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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눈물
41. 소녀의 눈물
“곡물 가격은 왜 알아본 거야?”
“겨울작물 재배할 때까지 먹을 식량이 부족해서.”
“선물로 받은 2,000골드 있으니까 사면 되잖아?”
“300ton은 있어야 하는데 가져갈 수가 없어.”
“300ton? 인구가 몇 명이나 되는데?”
“3,000명 조금 넘어.”
“3,000명밖에 안 되는데, 300ton이나 필요해?”
“현대와 달리 먹을 게 많지 않아서 그래. 밀, 보리, 감자 이런 것밖에 없어. 고기도 없고, 반찬이 없으니 밥이라도 많이 먹어야 일하지.”
“식도락의 즐거움을 전혀 모르겠네?”
“그렇지.”
조선 시대 농민들도 식도락의 즐거움이 뭔지도 모른 채 하루 두 끼만 배불리 먹어도 원이 없겠다는 노래만 부르다가 죽었다.
대한민국도 먹을 게 넘쳐난 지 이제 겨우 40년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보릿고개를 걱정했다.
그러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주머니에 돈이 돌자 외식 열풍이 불며 먹거리가 다양해졌지, 그 전까지는 아이스깨끼 하나만 있어도 감지덕지했다.
“나 100kg짜리 마법 가방 3개 있어. 오빠가 7개 사면 한 번에 1,000kg씩 옮길 수 있잖아. 그럼 한 달이면 30ton이니까 작게나마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렇게라도 하는 게 좋겠다.”
30ton으론 많이 부족했지만, 며칠 내로 주변 숲을 공략할 계획이라 그곳에서 식량을 조달하면 크게 부족하진 않았다.
그리고 하린이 영지에 합류한 이상 대나무 숲의 자이언트 판다를 처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아 그곳에서도 식량을 조달할 수 있었다.
“이제 영지로 가자.”
“잠시만. 이거 먹고 가.”
“뭔데?”
“멀미약.”
“이런 것도 있었어?”
“1년 전에 나온 건데 효과가 아주 좋아.”
“고마워.”
하린이 건네 멀미약을 한입에 털어 넣고 마음속으로 귀환을 외치자 30초짜리 초시계가 눈앞에 나타났다.
지루한 30초가 흐르자 공간이동 마법진을 사용할 때처럼 밝은 빛과 함께 하늘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어? 괜찮네.”
멀미약이 제대로 들었는지 구토 증세가 없었다. 30분은 지나야 괜찮아지던 어지럼증도 1분도 안 돼 사라졌다.
멀미약은 텔레포트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유저가 많자 생겨난 아이템으로 실제 의약품보다 효과가 훨씬 탁월해 많은 유저가 사용했다.
그러나 개당 은화 1개로 1만 원이나 해 ㈜판타스틱에서 돈벌이용으로 만들었다고 유저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완전히 시골 두메산골이네.”
“작은 영지는 어디나 다 이래.”
“그래도 너무 심한 것 같은데. 보이는 건 모두 판잣집밖에 없잖아. 3주년 이벤트로 주는 건데 제대로 된 걸 줘야지 이게 뭐야.”
“이게 어디야. 3억5천만 명 중에 달랑 나만 가진 건데.”
“듣고 보니 그러네.”
“지금은 이렇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금방 좋아질 거야.”
“이제부터 내가 많이 도와줄게. 우리 아틸라 제국에서 가장 큰 영지로 만들자. 알았지?”
“응.”
그동안 영지를 어떻게 해야 빠르게 키울 수 있을지 혼자 고민하느라 잠도 편히 못 잤다.
그러나 이제 하린이 곁에 오며 같이 고민해줄 사람이 생겨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다. 하물며 하린은 나보다 몇 배는 똑똑하고 현명한 친구로 유비가 제갈량을 얻은 것만큼 아주 든든했다.
“레이첼, 별일 없었지?”
“네, 영주님.”
“인사해. 이쪽은 남작 부인인 하린. 오늘부터 영지에서 나와 함께 지낼 거야.”
“... 시녀장 레이첼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마님.”
“반가워.”
“... 네.”
“레이첼, 하린이 편히 쉴 수 있게 창가 방 좀 청소해줘.”
“... 네.”
하린이를 남작 부인이라고 소개하자 레이첼의 표정이 어두워지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간신히 네라고 대답한 레이첼이 하린이의 방을 청소하기 위해 집무실을 나갔다.
레이첼의 표정이 왜 어두워졌는지 알았지만, 붙잡고 위로해줄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 내 옆에는 하린이 있었다.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단 한 번도 레이첼을 여자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NPC를 여자로 생각한다고 말하면 많은 유저가 웃겠지만, 나는 NPC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과 대화하고 같이 뛰어다니는 동안은 그들도 살아 숨 쉬는 생명체였다. 그러나 사랑할 대상은 아니었다.
나는 가상현실이 아닌 현실에서 서로 사랑하고 보듬어 안아줄 여자가 필요했다. 바로 하린으로 진짜 피가 흐르는 하린과 함께 웃고 떠들며 살고 싶었다.
“마님, 이방을 쓰시면 됩니다. 그리고 에밀리와 엠마가 마님 전용 시녀입니다. 시키실 일이 있으면 뭐든지 시키시면 됩니다.”
“에밀리가 마님을 뵙습니다.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엠마가 마님을 뵙습니다. 마음껏 부려주십시오.”
“많이 도와줘.”
“네, 마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레이첼, 수고했어”
“아닙니다. 영주님. 제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면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래.”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답한 레이첼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식당으로 휑하니 사라졌다.
