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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데이트
29.
“널 버린 부모 많이 증오하지?”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아닌 척하는 거 아니야?”
“헤어진 이후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 그래서 모르겠어.”
“그게 나을 수도 있겠다. 그래. 잊어버려. 생각하면 할수록 너만 힘들어져. 깨끗이 잊고 네 인생 보란 듯이 멋지게 사는 거야. 그게 복수하는 거야.”
모르겠어가 아니라 죽도록 증오했다. 내가 살아온 25년을 송두리째 아픔으로 기억하게 한 부모를 죽도록 증오했다.
복수하고 싶었다. 부모보다 백 배 더 성공해 내게 줬던 고통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었다.
돈이 없다고, 유명하지 않아도 방법은 있었다. 언론을 이용하면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과 돈을 가진 부모는 1년도 지나지 않아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나만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 평생 패배자처럼 살아야 했다.
그것을 알기에 언론이 아닌 내 힘으로 부모를 벌주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만 그럴 뿐 그럴 힘이 없었다.
“이리 와서 앉아.”
“옆에?”
“어.”
“갑자기 왜?”
“너무 불쌍해서 안아주려고.”
“.......”
불쌍하다는 말은 결코 좋은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린의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을 보자 단순히 불쌍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아파서 그런 것이었다.
시키는 대로 옆자리에 가서 앉자 하린이 팔을 뻗어 목을 꽉 끌어안았다.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 하린이처럼 팔을 둘러 가슴을 꼭 끌어안았다.
하린의 뭉클한 가슴이 느껴졌지만, 이상한 상상은 하지도 않았다. 유모의 품에 안겼을 때처럼 따뜻하다는 느낌,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느낌,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 그것뿐이었다.
“앞으로 힘들고 아픈 일 있으면 내게 다 말해. 내가 다 들어줄 테니까.”
“그럼 우리 사귀는 거야?”
“아니.”
“그럼 뭐야?”
“으음... 친구와 연인의 중간쯤?”
“그런 것도 있어?”
“알아서 생각해. 헤헷.”
친구와 연인 중간이면 어느 정도 가까운 건지 궁금해서 물었다. 그러자 하린이 알아서 생각하라는 마을 했다.
더 물어보지 않아도 연인이란 뜻으로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딴에는 최대한 돌려서 한 말이었다.
하린이 보잘것없는 날 왜 좋아하는지, 어떤 면을 좋아하는지,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물어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도 하린이 마음에 들고, 하린이도 날 좋아한다는 것 그거면 됐다.
“내 얘기 그만하자. 재미없어. 지금부터 네 얘기 하자.”
“나는 할 얘기가 별로 없는데. 워낙 평범하게 살아서.”
“평범한 게 아니라 행복한 거겠지.”
“그런 것도 보여?”
“눈에 행복하다고 쓰여 있잖아.”
“정말?”
“눈은 항상 초롱초롱 빛나고 있고, 입가에는 자신감과 미소가 떠나질 않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그런 사람은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이야. 그게 바로 너야.”
“부정하지 않겠어. 철철 넘치게 사랑받고 살았으니까. 아빠와 엄마, 오빠, 언니, 여동생 그리고 같이 살진 않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 이모들까지 정말 모두 잘해주셨어. 살면서 다리 다쳐 운동 그만둔 것과 친구에게 배신당한 것 빼고 불행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으니까. 미안해. 이런 말해서.”
“뭐가 미안해? 네 잘못도 아닌데.”
“그래도 지금 할 얘기는 아니잖아.”
“모두 자기 팔자대로 사는 거야.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그러니 미안해할 거 없어.”
팔자는 타고난다고 했다. 나같이 불행한 사람은 절대 믿고 싶지 않은 얘기였지만, 내 꼴을 보면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뭘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런 불우한 시절을 보내야 했겠는가?
팔자가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불행한 어린 시절이었다. 그리고 남들은 절대 상상하지 못할 아픔이었다.
“네 가족 얘기 좀 해줘. 정상적인 가족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아빠와 엄마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닭살 커플이야. 나이가 50인데 아직도 아침마다 뽀뽀하고, 운동도 같이 다니고, 성생활도 왕성하셔.”
