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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부인
33. 남작 부인
“아침부터 웬일이야? 보고 싶어서 달려온 거야?”
“어.”
“헤헷. 금방 나갈게. 1초만 기다려.”
아침 7시 하린의 집 앞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다. 달리기를 좋아해 아침형 인간이라 생각해 왔지만, 시간이 너무 일러 자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나 씻고 화장(로션이 전부지만)까지 끝낸 상태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옷도 걸치지 않은 하린이 반바지에 반소매 차림으로 뛰어나와 품에 안기려 했다.
아직 3월이라 아침저녁으론 차디찬 바람이 쌩쌩 부는데, 그 꼴을 하고 집 밖에 나와 내 품에 안기려 발버둥치는 모습이 너무 어이가 없어 한숨이 나왔다.
“한 번만 안고 옷 입고 나올게.”
“안 돼. 감기 걸려. 어서 들어가서 옷 입고 나와.”
“딱 한 번만.”
“안 돼!”
“1초면 된단 말이야.”
“말이 1초지 안으면 10분이 될 수도 있고, 한 시간이 될 수도 있어. 빨리 들어가서 단단히 챙겨 입고 나와.”
“우씌.”
징징거리는 걸 억지로 돌려세워 긴 바지와 점퍼를 입고 나오게 하자 입술이 코보다 더 튀어나왔다.
심통이 난 하린의 손을 잡고 골목으로 들어가 품에 안자 금세 입이 쑥 들어가며 심통이 풀렸다.
“뽀뽀하고 싶어.”
“어른들 나오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애야? 나 20살 성인이야.”
“힘들게 키워 났더니 혼자 큰 것처럼 얘기하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얘기 들으시면 참 좋아하시겠다.”
“사실을 말한 건데 뭐가 잘못됐어?”
“학비는 누가 대줬어?”
“아빠와 엄마가.”
“용돈은 누가 주셔?”
“그것도 아빠와 엄마가.”
“잠은 누가 재워주고?”
“모두 아빠와 엄마가 해줬어.”
“모든 걸 부모님이 다 해주시는데 어른이야?”
“나도 알아. 안다고. 다 아는 걸 말하면 속이 시원해?”
“하하하하.”
뽀뽀하고 싶어 품에 계속 매달리는 하린을 억지로 떼어놓자 또다시 입술이 피노키오 코만큼 튀어나왔다.
툭 튀어나온 입술을 손바닥으로 밀어 넣고 손을 잡고 공원을 향해 걸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팔짱을 끼고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해맑게 웃었다.
하린은 기분 나쁘다고 심통 났다고 속에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말하고 깨끗이 푸는 성격이었다.
그런 성격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무슨 할 말인데 아침 7시부터 집에 찾아와? 나쁜 얘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오늘 10시에 The Age of Hero 3주년 패치하는 거 알지?”
“어.”
“목요일 아침에 문자를 받았어. 3주년 패치 기념 영주 이벤트에 당첨됐다고. 스팸이나 장난 전화인 줄 알았는데, 다음 날 아침에 ㈜판타스틱에서 설치 기사들이 집에 찾아와 최고급 캡슐을 설치해주고 갔어.”
“헉! 저.정말 당첨된 거야?”
“응.”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하린에게 3일 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말했다. 영지를 받은 것, 남작이 된 것, 에픽 아이템을 받은 것, 영지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 등을 설명했다.
“왜 이제 말하는 거야?”
“사귀기 전에 말하면 믿지 않을 것 같아서 말 못 했어. 그리고 영주라고 밝히는 것도 자랑하는 것 같아서 조심스러웠어.”
“어젯밤에는 왜 말 안 했어?”
“너와 사귀게 된 게 너무 기뻐 다른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전화 끊고 생각났는데, 푹 자게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아침 일찍 달려와 말하는 거야.”
“정말이지? 다른 생각 없는 거지?”
“그런 게 왜 있겠어?”
“남자들 The Age of Hero하면서 NPC들과 그렇고 그런 짓 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영주면 왕이나 마찬가지라 네 영지에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성에 시녀들하고 놀려고 숨긴 거 아니야?”
순간 뜨끔했지만, 성관계를 맺은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 얼굴이 빨개지진 않았다.
그래도 레이첼, 아만다, 아이린의 손에 벌거벗은 몸을 맡긴 건 사실이라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영주 이벤트에 당첨된 걸 얘기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큰 복병이 숨어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레이첼과 아이린, 아만다에 대한 것으로 말하지 않고 넘어갔다가 차후에 알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문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부분도 모두 털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게 유리한 것만 말하고 불리한 것은 말하지 않는 건 속이는 것과 같았다.
“그런 생각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결단코 이상한 짓을 한 적은 없었어. 다만 걸리는 게 있어.”
“뭐가 걸리는데?”
“시녀 두 명이 매일 목욕시켜줬어.”
“목욕?”
“어. 그리고 레이첼이란 시녀하고 같은 침대 썼고.”
“.......”
