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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데이트
30.
“이제부터 The Age of Hero를 취미로 해볼 생각이야.”
“너무 깊이 빠져들지 마. 마약보다 더 무서운 게 The Age of Hero니까.”
“알았어.”
하린의 충고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늦었다. 성주가 되기 전 하린을 만났다면 그럴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내 미래가 The Age of Hero에 있었다.
그리고 취미가 아니라 생업이었다. 게임이 생업이 됐다는 게 씁쓸했지만, 도둑질과 사기 등 잘못된 행동으로 돈을 버는 게 아니면 어떤 직업이든 괜찮았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처럼 개 같이 벌어 정승같이 쓸 수만 있다면 내가 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우리 2차 가자. 학교 입구에 수제 맥줏집 있어. 일반 맥주보다 훨씬 맛있어. 내가 살게 가자.”
“내일 수업 첫날인데 괜찮겠어?”
“나 주량 소주 두 병이야. 겨우 한 병밖에 안 먹었어. 괜찮아.”
“얼굴 빨개졌어.”
“원래 소주 한 잔만 마셔도 그래. 괜찮으니까 어서 가자. 빨리.”
술 취한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술 취하지 않았다고 우기는 거였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하린도 주량의 절반밖에 먹지 않았다는 말로 취하지 않았다고 박박 우겨댔다.
그러나 발음이 살짝 꼬이기 시작했고, 눈빛도 몽롱한 게 술 취한 티가 역력했다. 그렇다고 술 취했다고 말해선 안 된다.
술 취한 사람에게 술 취했다고 말하는 건 활활 타오르는 불에 휘발유를 붓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으로 살살 달래서 집에 보내는 게 가장 현명한 행동이었다.
“그럼 딱 한 잔만 하는 거야?”
“오케이.”
서둘러 고깃값을 계산하고 돌아와 비틀거리는 하린을 부축하고 가게를 나왔다.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학교 앞은 지나다니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한산했다.
그러나 이건 일요일이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The Age of Hero 때문에 벌어진 일로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저녁 8시만 넘으면 거리에 사람이 끊겼다.
이 때문에 술집과 외식업체 매상이 30%나 줄어들어 자영업자들의 피해가 막심해 큰 사회적 문제가 됐다.
웃기는 건 술 소비가 줄어들자 범죄율도 30%나 격감해 사회적으로 좋은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도산하는 자영업자들을 생각하면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문제로 마땅히 줄어들어야 할 것이 줄어들었는데도 세상은 좋아지기는커녕 문제만 많아지고 있었다.
“기분 좋다. 흐으. 나 남자와 단둘이 술 마셔본 거 오늘이 처음이야. 몰랐지?”
“남자친구 없었어?”
“어.”
“왜?”
“나랑 사귀고 싶어 접근한 남자들은 모두 내 얼굴과 몸매에만 관심이 있었어. 음흉한 눈으로 몰래 내 몸을 훑어봤어. 그래서 옆에 다가오지도 못하게 쌀쌀맞게 굴었어. 덕분에 남자친구 한 명 없이 20년을 살았어.”
“세상에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해?”
“.......”
“대답 못하는 거 보니까 너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렇지?”
25년 동안 살면서 만난 사람 중 좋은 사람은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유모와 은하, 고등학교 친구 2명이 전부로 나머지는 좋은 사람인 척 행동하거나,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자기 이익만 좇았다.
그러나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사람마다 선악을 구분 짓는 범주가 틀려 내가 보기에 나쁜 사람도 다른 사람이 보기엔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선 자기에게 이익을 안겨주면 좋은 사람, 손해를 끼치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경계가 모호해졌다.
“넌 내 첫 번째 남자친구야. 영광으로 알아.”
“고마워.”
“궁금하지 않아? 내가 왜 널 남자친구로 생각하게 됐는지.”
“궁금해.”
“넌 우리 가족 빼고 처음으로 나를 맑은 눈으로, 순수한 눈으로 바라봤어. 내 얼굴에 반해 얼빵한 눈으로 바라보지도 않았고, 내 몸을 훔쳐보지도 않았어. 그리고 아픈 나를 집까지 바래다줬어. 무릎도 치료해주고. 그래서 반했어.”
“네가 날 많이 좋게 봐줬네. 나 네 무릎 치료하면서 다리 슬쩍 봤는데.”
“그럼 나 속은 거야?”
“어.”
“크크크크.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이미 좋아졌으니까.”
하린이의 말처럼 그날 나는 이상한 눈으로 하린이를 보지 않았다. 예쁜 하린이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짐승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부모의 눈이 싫어서 그랬다.
우리 부모는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아래위로 세심히 훑어봤다. 옷을 홀딱 벗겨놓고 심사하는 것처럼 사람을 쳐다봤다.
입고 있는 옷, 얼굴, 몸매 등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그중에는 멋진 남자, 아름다운 여자를 음흉한 눈으로 더듬을 때도 있었다.
어린아이인 내가 보기에도 부모의 눈빛은 사악 그 자체였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상품으로 보려 하지 않았다.
