리자 캡슐을 실은 1.5ton 용달차가 다가왔다. 보조석에 앉아 손을 흔들던 하린이 차가 서자 문을 열고 아이처럼 폴짝 뛰어내렸다.

무릎도 성치 않은데 다치면 어쩌나 마음이 조마조마해 재빨리 다가가 손을 잡았다.

“다친다.”

“나 날다람쥐만큼 빨라.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조심해. 과신하다 다치는 거야.”

“잔소리쟁이.”

먼저 방에 있는 낡은 침대를 꺼내 건물 앞에 가져다 놨다. 뽀얗게 쌓인 먼지를 하린이 닦는 동안 용달차 기사를 도와 캡슐을 방으로 옮겼다.

왼팔이 약해 오른팔에 잔뜩 힘을 주자 팔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근력 강화를 위해 팔운동도 해야겠다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캡슐을 간신히 방에 가져다 놓았다.

며칠 전 ㈜판타스틱 소속 설치 기사들이 캡슐을 설치하는 것을 자세히 봐둬 하린의 캡슐을 설치하는 일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얼마죠?”

“벌써 냈어.”

“그런 걸 왜 네가 내. 내가 내야지.”

“이거 내 거거든.”

“그래도 나 때문에 설치한 건데 내가 내야지.”

“아니거든. 내가 오빠 옆에 착 달라붙어 있고 싶어서 한 거거든. 그러니 더는 말하지 말아 줄래?”

“알았어.”

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한 하린이 용달차 요금을 집에서 미리 지급하고 왔다. 남자가 돼서 여자 신세나 지는 내 모습이 한심했다.

그러나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해 싸우게 된다.

대신 마음속에 차곡차곡 적어놔야 한다. 그리고 열 배, 백 배, 천 배로 갚아줘야 한다. 사랑이란 보너스를 더해서.

“어휴 홀아비 냄새.”

“냄새 많이 나?”

“오빠는 이 냄새 안 느껴져?”

“건물이 오래돼서 곰팡이 냄새가 좀 나긴 하는데, 홀아비 냄새까진 아니야.”

“원래 자기 몸에 나는 냄새는 못 맡는 거야. 그리고 홀아비 냄새가 별거야. 남자 혼자 살면 나는 칙칙한 냄새가 홀아비 냄새지.”

“그런가?”

“내가 이럴 줄 알고 챙겨온 게 있지. 짜잔! 청소도구 풀 세트. 오빠는 왁스로 화장실 청소해. 나는 방과 주방 청소할게.”

“내가 해도 되는데.”

“해도 되는데 이렇게 하고 살았어? 죽고 싶어?”

“알았어.”

주먹을 흔들며 눈을 부라리는 하린을 피해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갔다. 청소를 안 하진 않았다.

깔끔한 척 유난을 떠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3일에 한번 방바닥도 닦고, 싱크대도 닦고, 화장실도 청소했다.

그러나 지은 지 20년이나 된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지 청소한 티가 나질 않고, 곰팡이 냄새만 진동했다.

새로 지은 집은 굴러다니는 쓰레기만 치워도 청소한 것처럼 깨끗했지만, 오래된 집은 아무리 쓸고 닦아도 청소한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하린이의 손이 닿자 새집처럼 깨끗하게 변했다. 누렇게 찌든 때가 덕지덕지 끼어있던 싱크대는 새로 산 것처럼 반들반들했고, 기름기가 벗겨지지 않던 가스레인지와 주변도 오성급 호텔 주방처럼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방바닥도 마찬가지로 거무칙칙한 자국까지 모조리 사라져 장판을 새로 깐 것 같았다.

“와! 끝내준다.”

“어때? 시집가도 되겠지?”

“제발 빨리 와줘. 이런 깨끗한 집은 중학교 이후 처음이야.”

“헤헤헤. 청소가 전부가 아니야. 패치 내용 보고 있어. 끝내주게 맛있는 점심 해줄게.”

“장도 봐왔어?”

“시간이 없어서 오늘은 집에 있는 반찬하고, 재료 몇 가지 가져왔어. 호박하고 두부, 감자, 양파, 버섯, 고추, 대파, 멸치 가루, 된장, 고추 가루 팍팍 넣고 된장찌개 얼큰하게 끓여줄게. 된장찌개 괜찮지?”

“최고지.”

“저녁에는 같이 시장 갔다 오자.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줄게.”

상다리가 휘어지지 않아도 됐다. 된장찌개 하나면 충분했다. 하린이가 나만을 위해 요리해준 된장찌개 하나만 있으면 산해진미도 부럽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부모와 헤어진 후 누군가 나를 위해 끓여준 된장찌개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부모와 같이 살 때 가정부 아주머니가 일주일에 한 번 된장찌개를 끓였지만, 그것도 나를 위해 만든 음식이 아니고 부모를 위해 끓인 음식이라 유모와 헤어진 이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았다.

