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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시대-38화 (38/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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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악연

38. 지독한 악연

“형. 히어로걸스 좀 보고 올게요.”

“그래.”

조금 전까지 하린에게 여자 친구를 소개받기 위해 손바닥을 비비던 성우가 히어로걸스가 있는 앞자리로 이동했다.

성우뿐만 아니라 모든 남학생이 히어로걸스 근처에 앉기 위해 앞으로 몰려가자 뒤에는 여자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뒤에 남겨진 여학생들의 표정이 무참하게 일그러지며 히어로걸스를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봤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예쁜 여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려. 오빠는 안 그럴 거지?”

“난 이미 정신 빠진 지 오래야. 너에게.”

“킥킥킥킥.”

내가 자기에게 푹 빠져있다고 하자 기분이 좋은지 하얀 이빨을 드러낸 하린이 연신 웃어댔다.

드르륵

앞문이 열리자 피비 케이츠를 닮은 이국적인 소녀가 들어왔다. 히어로걸스를 둘러싼 남학생들이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겠다고 왁자지껄 떠들던 소란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조용해진 강의실의 모든 시선이 이국적인 소녀에게 쏠렸다.

긴 갈색 머리카락을 엉덩이까지 기른 소녀는 쌀쌀한 3월인데도 다리가 훤히 드러난 짧은 미니스커트에 배꼽이 드러난 짧은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 위에 검은 재킷을 걸치자 섹시함까지 가미돼 예쁘다는 말이 어느 때 쓰는 말인지 실감하게 했다.

미모와 몸매를 비교하면 하린이도 피비 케이츠를 닮은 이국적인 소녀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혼혈로 인한 이국적인 아름다움과 섹시함에 하린이 밀릴 수도 있지만, 깜찍함과 귀여운, 청순함은 하린이 훨씬 뛰어나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그런데도 하린이 학생들에게 주목받지 못한 건 기다란 후드 로브로 얼굴과 몸을 가리고 있어 아름다움이 외부로 표출되지 않아서였다.

그에 반해 이국적인 소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것인지 올 블랙으로 아주 예쁘고 섹시하게 꾸미고 강의실에 들어와 단번에 학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The Age of Hero에선 누구나 얼굴과 몸매를 고쳐 미인과 미남이 물결을 이뤘다. 그렇게 보면 이국적인 소녀의 등장에 강의실이 조용해질 이유가 없었다.

강의실 안에도 얼굴과 몸매를 고친 미남 미녀들이 수두룩해 이국적인 소녀의 외모가 독보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도 적막 같은 침묵이 흐르는 건 이국적인 소녀의 아름다움을 며칠 전 눈으로 직접 보아서였다.

외모 개조로 바꾼 모습이 아니라 현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남학생들은 넋을 놓고 바라봤고, 여학생들은 억지로 꾸민 자신의 초라함에 좌절이 가득 담긴 눈으로 쏘아보았다.

“하린아 안녕!”

“안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널 보기 전까지 좋았는데, 널 보는 순간 전혀 안녕하지 않아.”

“우리 쌓인 우정이 있는데 인사는 하고 지내자.”

“그따위 우정 필요 없으니까 다시는 아는 척하지 마.”

“싫은데. 난 평생 네 곁에 있을 건데.”

“흐음.”

이국적인 소녀가 하린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와 말을 붙였다. 그러나 하린은 전혀 반갑지 않은지 날카로운 말을 쏟아냈다.

그런데도 이국적인 소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더욱 싫은지 하린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그런데 이 남자는 누구야?”

“애인.”

“애인? 네.네가 나.남자를 사귄다고. 거짓말이지?”

“진짜야. 우리 사귄 지 3일 됐어.”

“믿을 수 없어. 넌 남자 관심 없었잖아.”

“관심 없는 게 아니라 관심 가질만한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던 거야.”

“내가 보기에는 관심 가질 만큼 대단해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그래도 얼굴과 몸매는 그다지 나쁘지 않네. 고친 건가?”

“아니. 나처럼 손 하나도 안댔어.”

