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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부인
35.
많은 사람이 경주마를 최고로 좋은 말로 생각하는데, 그건 경마장 안에서만 그랬지 전쟁터에서 쓰지도 못할 말이었다.
경주마는 빠르게 달릴 수 있게 체격이 비교적 작고 날렵하게 생긴 말을 교배시켜 얻은 것으로 체중이 400~500kg밖에 안 나가는 경종마였다.
이런 말에 무거운 갑주를 씌우고 무기를 주렁주렁 달고 갑옷까지 입은 건장한 남자가 타면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
그런 것도 모르고 많은 유저가 겉만 번지르르한 경종마를 샀다가 얼마 뛰지도 못하고 발목이 부러지거나 주저앉아 몬스터의 먹이가 되는 일이 초창기에 많았다.
경주마와 달리 전투마는 중무장한 상태에서도 오랫동안 달릴 수 있는 뛰어난 체력과 지구력을 갖췄고, 훈련을 통해 화살과 마법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도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까지 갖춘 최고의 말이었다.
이런 이유로 전투마는 1급 군용물자로 취급했고, 유저에겐 팔지 않아 돈이 있어도 살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전투마를 타고 다니는 유저는 없었다. 또한, 전투 중 말이 죽으면 살려낼 수 없어 말 타고 몬스터를 사냥하는 유저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른 게임은 타고 다니는 말이나 맹수, 팻이 죽으면 다시 소환할 수 있지만, 소환수 시스템이 없는 The Age of Hero에선 유저를 빼면 살릴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전투가 시작되면 말과 팻, 맹수 따위를 전부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렇다고 부활시킬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궁극의 부활 주문 레저렉션(Resurrection)을 사용하면 죽은 사람과 동물을 살릴 수 있다.
그러나 마법의 끝인 9서클 대마법 주문은 상점에서 팔지 않았고, 수도 크라쿠푸스와 10대 도시에 있는 마법사의 탑 탑주 10명만 익히고 있어 유저는 배울 수 없었다.
그리고 운 좋게 배운다고 해도 죽은 생명을 부활하기 위해선 여러 가지 제약이 있어 살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 되겠다. 얼굴 가리자.”
“얼굴을 왜 가려?”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상점에서 팔지 않는 전투마를 타고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그러면 우리 얼굴을 캡처해 인터넷에 퍼뜨릴 수도 있고, 뒷조사를 하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러다 최초의 영주라는 게 알려지면 파리 떼가 꼬일 수도 있어. 미리미리 대비하는 게 좋아.”
“알았어.”
급히 말을 인벤토리에 넣고 근처 상점으로 들어가 모자가 달린 기다란 후드 로브를 사서 입고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나왔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도시에선 아이템을 보이지 않게 하고 다니는 게 안전했다. 도시에는 소매치기 NPC도 있었고, 강도 NPC도 있어 물건을 도둑맞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전문적으로 아이템을 빼앗는 약탈 길드도 있어 값비싼 아이템은 노출하지 않는 게 안전했다.
그렇다고 도둑들이 몰려다니며 물건을 빼앗을 만큼 수도 크라쿠푸스의 치안이 불안하진 않았다.
아틸라 제국이 건국한 지 1,000년이 됐지만, 황제의 권한은 여전히 막강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귀족들의 힘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처럼 1,000년이 지나며 호기롭던 황가의 기상도 많이 쇠퇴했고, 황제가 되고 싶어 하는 황족들도 많아 언제 반란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에픽 아이템 보여줘.”
“거래가 안 되는 아이템이야.”
“사진 찍어서 내게 보내면 돼. 아니면 거래 걸고 아이템을 올리면 볼 수 있어.”
“그럼 학교 잔디밭에서 보자. 달리는 말에서 보는 건 너무 위험해.”
“알았어.”
빠르게 말을 몰아 20분 만에 학교에 도착했다. 경주마는 시속 65km로 달릴 수 있지만, 영지에서 가져온 전투마는 이보다 빨라 최고 80km까지 낼 수 있었다.
수도 크라쿠푸스와 10대 도시에는 대한민국 차로처럼 말이 달릴 수 있는 마로(馬路)가 잘 갖춰져 있어 빠르게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와 도시를 잇는 도로는 형편이 아주 나빴다. 수도 주변의 위성도시는 치안 상태가 괜찮아 오가는데 큰 불편이 없었지만, 위성 도시를 벗어나면 몬스터가 사방에 깔려있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 수도 크라쿠푸스에서 가장 가까운 10대 도시 헤르모그까지 갈려면 적어도 300명이 넘는 병사나 용병이 필요했다.
