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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시대-28화 (28/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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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데이트

28.

“내기는 재미 삼아 한 거야. 그리고 남녀 대결인데 똑같은 바퀴 수는 공평하지 못했어. 반칙이야.”

“재미든 아니든 진 건 사실이니까 내가 저녁 사는 게 맞아. 그리고 네가 특전사 출신이라고 해도 나는 육상선수 출신이야. 네가 불리한 게 아니라 내가 유리한 거였어.”

“부대에서 달리기 대표도 했어.”

“그렇다고 초등학교 때부터 달리기 선수 한 나랑 같을 순 없지. 안 그래?”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남자잖아.”

“남자면 무조건 이겨야 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얘기할수록 자존심 상하네. 전국체전에서 메달까지 딴 나를 이겼다고 자랑하는 것 같잖아. 도저히 안 되겠다. 가자.”

“어딜 가?”

“달리기 시합하러. 군부대 대표에게 진 내 자존심을 세워야겠어. 따라와.”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야.”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거든.”

“미안해.”

“미안한 거 알면 그만하고 고기나 먹어. 다 타잖아.”

“알았어.”

하린이는 외모와 달리 말투가 조금 거친 편으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 들으면 오해받을 소지가 컸다.

그러나 말투만 그런 것이지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어 조금만 마음을 열고 들으면 속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주 한잔 하자.”

“염증 생길 수도 있어.”

“상처에는 소주가 직방이야. 소주로 소독하면 금방 나아.”

“그러다 덧난다.”

“걱정하지 마셔. 워낙 건강해서 이런 상처는 며칠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대신 고집이 엄청나게 세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건 기필코 해야 했고, 승부욕도 강해 시합에서 지는 건 죽기보다 싫어했다.

“캬하! 역시 고기에는 소주가 최고야. 아우 맛있어.”

“술이 맛있어?”

“너는 싫어?”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하는 자리면 마시지만, 즐기지는 않아.”

“이 좋은 걸 왜 싫어해?”

“다음 날 일 해야 하는데 술 마시면 몸이 피곤해서 싫었어. 그리고 혼자 마시는 것도 처량해서 싫고.”

“술 마실 친구도 없어?”

“졸업하자마자 군대 가서 연락되는 친구가 몇 명 없어. 그리고 그 친구들도 지금은 대부분 군대에 있고.”

“한 명도 없다는 건 군대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 문제가 아닌가?”

“그럴 수도 있고.”

친구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학교 친구들과 밖에서 어울리지 못해 그렇지 교우관계는 원만해 친하게 지낸 친구가 몇 명 있었다.

그러나 군대에 가며 연락이 끊겨 현재 연락되는 친구는 2명밖에 없었다. 그중 1명은 올해 초 군에 입대해 만날 수 없었고, 두 달 전 술을 산 친구도 지방대에 있어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의기소침하긴. 이제부터 학과 애들 사귀면 돼. 걱정할 거 없어.”

“졸업하려면 돈 벌어야 해. 누굴 만날 시간이 없어.”

“The Age of Hero로 돈 번다고 하지 않았어?”

“어.”

“그러면 같이 사냥 다니며 사귀면 되겠네.”

“이제 겨우 3일 했는데, 누가 나와 같이 다니겠어.”

“나.”

“.......”

하린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하자 또다시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틀 전 전화로 월요일부터 도와준다고 했을 때 내심 기대했지만, 다음에 밥 먹자고 말하는 한국식 인사일 수도 있어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또다시 도와주겠다고 말하자 너무 기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댔다.

마음 같아선 소주 두 잔에 볼이 붉게 달아오른 하린을 품에 안고 연신 뽀뽀를 퍼붓고 싶었다.

그러나 우린 이제 만난 지 이제 고작 2번... 학교에서 본 것까지 해도 3번으로 아직 연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연인이 되려면 친구와는 뭔가 다른 리액션이 필요했다. 하지만 급하게 진도를 빼려 달려들면 순진한 여자는 겁을 먹고 달아난다.