“그래? 어쨌든 네가 남자를 만난다는 게 참 신기하다. 평생 선머슴처럼 살아 남자하곤 인연이 없을 줄 알았는데, 정말 의외네. 진작 알았으면 괜찮은 남자 많이 소개해줬을 텐데. 지금이라도 소개해줄까? 이 남자보다 100배는 근사한 남자 많은데.”

“그런 놈팡이들은 한 트럭을 가져다줘도 싫거든. 너나 많이 가져.”

“네가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그러는가 본데, 남자는 힘과 돈이 있어야 진짜 남자야. 착하다고 남자가 아니야. 그런 남자는 작은 일에도 징징거려 여자를 피곤하게 해. 그러나 돈과 힘이 있는 남자는 절대 여자를 힘들게 하지 않아. 평생 여자를 떠받들고 살지.”

“나이 먹고 늙어도 그럴까?”

“늙지 않으면 되지.”

“헛소리는 여전하구나. 알았으니까 너는 힘세고, 돈 많은 남자 많이 만나. 나는 착하고 이해심 많은 오빠와 살 테니까.”

“살아?”

“우리 뽀뽀도 했어. 졸업하기 전에 결혼도 할 거야.”

“뭐라고?”

“왜 질투나?”

“남자 같아야 질투가 나지. 어쨌든 잘해봐. 하다가 안 되면 언제든 말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를 소개해줄 테니까.”

“고마워.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내일 일을 누가 알겠어. 안 그래 친구?”

“저기 새로운 네 남자친구가 널 애타게 찾고 있네. 그만 떠들고 가봐. 바람맞지 말고.”

“남자친구 아닌데.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수많은 바보 중 한 명이야. 내 새로운 남자친구는 따로 있어. 조만간 소개해줄 테니까 놀라지 마. 엄청난 부자에 얼굴도 무지 잘 생겼거든. 호호호호.”

수줍고 상큼한 마스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천박한 웃음을 흘린 이국적인 소녀가 엉덩이를 육감적으로 살랑살랑 흔들며 수많은 바보 중의 한 명이라고 말한 남자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나를 유혹해 하린을 화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런 것으로 걸어가며 고개를 돌려 유혹하듯 나를 수시로 쳐다봤다.

한눈에 왜 그런지 알아채고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자 조금 무안했는지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누구야?”

“지독한 악연.”

“악연? 어떻게 만났는데 악연까지 된 거야?”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 처음에는 둘도 없는 친구였어.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부터 사이가 나빠져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됐어.”

“어쩌다가?”

“질투심과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이 원인이었어.”

하린이가 이국적인 소녀 정이슬을 알게 된 건 중학교 올라가기 직전 정이슬네 가족이 하린이네 집 근처로 이사 오면서였다.

스페인계 아르헨티나 사람인 아버지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정이슬은 확연히 다른 외모 탓에 초등학교를 여섯 번이나 옮길 만큼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왕따를 당한 건 미국과 유럽이 아닌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란 이유 때문이었다.

엄청난 놀림과 왕따에 시달린 정이슬은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지만, 병세가 점점 심해져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

중학교에 가면 딸이 더욱 힘들 것을 고민한 정이슬 부모는 평소 친분이 두터운 하린이네 집 근처로 이사 왔다.

정이슬 아버지 카를로스는 변호사이자 법률사무소 사장으로 하린이 아버지와 알고 지낸 지 10년도 넘은 막역한 사이였다.

사교성과 붙임성이 남다른 하린이는 아파하는 정이슬을 불쌍히 여겨 매일 집에 찾아갔고, 둘은 친자매 이상으로 가까운 친구가 됐다.

하린과 정이슬은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학년 총 6년간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생활했다.

정이슬의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가 사정 얘기를 하고 후원금도 내놓아 그럴 수 있었던 것으로 하린과 같은 반이 된 정이슬은 처음으로 두려움을 떨쳐내고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운동신경이 남자보다 더 뛰어난 하린은 초등학교 때부터 동네에서 알아주는 왈가닥이자 싸움꾼이었다.

남학생들도 무서워할 만큼 싸움을 잘해 얻어맞고 다닌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성격도 아니었고, 공부도 잘해 말썽꾸러기 취급을 받지 않았다.