스콜라나 프리 스콜라, 프로보스트를 고용할 수 있다면 몇십 명만 있어도 무사히 헤르모그까지 갈 수 있지만, 그런 고급 인력을 고용하려면 엄청난 비용을 지급해야 해 돈 많은 귀족 또는 대상인이 아니면 고용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름 : 하린
종족 : 인간
직업 : 궁수
칭호 : 아틸라 제국 남작 부인
평판 : 0
포인트 : 453
스태미나 : 165/205
생명력 : 8,650/8,650
마나 : 2,652/2,850
근거리 공격력 : 267(독 데미지 40 포함)
원거리 공격력 : 326(독 데미지 40 포함)
마 법 공격력 : 258(독 데미지 40 포함)
방어력 : 262
근력4.5(+2) 순발력6.8(+8) 체력5.5(+5) 지력3.8
“생명력 8,650이야. 엄청나네.”
“0.01% 안에 드는 최고 실력자들과 비교하면 한참 아래야.”
“0.01%는 생명력과 마나가 얼마나 되는데 그래?”
“강만두 알지?”
“200억 원 넘게 벌었다는 전 프로게이머?”
“그래. 그 강만두 피가 2만이 넘고, 마나도 5,000은 된다고 알려졌어.”
“헉!”
“내 동생 하연이만 해도 생명력이 1만이 넘어.”
“나는 완전히 허접이네.”
“시작한 지 3일 만에 피통이 1,900이면 엄청난 거야. 난 그때 100이었어.”
“그건 내가 노력해서 이룬 게 아니잖아. 일곱 가지 혜택으로 얻은 결과잖아.”
“그렇게 따지면 누구나 다 그래. 자격지심 갖지 마.”
“알았어.”
생명력 2만에 마나가 5,000이면 250만 포인트로 레어와 에픽 아이템으로 생명력과 마나를 올렸다고 해도 사냥을 통해 200만 포인트는 얻었다는 뜻이었다.
일반적인 게임에선 경험치 100만, 200만이 큰 게 아니었다. 그러나 The Age of Hero는 클릭 한 번으로 몬스터를 사냥하는 애들 장난 같은 방식이 아니었다.
토끼 한 마리를 잡아도 직접 몸을 움직이며 칼을 휘둘러야 포인트를 얻을 수 있어 1만 포인트 쌓기도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운동신경이 떨어지거나, 몬스터를 두려워하는 유저는 사냥을 포기했다. 이 인원이 무려 7,000만 명으로 전체 3억5천만 명 중 20%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상위 1%에 드는 하린의 상태창도 화려하다 못해 멋지다는 말 밖에 해줄 말이 없는데, 최상위 0.01%는 하린보다 생명력과 마나, 공격력, 방어력이 최소 2배는 높다는 말에 내가 자만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남작 호칭과 에픽 아이템 3개를 받자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다 하린의 상태창과 아이템, 스킬창을 보자 우물 안 개구리보다도 못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장비 아이템 효과
검은 켄타우로스 족장 히커리언의 흑각궁(레어) : 공격속도 10% 향상
은빛 라이칸슬로프 족장 라르타의 화살통(레어) : 이동속도 10% 향상
라미아 전사 아이누아리의 사파이어 목걸이(레어) : 출혈 데미지 +20
정예 리자드맨 주술사의 루비 반지(고급) : 효과 없음
정예 황색 오크의 강철 반지(고급) : 효과 없음
악몽의 악어 전사 카라줄의 비늘 흉갑(레어) : 방어력 10% 향상
해적 카리얀의 은빛 서클릿(고급) : 효과 없음
회색 가고일 아유비토의 가죽 장갑(레어) : 공격속도 10% 향상
방랑시인 쿨라이도의 가죽 신발(레어) : 이동속도 10% 향상
황색 오크의 낡은 망토(일반) : 효과 없음
패시브 스킬
명궁(名弓)(상급 285/1,000) : 명중률 25% 증가, 사거리 25% 증가
보우 마스터(중급 413/500) : 활 공격력 10% 증가
속사 마스터(중급 426/500) : 활 공격 속도 10% 증가
치타의 발걸음(상급 110/1,000) : 이동속도 25% 증가
해동청의 눈(중급 420/500) : 시야 10% 증가, 치명타 확률 10% 증가
액티브 스킬
궁신(중급 25/500) : 10초간 공격력과 방어력, 이동속도, 공격속도 10% 증가
독화살(중급 485/500) : 독 데미지 20 추가
충격 화살(상급 23/1,000) : 넘어질 확률 25% 증가, 상대를 최대 10m 밀쳐냄
치명 화살(중급 301/500) : 치명타 확률 10% 증가
소나기 화살(상급 136/1,000) : 화살 1개가 10개로 늘어남
조용한 발걸음(중급 466/500) : 20초간 몸을 숨김, 50레벨 이상 몬스터에게 발각
붕대감기(중급 209/500) : 10초 동안 생명력 200회복
“같이 사냥하는 사람 있어?”