‘헉!’
“올해 28살인 오빠는 놀고먹는 공무원이야. 작년에 만난 여자 친구와 올해 결혼한다고 뻔질나게 외박 중이야. 그러나 아기부터 갖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25살인 언니는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어. 나보다 쪼금 안 예쁜데, 쫓아다니는 남자는 한 트럭도 넘어. 그런데 공부만 좋아하고 남자를 싫어해. 그래서 아직 한 번도 남자 친구를 사귄 적이 없어.”
‘다들 정말 특이하네.’
“동생은 고등학교 2학년. 두 살 차이인데도 매일 옷 때문에 싸워. 오늘도 모자 때문에 치고받고 싸웠어. 쪼그만 게 절대 안 지려고 해. 참고사항인데 나랑 얼굴과 몸매가 판박이야. 단 하나 다른 점은 눈동자 색깔이야. 나는 검은색인데 동생은 갈색이야. 헷갈리면 안 돼.”
“알았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우리 집 바로 뒷집에 살아. 원래는 같이 살았는데, 2년 전 집을 새로 지으며 따로 살게 됐어. 그런데 아침 점심 저녁 매일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는 일이 많아 한집에 사는 거나 다름없어. 고모, 삼촌, 이모들은 일주일은 기본 1번은 꼭 와. 새벽부터 와서 집에 가지도 않고 종일 놀다가 밤 12시 넘어서 가거나 할아버지 집에 자고 다음 날 아침부터 쳐들어와. 지겨워 죽겠어.”
“내가 보기엔 정말 재미있을 것 같은데?”
“재미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는 하도 들락날락해서 정신 사나워 죽겠어.”
하린이 아버지 송재윤은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 사장으로 규모가 크진 않지만, 기술력이 매우 뛰어나 업계에선 알아주는 알짜배기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하린의 엄마 김영아와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같은 대학에 나란히 입학해 1학년 때 결혼했고, 3학년 때 애를 가져 첫째 오빠 송준범을 낳았다.
오빠 송준범은 행정고등고시 합격자로 현재 기획재정부에서 근무 중으로 장래가 촉망받는 인재였다.
언니 송하은은 나와 하린이 합격한 XX대학교 전자공학부 대학원 2학년으로 전체수석으로 입학해 4학년 내내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은 천재로 졸업 후 아버지 회사에 취직할 예정이었다.
하린이와 매일 싸우는 고등학교 2학년 막내 송하연은 중학교 때까지 양궁 선수로 활약했다.
중학교 2학년에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힐 만큼 뛰어난 양궁선수로 활약했지만, The Age of Hero가 출시되자 과감히 양궁을 때려치우고 게임에 뛰어들어 현재 0.01% 안에 드는 최고 상위 랭커로 궁수들 사이에선 제법 이름이 알려진 스타였다.
“동생이 The Age of Hero를 그렇게 잘해?”
“그럼 뭐해. 국가대표 상비군을 때려치우고 The Age of Hero에 투신한 똘아이인데.”
“상위 0.01%라며?”
“제정신 아니긴 하지만, 움직이면서 활 쏘는 솜씨는 정말 일품이야. 그래서 별명도 귀궁(鬼弓), 귀신 궁수야.”
“너도 양궁 배웠어?”
“아니.”
“그런데 왜 궁수를 한 거야? 내가 보기엔 기사나 전사가 맞을 것 같은데.”
“나도 하연이처럼 움직이면서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체질에 맞아. 그리고 레벨이 높아질수록 몬스터의 힘도 세져 여자가 힘으로 제압하기가 쉽지 않아. 그래서 많은 여성 유저가 궁수나 마법사를 하는 거야.”
캐릭터를 만들면 남녀노소 누구를 막론하고 똑같은 스탯과 생명력이 주어져 눈에 보이는 건 아주 공평했다.
그러나 유저들이 모르는 숨은 페널티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갖고 있는 신체의 영향을 일부 받는 것인지 남자가 여자보다 힘이 셌고, 노인보다 청년의 체력이 월등히 나았다.