그리고 나는 박해문 중사처럼 카사노바가 아니었다. 여자가 준다고 달려들어도 도망치는 바보이자, 하린이의 손만 스쳐도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미치듯 요동치는 숙맥이었다.

그런 숙맥이 먼저 여자에게 사귀자고 말하는 건 지구 종말이 오기 전에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술은 언제 배웠어?”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빠가 18살 됐다고 그때부터 한 잔씩 주셨어. 너는?”

“군대 있을 때 배웠어.”

“많이 늦었네.”

“그런가?”

“그럼. 요즘 아이들 늦어도 고등학교 때는 다 배워. 너처럼 아저씨 돼서 술 배우는 애들 없어.”

많은 청소년이 고등학교 때 술을 배웠다. 대부분 친구와 어울려 다니며 어른들 몰래 한 잔씩 마시며 배운 것으로 배웠다기보단 알아서 터득했다는 말이 어울렸다.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주사가 없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맞는 말도 아니었다.

가르치는 어른이 제대로 된 사람이면 그럴 가능성이 크지만, 입으로만 인격을 나불대는 사람이면 나쁜 영향만 받게 된다.

그리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품이 나쁘다면 좋은 스승 밑에서 배워도 하는 짓은 개망나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자기 마음가짐으로 실수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멋진 주당이 되는 것이고, 내 멋대로 놀겠다고 하면 술만 마시면 지랄 떨고 발광하는 주정뱅이가 되는 것이었다.

“가족은 어떻게 돼?”

“지난번에 말했잖아.”

“그거 협박하려고 한 얘기 아니야?”

“진짠데. 아빠, 엄마, 오빠, 언니, 여동생 이렇게 여섯 식구야.”

“대가족이네.”

“대가족은 무슨 남들이 적게 나서 그렇게 보이는 거지 우리 식구 많은 거 절대 아니야. 가장 이상적인 숫자야. 그러는 너는 어떻게 되는데?”

“혼자 살아.”

“그건 이미 들어서 아는 내용이고. 가족 관계를 말해.”

“부모님 두 분 모두 살아계셔.”

“왜 혼자 사는지 물어봐도 돼?”

하린이가 조심스럽게 부모에 관해 물어봤다. 다른 사람에게 부모 얘기를 한 적은 은하가 처음이었다.

그때처럼 부모 문제로 사이가 나빠지는 건 아닌지 걱정됐지만, 배려심이 남다른 하린이의 성격을 믿고 말하기로 했다.

“이혼했어.”

“언제?”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혼자 산 거야?”

“어.”

“왜? 어머니든 아버지든 한 분 따라가면 되잖아.”

“두 분 다 이혼하기 전에 결혼할 상대가 있었어. 이혼하고 몇 달 후 결혼하셨고. 그래서 날 돌볼 형편이 안 됐어.”

“.......”

부모에게 버림받았다고 말하는 건 죽기보다 싫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돌려서 말했다.

그러나 바보가 아니라면 버려졌다는 걸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로 이혼했다고, 결혼할 상대가 있다고 고등학교 1학년짜리 어린 자식을 헌짚신처럼 버리는 부모는 없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 아주 잘 살았어. 아파트도 한 채 받았고, 생활비도 매달 꼬박꼬박 주셨어.”

“아르바이트 언제부터 했어? 이혼하고 바로 시작했지?”

“용돈 벌려고 한 거야.”

“그렇게 잘 사는데 이혼하자마자 아르바이트하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학비 벌겠다고 직업군인을 가? 지금 그 말을 나보러 믿으라는 거야? 너는 내가 바보로 보이니?”

“하아.”

한 말이 없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하린이 조용히 소주잔을 내밀었다. 살짝 부딪친 후 쓰디쓴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쓰디쓴 소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씁쓸한 기분이 사라지기는커녕 잊고 있던 분노가 스멀스멀 끓어올랐다.

