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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악연
39.
“잠시 주목해 주십시오. 저는 가상현실 온라인게임 학과 2학년 대표를 맡은 과대표 김연우입니다. 전달 사항이 있어 잠시 들렀습니다. 오늘 중으로 1학년 과대표를 선출해서 학과장님께 보고해야 합니다. 바쁘더라도 한 명도 빠짐없이 1학년 과대표 선출에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현실 시간으로 모레 저녁 7시 1·2학년 합동 단합대회가 있습니다. 장소는 학교 입구 XX호프집입니다. 선후배가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입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해 주십시오.”
하린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2학년 과대표가 들어와 공지사항을 전달했다.
덕분에 하린의 관심을 잠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우울한 마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아 눈에는 진한 아픔이 가득했다.
“반갑습니다. 가상현실 온라인게임 학과 지도교수 운문석입니다. 앞으로 4년간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분야 가상현실을 주제로 공부할 겁니다. 제 방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모르는 게 있거나 고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찾아오세요. 그럼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지도교수의 얘기를 들으며 하린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어설픈 위로와 맞장구는 하린이의 마음만 더 아프게 할 뿐 위로가 안 됐다. 진짜 위로는 옆에 있어 주는 것, 조용히 앉아 얘길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게 진짜 위로였다.
“오빠, 배고프지?”
“아직 괜찮아.”
“그래도 먹어두는 게 좋아. 가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그래.”
11시 30분 첫 강의가 끝나자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밥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러나 진짜 기분이 풀려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런 척이라도 해야 꿀꿀한 기분이 풀릴 것 같아 그런 것이었다.
스태미나가 3분의 2나 남아 밥을 먹지 않아도 됐지만, 꿀꿀한 하린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정이슬이 다가왔다.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정말 예뻤지만, 웃음 속에 사악한 뱀 한 마리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도 같이 가.”
“네 남자친구하고 가서 먹어.”
“남자친구 아니라고 했잖아.”
“알았으니까 다른 사람하고 가서 먹어.”
“그러지 말고 네 남자친구도 소개해줄 겸 같이 먹자.”
“싫다고 했어.”
“설마 내가 네 남자친구 뺏을까 봐 그러는 거야? 네 남자 친구가 날 좋아한다고 울며불며 매달려도 내가 절대 안 받아줘. 우린 친구잖아. 둘도 없는. 그러니 괜한 걱정하지 말고 밥 먹으러 가자.”
“헛소리 그만하고 바보라고 말한 네 남자친구에게나 가봐.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잖아.”
“4명이서 같이 밥 먹으면 창피할까 봐 그러는 거지?”
“왜 창피한데?”
“네 남자친구가 너무 초라해 보이니까.”
“넌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내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보여.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말은 아니라고 하면서 얼굴은 왜 빨개졌어. 남자친구가 창피해서 화난 거야?”
“말도 안 되는 헛소리 그만 좀 해. 네 헛소리는 듣는 것도 이제 지겨워.”
“사실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꼭 화를 내. 왜 그럴까? 창피함을 감추기 위해서 그러는 걸까? 넌 어떻게 생각해?”
“네 마음대로 생각해도 되니까 이제 그만 꺼져줄래. 나 오빠랑 맛있는 점심 먹고 싶어. 냄새나는 네 입 냄새 더는 맡고 싶지 않아.”
“못난 남자친구라도 잘 간수하겠다는 생각 아주 좋은 생각이야. 그게 너의 장기잖아. 약하고 못난 사람 거둬주는 거.”
“.......”
“점심 맛있게 먹어. 대신 다음 주에 내 진짜 남자친구와 같이 저녁 먹자. 보면 놀랄 거야. 엄청난 부자에 얼굴도 잘 생겼고, 몸도 좋고, 정력도 끝내주거든. 너도 한눈에 반할 거야.”
“둘이서 많이 노세요. 나는 내가 사랑하는 오빠랑 놀게. 그럼 안녕.”
“도망가는 거야?”
“그렇다고 하자. 잘 가라.”