솔직하게 다 말하기로 한 이상 속여선 안 된다. 있는 그대로 말하고 이해를 구하는 게 옳았다.
아만다와 아이린이 밤마다 내 몸을 닦아준 일과 레이첼을 데리고 잔일을 가감 없이 말했다.
그리고 시녀들을 곁에 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
얘기를 듣는 내내 하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색깔이 바뀌었다. 직설적인 성격이라 얘기가 끝나면 바로 화낼 거로 생각했는데, 이야기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자 더 불안했다. 화내면 욕하면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하겠다고 싹싹 빌면 됐다.
그러나 가만있다는 건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화가 더 많이 났다는 것으로 비는 것으로 안 될 수도 있었다.
‘괜히 얘기했나? 숨길 걸 그랬나? 하긴 사귀기로 하고 다음 날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아니지. 좀 더 친해진 다음 얘기하는 게 맞았어. 솔직하면 말하면 이해할 거라고 생각한 내가 멍청이야. 하아.’
“기분 정말 나쁘다.”
“미안해.”
“근데 그거 알아? 화는 나는데, 믿음은 가는 거.”
“저.정말.”
“말하기 쉽지 않은 일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 절대 쉬운 일 아니잖아. 그리고 이러쿵저러쿵 변명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얘기하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고. 화는 나지만, 솔직해서 좋았어.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확신이 섰어.”
“고마워.”
“The Age of Hero로 하는 남자의 절반 이상이 유저 또는 NPC와 성관계를 맺고 있어. 알고 있어?”
“인터넷에서 봤어.”
“실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해 방탕하게 놀고 있어. 여자 중에도 그런 여자 많고. 너는 왜 안 했어? 영지에 있는 건 모두 네 것이라고 했잖아.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되는지 확신이 안 섰어.”
“확신이 섰다면 했겠네?”
“어.”
“정말 고지식하다. 이럴 땐 무조건 아니라고 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 내가 좋아하지.”
“내가 좋아하는 널 속이고 싶지 않았어.”
“이런 답답이.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이 도움 된다는 거 몰라?”
“알아. 그래도 널 속이고 싶진 않아. 너만은 절대 속이지 않을 거야.”
살면서 거짓말을 안 해봤다고 하면 그것만큼 큰 거짓말도 없었다. 갓난아이도 엄마 품에 안기고 싶어 거짓 울음을 울었다.
사람은 그런 존재였다. 온갖 이유를 들어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존재가 사람이었다.
“애인이 없다면 상관없지만, 애인이 있는데 그런 짓을 하는 건 게임이든 현실이든 잘못됐다고 생각해. 사귀기 전 일은 거론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을 게. 대신 앞으로는 안 돼. 무슨 이유가 있어도 안 돼. 지킬 수 있지?”
“어.”
“그럼 됐어.”
계속 따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내가 선을 넘지 않았다는 걸 대견하게 생각했는지 더는 그 일을 거론하지 않겠다고 했다.
“강의시간 늦겠다. 어서 가봐.”
“알았어.”
“접속하면 바로 친구 신청할 테니까 쌩까지 말고 받아. 쌩까면 죽는다.”
“어.”
찐한 키스를 끝으로 아침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배려심 깊은 하린이 이해해줄 거라 믿었지만, 남녀(?) 문제는 배려심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서 걱정이 많이 됐다.
불안한 마음에 밤새 한잠도 못 자고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며 천지신명께 무사히 넘어가게 해달라고 빌었다.
기도가 통했는지 큰 소리 없이 넘어가자 밤새 가슴을 짓누르던 커다란 바위를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 하린님이 모모님께 친구 신청을 해왔습니다. 동의하면 ‘예’, 동의하지 않으면 ‘아니오’라고 말해주세요.
“예!”
- 모모님과 하린님은 친구가 됐습니다. 귓속말을 원하시면 ‘하린 귓속말’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치시면 됩니다. 귓속말은 같은 국가 안에서는 거리에 상관없이 대화할 수 있습니다.
「지금 어디 있어?」
「영주성 포털 앞이야.」
「포털 타고 수도 크라쿠푸스로 와.」
「알았어.」
“수도 크라쿠푸스로 이동.”
공간이동 마법진이 그려진 포털에 위에 올라서 수도 크라쿠푸스로 이동하자고 말하자 밝은 빛이 몸을 감싸며 하늘이 빠르게 돌아갔다.
“우욱.”
10,000km나 떨어진 수도로 장거리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하자 속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할 것 같았다.
“괜찮아?”
“괴.괜찮아. 우욱.”
“이거 마셔. 그럼 좀 나을 거야.”
“고마워.”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리를 부여잡고 포털을 빠져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하린이 차가운 음료수를 건넸다.
시원한 음료수를 한 모금 들이키자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나 너무 먼 거리를 이동해서 그런지 속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하린이 이끄는 대로 포털 옆에 있는 분수대 옆 공원 벤치에 앉아 숨을 크게 들이쉬자 어지러움이 조금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울렁거리는 속은 여전해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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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