술을 잘 먹지 않는 이유는 맛도 없고, 같이 마셔줄 친구도 없어서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참았던 울분이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세상에 버려지는 건 몽둥이로 죽도록 맞는 것보다 만 배는 더 아픈 상처였고, 상처도 가슴 속 깊이 남아 치료할 수도 없어 매일 밤 찢어지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이 때문에 분노가 가슴에 가득 쌓였다. 이성을 잃지 않을 땐 분노를 억제할 수 있지만, 본능이 이성을 잡아먹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 술을 피했고, 지난 일을 생각하는 것도 피했다.

“물어본 김에 하나만 더 물어보자. 부모님은 뭐하시는 분이야?”

“... 대학교수.”

“두 분 모두?”

“어.”

“정말 놀랍다. 하아.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온다. 어떻게 대학교수나 되시는 분들이 그럴 수 있지?”

“대학교수도 사람이야. 우리와 다를 거 없어.”

“그래도 이건 아니지. 가장 지성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대학교수 부부가 아들을 버린 거나 마찬가지잖아.”

“하아.”

부모가 대학교수라는 말에 하린이 크게 화를 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대학교수 부모가 자식을 버리듯 방치했다면 화날 얘기였다.

하물며 나에게 깊은 호감을 느낀 하린이 그 얘기를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면 내가 섭섭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지성적인 사람이 누구냐고 사람들을 물으면 10명 중 7~8명은 대학교수를 꼽았다.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대학교수가 많아 위상이 크게 추락해 예전 같진 않았지만, 머리가 좋고 아는 게 많다는 이유로 아직도 많은 사람이 대학교수를 가장 큰 지성인으로 생각했다.

그런 지성인이 한 명도 아닌 부부가 고등학교 1학년 아들을 버리고 재혼했다는 건 명백한 범죄로 아동·청소년 학대와 유기에 해당했다.

그러나 나를 버린 부모는 아파트 한 채와 생활비를 꼬박꼬박 줘 유기한 게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이 혼자 밥해 먹고, 학교에 다니고, 생활비가 모자라 3년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다면, 더군다나 8년 동안 전화 한 통 없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세상 사람 누구도 부모 편을 들지 않을 것이다.

“따로 산 이후로 만나봤어?”

“아니.”

“한 번도 안 만나봤어?”

“어.”

“전화는?”

“번호도 몰라.”

“진짜 너무했다. 어떻게 6년 넘게 연락도 한 번 안 할 수 있냐.”

“괜찮아. 차라리 모르고 사는 게 속 편해.”

“정말 괜찮아? 나라면 괜찮지 않을 것 같아. 화가 나서 못 참을 것 같아. 찾아가서 내가 딸이라고 소리치며 다 때려 부술 것 같아.”

“그것도 애정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야. 같이 사는 동안 전혀 행복하지 않았어. 혼자 있는 게 훨씬 편하고 행복했어.”

이 말은 사실이었다. 버려졌다는 것에 대한 울분은 가득했지만, 혼자가 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악성 댓글보다 더 무서운 게 댓글조차 없는 무관심이라고 했다. 사람이 가장 참기 힘든 게 바로 이 무관심으로 어린 시절 부모는 나를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소 닭 보듯 한다는 말처럼 마주쳐도 쳐다보지도 않았고, 말조차 걸지 않았다. 무관심을 넘어 철저한 무시였다.

유일하게 관심 보일 때가 성적표 나온 날로 아주 잠깐이지만, 그 날은 성적이 어떻게 되는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나를 생각해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들 얼굴에 먹칠할까 봐 그래서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부모는 얼굴만 마주치면 싸우는 게 일로 소리치며 싸우는 건 기본이었고, 물건도 마구 던져 부서진 접시 파편이 거실과 주방을 총알처럼 날아다녔다.

이런 부모와 함께 사는 건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따로 살자 모든 걸 내가 해결해야 해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편했다.

이런 마음은 버려진 것에 대한 분노와는 별개로 다시 뭉치자고 손이 발이 되게 빌어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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