정이슬의 공격을 무사히(?) 받아넘긴 하린이 내 손을 잡아끌고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마음 같아선 한소리 하고 싶었지만, 나까지 끼어들면 얘기만 길어질 것 같아 꾹 참았다.
그러나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는 정이슬의 행동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여자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는데, 태어나 오늘 처음 여자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항상 무시당하고 살자 가장 싫어하게 된 것이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어 무시당해도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래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나서지 않았고, 먼저 다가가지도 않았다.
내가 하겠다고 손을 들지도 않았고, 친구와 여자를 사귀겠다고 다가가지도 않았다. 덕분에 친구도 몇 명 없었고, 살가운 동료도 사귀지 못했다.
“미안해 오빠.”
“네가 왜 미안해?”
“내가 친구를 잘못 둬서 아무 잘못도 없는 오빠를 욕먹게 했잖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잘못된 행동을 한 그 친구의 잘못이지.”
“아니야. 내가 그때 받아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겁이 나서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이슬이가 저렇게 됐어. 모두 내 잘못이야.”
“내 생각에는 받아줬어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언제가 나타날 본성이었니까. 그게 고등학교 2학년 때 나타난 거야.”
“본성이라고?”
“그래. 본성!”
“나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런 건데 그게 본성이야? 그냥 질투심 아닐까?”
“질투심에 눈이 먼 것도 본성에 기인한 거야. 질투심을 억누를 수 있는 인내심이 있거나 좀 더 건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착한 본성을 갖고 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세상엔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다고 했다. 주변 환경 때문에 좋게 또는 나쁘게 변한 것이지 태어날 때부터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에 100% 공감할 수 없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같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똑같은 성향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나쁘게, 어떤 사람은 평범하게, 어떤 사람은 착하게 살았다.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사람의 본바탕인 타고난 인성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환경도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타고난 인성에 따라 그에 대한 반응이 달라져 결과도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린이가 정이슬을 받아주지 않았어도 지금과 같은 행동을 했을 거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 하린이 말처럼 사랑에 목말라하는 정이슬을 받아줬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하린이의 예상일 뿐 정답은 아니었다.
그리고 정이슬의 사랑을 받아줬다면 하린이가 변했을 수도 있었다. 자기 신념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사람은 변한다. 결국, 하린이가 변하든 정이슬이 변하든 둘 중 하나는 변했을 것이다.
내 입장에선 정이슬이 변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하린이가 변했다면 내 손을 잡고 있는 천사는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오빠, 뭐 먹을 거야?”
“난 아무거나 상관없어.”
“아무거나가 어디 있어. 먹고 싶은 거 말해. 내가 다 사줄게.”
“네가 알아서 시켜줘. 네가 시켜준 거면 다 잘먹을 수 있어.”
“그러면 김치볶음밥 먹어. 구내식당 메뉴 중 김치볶음밥이 가장 맛있어.”
“그래.”
“나는 오므라이스 먹어야지. 여기 오므라이스도 밖에서 파는 것보다 나아.”
“앉아 있어. 내가 사올게.”
“아니야. 오늘은 내가 할게. 앉아서 책보고 있어.”
“그래.”
마음이 복잡할 땐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게 나았다. 고민해서 해결될 문제면 끙끙 앓는 게 맞겠지만, 고민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면 움직이며 잊는 게 나았다.
“밥 잘 나오네.”
“학교 구내식당도 처음 와본 거야?”
“어.”
“오빠 구두쇠지?”
“아니.”
“그런데 구내식당을 왜 안 와? 학교 근처에서 가장 싼 곳이 구내식당인데.”
“김치볶음밥이 얼만데?”
“동화 35개 3,500원.”
“정말 싸네.”
3,500원이면 X심 X라면 4개는 살 수 있어 영세민인 내겐 절대 싼 가격이 아니었다. 라면 한 개와 물로 한 끼를 때우는 내겐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었다.
그러나 반찬이 3가지 나오고 김치볶음밥 양도 적지 않았다. 공깃밥 2개는 너끈히 넘는 양으로 하린이의 말에 따르면 아줌마에게 애교를 부리면 더 많이 준다고 했다.