이 때문에 유저들이 이 부분에 대해 해명해줄 것을 ㈜판타스틱에 수차례 요구했지만, ㈜판타스틱 운영진은 그 부분 역시 환인이 컨트롤해 자신들은 아는 것이 없다는 답변만 했다.
“부모님이 게임하는 거 뭐라고 하지 않아?”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The Age of Hero 하셔. 식구 중에 The Age of Hero 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캡슐을 사거나 게임비를 낼 수준이 되는 대한민국 사람은 누구나 The Age of Hero했다.
캡슐을 살 능력도, 비싼 게임비를 낼 돈도 없는 가난한 사람만 The Age of Hero를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판타스틱이 The Age of Hero를 할 수 없는 극빈층을 위해 매년 100만 명에게 1년 무료 쿠폰을 나눠줬다.
그러나 The Age of Hero는 대한민국 사람만 하는 게임이 아니라서 국내 유저에게 돌아가는 몫은 10만 명밖에 안 돼 1,000만 명 이상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운동은 왜 그만둔 거야?”
“아침에 운동하러 가다가 차에 치여서 다리를 다쳤어.”
“많이 다쳤어?”
“심한 건 아니야. 발가락뼈가 부러진 게 전부니까.”
“단순히 발가락뼈가 부러진다고 운동을 그만두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냥 부러졌으면 깁스 한 달이면 나았을 상처였는데, 재수 없게 부러지면서 뼈가 휘어졌어. 붙인 다음 다시 부러뜨려서 뼈를 펴야 해 깁스만 3개월 넘게 했어. 덕분에 물리치료까지 거의 6개월 걸렸어. 이것만이면 다시 운동했을 텐데, 수술이 잘못돼 뼈가 썩어들어 가 잘라내고, 인조 뼈 박고 처음부터 다시 재활치료 했어. 한창 실력이 향상할 시기에 1년 6개월을 강제로 쉬게 된 거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관두게 됐어. 다시 달리려 했지만, 몸도 전처럼 움직이지 않고, 기록도 엄청나게 떨어졌거든.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그때는 기어 다니는 수준이었어.”
“마음 많이 아팠겠다.”
“그렇지도 않았어.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가 달리는 게 좋아서 한 거였지 메달을 따겠다는 생각에서 한 건 아니었거든. 그리고 선수가 아니어도 달리기는 언제든 할 수 있잖아. 조금 실망한 건 사실이지만, 낙담하거나 그러진 않았어.”
“그랬다면 다행이고. 어쨌든 아주 좋은 취미를 가졌네.”
“고마워. 넌 취미가 뭐야?”
“글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뭔지 모르겠다.”
취미가 뭐냐는 하린의 질문에 내 취미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러나 취미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저녁 늦게까지 일해야 간신히 먹고 살 수 있어 취미 가질 시간이 없었지만, 군대에선 특별한 일만 없으면 주말은 자유시간이라 원한다면 얼마든지 취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도 취미가 없었다. 선임과 후임들은 휴대폰으로 게임도 하고, 여자 친구도 만나고, 낚시도 하고, 야구경기도 보러 갔지만, 나는 노는 날에도 온종일 관사에 처박혀 대학 입시 공부만 했다.
부사관에 지원한 목적이 대학에서 공부할 학비를 버는 것이었고,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선 시간이 날 때마다 한 문제라도 더 풀어야 해 취미 가질 엄두도 못 냈다.
지난날을 생각하자 한심하단 생각과 함께 나 스스로 틀 안에 가둬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신없이 다그치지 않으면 다른 생각을 할까 봐, 누군가를 원망하며 인생을 망칠까 봐 목표를 정해놓고 그곳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린 것이다.
친구가 없는 것도, 군대 선임·후임과 가깝게 지내지 못했던 것도 결국 다 내 탓이었다.
파고들 틈을 주지 않는데 그들이 어떻게 내게 친하게 굴 수 있었겠는가. 내가 먼저 손 내민 적도 없는데.
‘다쳤을 때 전우들이 날 외면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구나. 그들은 날 전우로 생각하지 않았던 거야. 모두 내 탓이야. 내 잘못이었어. 하아.’
============================ 작품 후기 ============================
게임 소설이 맞다는 의견이 많아 게임 판타지 소설로 고쳤습니다.
의견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