그런 하린이가 정이슬을 보호하자 어느 누구도 정이슬을 혼혈이라고 놀리지 못했다.

하린이의 든든한 보호 속에 정이슬은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밝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둘은 4년 넘게 친자매처럼 붙어 다니며 단짝친구로 우정을 과시했다.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 같던 둘 사이에 트러블이 생긴 건 고등학교 2학년 1학기가 시작되면서였다.

4년 넘게 하린이만 바라보고 산 정이슬은 자기 모르는 사이에 하린이를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 생각하게 됐다.

하린이를 남자로 생각한 정이슬은 파상적인 선물 공세와 의도적인 스킨십으로 하린이를 당황하게 했다.

정이슬의 지나친 애정 행위에 어린 하린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친구 정이슬을 생각하면 받아줘야 했지만, 동성애를 나쁜 것으로만 교육받은 하린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정이슬을 피하게 됐다.

우리는 동성애를 몹시 나쁜 짓으로 교육받았다, 그러나 동성애는 인류가 시작된 순간부터 있었던 남남, 여여의 사랑법이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생각을 하며 살 수 없듯이 사랑도 이성 간에만 생기는 건 아니었다.

1만여 명의 남녀를 조사한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만 20세에서 35세 사이의 백인 남성 중 11.6%가 양성애자였다.

동일 연령대의 미혼 여성의 7%, 이혼한 여성의 4%도 양성애자였고, 만 20세에서 35세 사이의 여성 중 2~6%는 부분적인 동성애자였다.

우리나라 역시 정확한 통계만 없을 뿐 상당히 많은 사람이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했다.

정이슬도 오랜 기간 하린이에게 의존하며 자연스럽게 하린이를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 생각하게 된 것으로 나쁘게만 볼 순 없었다.

그러나 사랑은 양방향으로 소통될 때 아름다운 것이지 일방적일 땐 받는 사람에게 고통만 안겨줬다.

지나친 애정 공세에 지친 하린이 정이슬를 의도적으로 피하자 정이슬은 하린이 자신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이때 둘 사이에 끼어든 아이들이 있었다. 평소 하린이의 행동을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질 나쁜 친구들로 하린이와 정이슬을 갈라놓기 위해 정이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이들은 하린이가 정이슬을 시녀이자 장난감으로 취급한다며 정이슬의 자존심과 열등감을 자극하며, 한편으론 하린이보다 정이슬이 훨씬 예쁘고 집안도 빵빵 하다며 아첨과 아부로 정이슬의 상처받은 자존심을 위로했다.

사람 마음은 참으로 간사했다. 정이슬은 4년 넘게 자신을 보살펴준 친구 하린이를 사랑할 만큼 좋아했지만, 한편으론 참을 수 없는 질투에 몸부림쳤다.

운동도 잘하고, 언제나 당당하고, 친구도 많고, 가족과 선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하린이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게 너무도 좋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사람을 겁내고, 두려워하고, 인기도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면 모든 걸 가진 하린이가 죽도록 미웠다.

꼭꼭 숨겨왔던 불타는 질투와 열등감이 친구들의 이간질과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은 하린이의 행동에 폭발하며 정이슬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남자들과 늦게까지 노는 등 문제아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 곳, 학교 밖에서만 이루어져 선생은 물론 식구들도 몰랐다.

정이슬의 변해가는 모습이 자신 때문이라 생각한 하린은 원래의 착한 모습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질투와 열등감에 눈이 먼 정이슬은 하린이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쁜 친구들과 하린이를 골탕 먹이며 놀리는 재미까지 붙였다.

정이슬이 왜 그렇게 됐는지 잘 아는 하린은 어떻게든 친구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참고 또 참았지만, 날이 갈수록 정이슬의 방탕과 괴롭힘은 심해져만 갔다.

결국. 참지 못한 하린이 고등학교 3학년 2학기가 시작되는 날 절교를 선언했다. 그러나 복수심에 불타는 정이슬은 더욱 하린을 쫓아다니며 괴롭혔다.

같은 학과에 다니게 된 것도 정이슬이 하린이를 괴롭히기 위해 쫓아온 것으로 둘은 둘도 없는 친구에서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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