옷이 추레하다고 깔보지 않았고, 비싼 옷을 입었다고 우러러보지 않았다. 잘생겼다고 부러워하지 않았고, 예쁘다고 더러운 욕망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하린이 나를 좋게 생각한 건 그런 순수한 감정으로, 계산하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런 눈으로 나를 봐줄 거지?”
“아니. 다른 눈으로 볼 거야. 사랑하는 눈으로.”
“.......”
깜짝 사랑 고백에 놀란 하린이 눈을 크게 뜨고 내 눈을 바라봤다. 한참 동안 눈도 깜빡이지 않고 뚫어지게 나를 바라본 하린이 살포시 품에 안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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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서 들어가. 도착하면 바로 전화하고.”
“알았어.”
“헤어지기 싫다.”
“이제 매일 매일 볼 거잖아. 그러니 오늘은 일찍 자. 술 마셔서 많이 피곤할 거야.”
우리는 사람이 없는 길가에서 30분 넘게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남들 같으면 찐하게 입이라도 맞췄을 텐데 바보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망부석처럼 서 있기만 했다.
입술을 맞출 줄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서 그렇게 서 있었다.
30분 만에 환상에서 깨어난 우리는 맥줏집이 아닌 하린이의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주량이 약한 하린이는 이미 충분히 취해있었다. 더 마시면 쓰러져 잠이 들거나 취해 주정을 부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나도 더 마시면 이성을 끈을 놓은 채 짐승으로 변해 하린이를 탐할 수도 있었다.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됐다. 오늘은 하린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아주 뜻깊은 날이었다.
영원히 오늘을 즐거운 날로, 절대 잊고 싶지 않은 날로 기억하게 해줘야 한다.
“벌써 가려고?”
“더 얘기하고 싶어?”
“그거 말고.”
“그럼 뭐?”
“이런 바보. 여자가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키.키스하고 싶어?”
“그래 하고 싶다. 그런데 꼭 말을 해야 해. 그냥 다가와서 덮치면 안 돼?”
“하하하하.”
“웃지 마. 나 짜증 나기 일보 직전이니까. 우웁...”
하린이의 바람대로 재빨리 다가가 양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조그맣고 예쁜 입술 위에 내 입술을 덮었다.
키스하고 싶다고 해놓고 막상 입을 맞추자 많이 놀랐는지 커다란 눈으로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손을 내려 허리와 등을 감싸며 혀를 밀어 넣자 눈을 사르륵 감으며 달콤한 입술을 스르륵 열어줬다.
“하아. 하아. 하아.”
“많이 숨차?”
“하아. 하아. 키스 많이 해 봤지?”
“아니.”
“나는 다리가 풀려 서 있지도 못하겠는데, 너는 잘만 서 있잖아. 이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라는 말이잖아.”
은하와의 일을 말해야 하나 고민됐다. 말해서 좋을 게 없었지만, 속이는 것보다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 남자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번 속이면 계속 속이게 된다. 거짓말은 첫 번째 어렵지 두 번, 세 번부터는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여자 친구를 사귀었어. 그때 이후 처음이야.”
“얼마나 만났는데?”
“6개월.”
“잤어?”
“어.”
“이씨. 나는 술도 너랑 처음 마셨고, 포옹도 너랑 처음 했고, 키스도 너랑 처음 한 건데, 이러면 너무 불공평하잖아.”
“미안해.”
“아이 짜증 나. 다시는 전화하지 마.”
쾅
전화하지 말라는 말을 남긴 하린이 거칠게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갔다. 한쪽은 처음이고, 한쪽은 경력이 있다면 처음인 쪽이 기분 나쁜 게 당연했다.
처지가 바뀌어 나는 경험이 없고, 하린이는 경험이 있었다면 나도 크게 기분 나빠했을 것이다.
하린이 마음을 이해하자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정말 다시는 만나지 않으려는 것일 수도 있어 돌아가지 못하고 집 앞을 서성였다.
30분쯤 집 앞을 서성이자 3층 창문이 열렸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하린이 심통이 잔뜩 난 얼굴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나를 바라봤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한참 동안 입술을 질근질근 깨문 하린이 휴대전화기를 손에 들었다.
따르릉따르릉
“여보세요.”
“나 만나기 전이니까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는 거야. 다음에 또 이러면 국물도 없어. 알았어?”
“알았어.”
“빨리 들어가. 도착하면 전화하고.”
”어.“
“다른 할 말 없어?”
“사랑해! 진심으로.”
“나도. 헤헷!”
은하가 떠난 후 6년 가까이 텅 비어있던 가슴에 다시금 뜨거운 사랑이 차올랐다. 하린이라는 사랑이...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고 했다. 그 말처럼 은하도 어느 날 갑자기 다가왔고, 하린이도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만나 불과 3일 만에 사랑하는 사이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왔듯이 갑자기 떠날 수도 있는 게 사랑이었다. 다시는 그런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학생이라 아픈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을 한다고 해도 절대 하린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더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수 없어. 유모와 은하는 그랬지만, 하린이는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죽는다고 해도 절대 놓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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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