김치찌개, 미역국, 콩나물국 등 다른 음식도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 누군가 나를 위해 만든 음식은 구경할 수 없었다.

은하가 자주 집에 놀러 와 같이 저녁을 먹었지만, 음식을 할 줄 몰라 라면을 끓여 먹거나 배달음식을 시켜먹었다.

유모는 항상 토속적인 음식을 만들어줬다. 그래야 몸에 좋다고 햄버거와 피자, 콜라는 절대 먹이지 않고 정성이 가득 들어간 음식으로 어린 내 배를 채워줬다. 그 덕분에 키도 무럭무럭 자라고 잔병치레 한 번 없이 잘 클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랑으로 감싸줘 성격 더러운 부모 밑에서도 삐뚤어지지 않고 바르게 클 수 있었다.

이만큼이라도 인간답게 살 수 있었던 건 모두 유모 덕분으로 언젠가는 꼭 찾아 100만분의 1이라도 은혜를 갚고 싶었다.

탁탁탁탁

경쾌한 도마 소리를 들으며 하린이의 캡슐을 구경했다. 남는 것을 가져왔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인지 최고급형인 내 것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제조 일자도 올해 8월로 산지 잘해야 2~3개월밖에 안 된 새것이었다. 자기 것을 가져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의심은 갔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주워 담기엔 너무 늦었고, 말한다고 들을 성격도 아니었다.

그리고 하린이가 쓰던 것이든, 남는 것이든 상관없었다. 내 옆에 하린이가 있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보글보글

된장찌개가 끓자 얼큰한 냄새가 방안에 가득 퍼졌다. 아침도 라면 하나로 때워 몹시 출출했는데, 냄새를 맡자 뱃속 거지들이 난동을 부렸다.

“냄새 죽인다.”

“많이 배고팠지?”

“응.”

“다 됐어. 상 펴.”

“아싸.”

캡슐 두 대를 벽으로 바짝 붙이자 간신히 두 사람이 앉아 밥 먹을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상을 펴자 집에서 가져와 냉장고에 넣어놨던 네모난 반찬통 10개를 꺼내 상에 올렸다. 그것만으로 작은 상이 가득 찼다.

뚜껑을 열자 잘 익은 배추김치와 열무김치, 아삭아삭한 오이지무침과 오이소박이, 고소한 콩나물무침, 야채를 가득 넣은 계란말이, 짭조름한 소고기장조림, 살짝 단맛을 가미한 멸치꽈리볶음, 계란을 입힌 동그랑땡,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알감자조림이 어서 먹어달라고 손짓했다.

“맛있어 보이지?”

“어. 정말 맛있겠다.”

“이거 우리 엄마가 다 한 거야. 먹어봐. 기가 막혀.”

하린이 내민 젓가락을 집어 하나씩 하나씩 맛을 봤다. 단언하건대 어릴적 유모가 만들어준 음식 이후 이렇게 맛있는 반찬은 처음이었다.

군대 밥도 예전과 많이 달라져 맛있다고 좋아하는 병사가 있었다. 그러나 유모의 손맛에 익숙해진 탓인지 내 입에는 그저 그랬다.

라면 역시 마찬가지로 죽지 않기 위해 먹는 것이지 먹을 때마다 모래를 씹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유모의 손맛이 DNA 속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다면 있을 수 없는 일로 유모가 떠난 지 16년 만에 드디어 내 입맛을 사로잡는 임자를 만났다.

“살면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 유모 이후 처음이야.”

“정말?”

“하늘에 맹세할 수 있어. 정말 맛있어.”

“떨어지지 않게 매일 매일 가져올게.”

“나야 좋지만, 그러면 어머님이 고생이잖아.”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이모, 삼촌 모두 우리 집에서 반찬 가져다 먹어. 오빠 한 명 추가한다고 표시도 안 나.”

“고맙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쯤이야. 헤헷. 오빠 된장찌개 놓게 깔 것 좀 줘.”

“여기.”

쌀과 그릇, 수저, 냄비까지 챙겨온 하린이 곱슬곱슬한 하얀 쌀밥을 공기에 듬뿍 담아줬다.

밥그릇과 수저, 냄비가 몇 개 있냐고 물어봤을 때 너무 창피해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이사 오며 밥공기 하나, 수저 한 쌍, 냄비도 라면 끓여 먹는 작은 양은 냄비 하나, 물컵 하나 이렇게만 샀다.

근검절약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집에 사람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짓이었다.

그만큼 혼자 사는데 익숙하고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만, 밥그릇과 수저 가격을 생각하면 궁상도 이런 궁상이 없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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