내 앞에 놓인 김치볶음밥을 보자 집에서 라면 끓여 먹는 것보다 싸게 먹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면을 먹으려면 가스도 필요했고, 물도 있어야 했다. 라면을 생으로 씹어 먹지 않는 한 라면값만큼 추가로 돈이 들었다.
그런데도 내게 3,500원은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남작 작위에 영지까지 있는데 3,500원짜리 김치볶음밥이 부담스러운 게 말이 되냐고 하겠지만, 지금 영지는 적자였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만들려면 돈 들어갈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인구도 늘려야 하고, 군사력도 키워야 하고, 농지도 더 확보해야 하고, 기술력도 보강해야 하고, 인재도 영입해야 하는 등 돈 들어갈 일이 태산이었다.
돈은 생긴 다음에 써야 한다. 돈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고 미리 돈을 쓴다면 결과는 파산이었다.
“진짜 학교 구내식당도 3,500원이야?”
“어. 똑같아. 그러니 앞으로 구내식당 가서 밥 먹어. 집에서 라면 끓여 먹지 말고. 아니다. 내가 반찬 싸 들고 가서 밥해줄게.”
“정말?”
“이래 봬도 음식 잘하는 여자야. 조리사 자격증도 있어.”
“고맙긴 한데 먹을 자리가 없어.”
“왜?”
“원룸이라 워낙 좁아서 캡슐 설치하고 나선 앉을 자리도 없어 침대에 앉아 먹거나, 싱크대에 서서 먹어.”
“생각만 해도 불쌍하잖아.”
구질구질한 모습을 말하자 창피하다 못해 처량했다. 없이 살아도 이런 얘기까지 하는 건 아니었는데...
사랑하면 숨기는 게 없어야 하지만, 치부나 다름없는 가난까지 보여주는 건 아니었다.
“최고급 캡슐이라고 했지?”
“어.”
“캡슐에서 자겠네?”
“그제부터 그랬어.”
“그럼 침대 빼도 되잖아?”
“내게 아니야. 원래부터 있던 거라 내 마음대로 버리면 주인아줌마가 물어달라고 할 거야.”
“침대 상태가 어때?”
“오래된 원룸이 뻔하지 뭐. 많이 삐걱거리고 냄새도 심해.”
“주인아줌마 전화번호 알지?”
“말아. 그런데 주인아줌마 전화번호는 왜?”
“소리가 너무 심하게 나고, 냄새까지 나서 잠잘 수가 없어 바꿔달라고 하려고. 그게 싫으면 버려주든지 둘 중에 하나 하라고 말할 거야.”
사소한 것까지 세심히 챙겨주는 하린의 마음 씀씀이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유모가 사라진 이후 알뜰히 챙겨준 사람은 하린이 처음이었다.
은하도 이것저것 많이 챙겨줬지만, 소꿉장난 같이 노는 게 전부로 하린이 같은 배려심은 없었다.
“먹고 있어. 나 전화 한 통만 하고 올게.”
“밥 먹고 해.”
“아니야. 이런 건 바로바로 해야 해. 그래야 편하게 밥 먹을 수 있어.”
주인아줌마 전화번호를 받아 든 하린이 전화를 걸기 위해 로그아웃했다. 하린은 생각한 일은 바로바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으로 추진력이 뛰어났지만, 조급한 면도 있었다.
그러나 배려심이 깊이 무턱대고 일을 저지르진 않아 말썽꾸러기가 될 소질은 극히 적었다.
“오늘 중으로 내놓으래. 자기가 딱지 붙인다고.”
“고마워.”
“이런 일은 당연히 마누라가 해야 할 일 아닌가? 헤헷.”
“마누라? 오늘 들은 얘기 중 가장 마음에 든다. 하하하하.”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일을 남자가 해주길 바라는 여자도 있었다. 사귄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큰 문제가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싸움에 원인이 된다.
뭐든지 적당해야 받아주는 것으로 애인과 부부는 서로 돕는 관계지 소처럼 부리는 관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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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