농노 주제에 이런 짓을 한다는 건 죽여 달라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열흘 넘게 한 침대(?)를 쓰며 정도 깊이 들었고, 나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기대도 한껏 부풀게 한 내 잘못도 있어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모두 내 잘못으로 잠은 물론 말도 같이 타고, 농담도 하고, 건물 내에선 항상 뒤를 졸졸 따라다니게 한 내 잘못이었다.
“레이첼 많이 화났나 보다. 그렇지?”
“화났다기 보단 실망했다고 하는 게 맞겠지. 네가 이해 좀 해줘. 나 때문에 그런 거니까.”
“질투하는 거 아니야. 같은 여자로서 불쌍해서 그래. 오빠가 첫사랑일 텐데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 나라도 그랬을 거야.”
“모두 내 잘못이야.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하아.”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확실하게 표현해야 해. 그래야 상대방도 상처를 덜 받아. 앞으로는 그러지 마. 그건 상대를 두 번 죽이는 거야.”
“명심할게.”
하린이 말이 맞았다. 남에게 상처 주지 않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싫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는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고 친근하게 대한다.
이거야말로 상대를 두 번 죽이는 일로 호감이 없다면 단호하게 아니라는 의사표시를 해야 했다. 그래야 상대도 빨리 마음을 접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여자에게 무 자르듯 단칼에 ‘너 싫어!’ 이랬다가는 오뉴월에 서리 내리는 걸 볼 수도 있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다. 최대한 마음을 다치지 않게 이해를 구하는 것이 무병장수하는 길이었다.
“오늘 패치 된 내용 올라왔을 텐데, 보러 안 갈 거야?”
“밥 먹고 가자. 금방 준비될 거야.”
“알았어. 그런데 밥 먹을 때 입는 옷 따로 있어?”
“귀족들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기선 누구도 우리에게 뭐라고 할 사람이 없어. 그러니 편하게 입어도 돼.”
“그러면 밥 먹을 때 격식 안 차려도 되겠네?”
“당연하지.”
“고급 레스토랑 몇 번 안 가봐서 포크, 나이프, 스푼 쓰는 법 잘 몰랐는데, 정말 다행이다. 창피당하지 않아도 돼서. 헤헷.”
“나는 고급 레스토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
“킥킥킥. 나도 2번밖에 안 가봤어. 지난번 내 생일하고, 할머니 생신날. 불편해 죽는 줄 알았어.”
“흐흐흐.”
“오빠 방에 가 있어. 옷 갈아입고 얼른 갈게.”
“알았어.”
하린과 같은 방을 쓰고 싶었지만, 아직 스킨십이 거기까지 진행된 게 아니라서 전망이 가장 좋은 복도 끝 창가 방을 쓰게 했다.
캡슐도 한 방에 놓고 쓰기로 해놓고 게임에서 각방을 쓰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같이 게임하기 위해 그런 것이었지 육체적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젊은 남녀가 한 방에 있다 보면 격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되는 것이 순서였지만, 그래도 둘은 엄연히 다른 얘기였다.
그러나 마음속엔 하린을 완전한 내 여자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야 완벽히 안심할 수 있었다.
점심 먹으러 구내식당에 가자 남자들이 하린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뒤통수가 따가울 만큼 느껴졌다.
그나마 지금은 The Age of Hero 안이라서 외모를 고친 예쁜 남녀가 개미떼처럼 돌아다녀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모레 1·2학년 학과 단합대회에 가면 남자들이 구름처럼 하린 주위에 몰릴 게 분명했다.
마음이 급했지만, 그렇다고 강압적으로 사랑을 나눠선 안 된다. 사랑은 자연스럽게 한몸이 돼야 정신적 쾌락과 육체적 쾌락을 함께 맛볼 수 있어 오랫동안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쪽의 강압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건 강간이나 다름없는 일로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게 된다.
마음이 불안해도 그런 짓을 할 순 없었다. 사랑한다면 지켜줘야 한다. 그게 사랑이었고, 그게 남자였다.
평소보다 저녁이 열 배는 풍성했다. 하린이 왔다고 레이첼이 신경 쓴 것으로 내게 서운한 마음이 많았지만, 자기가 할일은 똑 부러지게 하는 성격이었다.
칭찬이라도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빙만 하고 있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집무실로 불러 내 마음과 현재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 같은데... 뭐라고 말해야 상처받지 않을지 정리가 안 됐다.
남작 부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접한 다니엘과 조나단, 니콜라스, 래틀 등 관리들이 모두 몰려와 하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난데없이 충성을 맹세하자 당황한 하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아틸라 제국 풍습이야. 받아들여.」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충성 맹세는 너무 생뚱맞은 거 아니야?」
「권력자에게 잘 보이는 것, 그게 이들이 살아남는 방법이야.」
「불쌍하네.」
「현실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긴 하지.」
현실이나 게임이나 권력자에게 잘 보여야 살아남는 건 마찬가지였다. 불합리한 일이었지만, 인간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약육강식의 세계는 쭉 이어져 왔다.
살아남기 위해 순응할 것인가, 맞서 싸울 것인지 결정할 일만 남은 것일 뿐 인류가 사라져도 절대 변하지 않는 불변의 원칙이었다.
「알아둬야 할 게 있어.」
「뭔데?」
「고맙다는 말하지 마. 엄청나게 부담스러워 하니까. 그냥 알았다고만 해. 그것만 해도 감사해 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다. 어휴. 여기도 사는 게 참 힘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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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게임을 빙자한 판타지 소설이라 그런지 왜 게임 소설이냐는 얘기가 많네요.
아무래도 판타지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