“오빠와 동생 이렇게 셋이 했어. 그런데 오빠가 결혼할 여자 친구 생기고 그쪽에 붙고, 하연이도 혼자 하는 걸 좋아해 올 초부터 혼자 했어.”
“혼자 사냥하면 뒤치기 위험하지 않아?”
“신경 쓰이지. 그래서 사람들이 오지 않는 깊숙한 던전과 늪지대, 울창한 숲을 주로 다녔어.”
“우리 영지에선 그럴 염려 없으니까 이제 안심해도 돼.”
“우리 영지야?”
“당연하지. 남작 부인인데.”
“우리 영지라고 하니까 기분이 묘하네. 헤헤헤헤.”
에픽 아이템은 한 개도 없었지만, 레어 아이템이 6개에 고급 아이템이 3개, 일반 아이템이 1개로 3년간 현질 없이 순수한 노력으로 상위 1%의 아이템을 맞췄다.
또한, 패시브 스킬과 액티브 스킬이 11개가 모두 초급을 벗어나 중급에 도달했고, 상급에 도달한 스킬도 4개나 됐다.
“이제 네 아이템 보여줘.”
“알았어.”
“우와! 특수 옵션이 끝내주네. 헉! 세트 효과까지 있네. 공격력과 방어력도 모두 최고야. 이래서 에픽 아이템 에픽 아이템 하는 거였구나. 레어 아이템과는 차원이 다르네. 이걸 보기 전까진 내 아이템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너무 초라해 보여. 히잉!”
거래창에 용기사 사이먼의 화염 반지와 홀리메탈 블레이드, 홀리메탈 원형 방패를 올리자 하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처음에는 옵션과 세트 효과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거래창에 올려놓은 자기 아이템과 비교하자 풀이 죽어 입이 한발이나 나왔다.
“너처럼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야. 순전히 운으로 얻은 거야. 그러니 부러워할 거 없어.”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알아? 노력? 물론 필요하지. 하지만 그것만으론 안 돼. 노력만으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100배는 행복했을 거야. 진짜 필요한 건 운이야. 노력이 결실을 맺으려면 행운이 필요해. 행운이 따라줘야 노력이 헛되지 않거든.”
믿고 싶지 않은 얘기였지만, 하린의 말이 옳았다. 성공하기 위해선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성공할 수 없었다.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금수저를 물고 나온 놈들은 노력하지 않아도 성공이 보장됐지만, 흙수저를 물고 세상에 나온 대다수의 사람은 죽도록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것, 얻을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세상을 뒤엎을 천재가 아니라면 흙수저가 성공하는 길은 남들은 갖지 못한 엄청난 행운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행운만 있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건 아니었다. 행운을 성공으로 연결시킬 노력이 필요했다.
결국, 노력과 행운 두 가지 모두를 가져야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대단한 행운을 가진 사나이였다.
“그런데 성장형 아이템은 뭐야?”
“오늘 새롭게 패치 되는 아이템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어.”
“한 단계 업그레이드면 레전드 아이템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야?”
“그렇지.”
“헉! 이건 정말 사기다. 사기야. 에픽 아이템만 해도 엄청난데, 레전드 아이템으로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아이템을 주다니... 그런데 패치도 안 한 아이템을 받은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거야 나도 모르지. 주니까 받은 거야.”
“환인하고 친해?”
“환인하고 친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안 그러면 패치도 안 한 아이템을 먼저 줄 리가 없잖아. 둘이 사귀어?”
“하하하하.”
하린의 말에 웃음이 빵 터졌다. 환인과 사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럴 수만 있다면 세상을 얻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슈퍼에고 컴퓨터 환인은 ㈜판타스틱 본사 건물이 있는 경기도 파주 지하 100m 아래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환인의 가치가 우리나라 전체와 맞먹을 만큼 엄청나 정부가 특별보호대상으로 지정해 1개 사단이 외곽을 철통같이 지키고, 환인이 있는 지하 기지는 중무장한 경비인력 500명이 상주한다고 했다.
또한, 환인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이 낳은 천재과학자 박만수를 포함해 5명밖에 안 돼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환인을 만나기 위해 파주에 있는 ㈜판타스틱 본사까지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The Age of Hero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세하게 알고 있어 환인이 얘기를 받아주기만 한다면 만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The Age of Hero의 신 환인은 자신이 만든 세상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관리하고, 감독하고, 업그레이드할 뿐 유저와 사담 따윈 나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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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