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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데이트
27.
“내가 지금 라면으로 연명하는 백수의 고혈을 빨아먹으려고 하는 거였어? 이건 아니지.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이야.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그 정도로 가난하진 않아. 그만해.”
“원룸 살면서 가난하지 않다니 그걸 말이라고 해?”
“그 말도 맞네. 나 가난해.”
“그렇다고 기죽지 마. 가난한 거 죄 아니니까. 그리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어.”
“알았어.”
원룸 사는 사람 중에도 잘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사는 원룸은 우리가 생각하는 원룸이 아니었다.
말이 원룸이지 소형 아파트보다 더 큰 초호화 원룸으로 가난한 대학생은 꿈도 꿀 수도 없는 비싼 가격이었다.
5,000만 원짜리 원룸이면 괜찮은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학가 근처에는 2~3억 원이 넘는 원룸 전세도 아주 흔했다.
5,000만 원짜리는 아주 저렴한 편으로 오래된 낡은 원룸이 아니면 전세가 아닌 월세를 구해야 했다.
내가 사는 원룸도 20년 된 낡은 건물로 최근 새롭게 짓는 원룸과 비교하면 크기도 좁고 시설도 매우 열악했다.
이 때문에 침대 옆에 캡슐을 설치하자 앉을 자리가 없어 밥은 싱크대에 서서 먹었고, 화장실도 걸핏하면 막혀 뚫어뻥으로 뚫어야 했다.
이뿐만 아니라 층간 소음도 엄청나게 심해 까치발을 들고 다녀야 했고, 옆집 여자가 남자라도 데리고 오는 날이면 귀를 막아야 할 만큼 신음과 침대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지갑에 얼마 있어?”
“그건 왜?”
“돈도 없는데 밥 산다고 한 것 같아 불안해서 그런다.”
“밥 살 돈 있어.”
“빨리 말해. 비싼 거 먹고 돈 없다고 덤터기 씌우지 말고.”
“흐음... 10만 원 있어.”
“그거면 삼겹살은 먹을 수 있겠네. 그 정도는 살 수 있지?”
“더 비싼 거 먹어도 돼.”
“나 얼굴은 곱상하게 생겼지만, 입은 무지하게 싼 편이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빨리 가자. 배고프다.”
메뉴를 정한 하린이 성큼성큼 걸어 으슥한 골목 안에 있는 허름한 삼겹살집으로 들어갔다.
학교 입구의 화려한 고깃집이 아닌 외진 골목에 위치한 고깃집은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기도 힘들 만큼 구석에 있었다. 더군다나 가격도 삼겹살 1인분에 7,000원밖에 안 했다.
대학가 주변도 프랜차이즈 업체와 고급 레스토랑, 커피숍이 점령하며 값싼 음식점을 구경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주머니가 얇은 학생들은 학교 구내식당에서 점심과 저녁을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호시탐탐 가격 인상을 노리며 비싼 음식점까지 입점시키려는 사학재단의 꼼수에 언제 값싼 구내식당이 사라질지 몰라 호주머니 사정이 열악한 학생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으슥한 골목 안 고깃집을 서성이지 않고 단번에 찾아 들어간 것으로 보아 자주 오는 집이 분명했다.
주인아주머니도 하린이를 기억하는지 반갑게 맞으며 이름을 불렀고, 하린이도 옆집 아줌마를 대하듯 친근하게 대했다.
“아줌마, 여기 삼겹살 2인분하고, 소주 한 병 주세요.”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네.”
“학교 근처에서 이 집이 가장 싸고, 고기 맛도 가장 좋아. 너도 먹어보면 단번에 단골될 거야.”
“이 집 자주와?”
“어.”
“아주 구석에 있는데 어떻게 알아낸 거야?”
“나 이 동네 토박이야. 그래서 골목에 무슨 가게 있는지 다 알아. 그리고 이 고깃집은 아빠가 20년 넘게 다닌 단골집이야. 그래서 꼬맹이 때부터 왔어. 아줌마와 친한 것도 그 때문이야.”
“아아 그렇구나.”
돈이 얼마 있냐고 물어봤을 때 기분이 언짢았다. 그런 말은 허물없는 남자친구끼리도 잘 하지 않았다.
듣기에 따라선 상대를 무시하는 말이 될 수도 있어 농담이라도 물어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생각도 깊고 배려심도 깊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을 잘못 봤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났다.
그러나 하린은 그런 의도로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혹시나 내가 곤란할까 봐 그래서 물어본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내 처지를 생각해 비싼 걸 먹을 생각도 없었다. 그 마음을 알자 미안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또한, 고마움에 하린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특전사는 왜 간 거야?”
“대학교 다닐 학비 벌려고 갔어.”
“군대를 학비 벌려고 가는 사람도 있어?”
“대학은 나와야 사람 취급받는 세상이잖아. 그리고 한 번은 가야 할 군대였어. 시간 끄느니 빨리 다녀와 학업에 열중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나쁜 생각은 아닌데, 왠지 우울하다. 우리나라는 언제쯤 학벌 지상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거야. 학연 지연으로 얽히고설킨 사회니까.”
“네 말이 100번 맞다. 어딜 가나 학연 지연 타령이니까. 아주 지긋지긋해.”
어처구니없는 현실이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싸워야 하는데, 학연과 지연은 오랜 세월 흐르며 고착화된 사회적 통념으로 내가 문제를 제기한다고 바뀌는 게 아니었다.
바꾸려면 세상을 엎을 힘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는 라면 한 개도 조리법대로 끓여 먹지 못하는 가난한 영세민이었다.
The Age of Hero로 따지면 농노와 다를 것이 없는 천한 존재로 밟으면 밟히는 대로, 걷어차면 걷어차이는 대로 살아야 하는 힘없는 대한민국 청년 노예였다.
“그래서 학비는 벌었어?”
“벌었지. 그런데 팔 다쳐서 병원비로 다 들어갔어.”
“군대에서 다친 팔을 왜 네가 병원비를 내?”
“내가 관리를 못 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군대에서 고쳐줄 수 없다고 했어. 그래서 내 돈 주고 고쳤어. 그것도 완전하지도 못하게.”
“다 나은 거 아니었어?”
“다 나았어. 예전만큼 힘을 쓸 수 없어서 그렇지.”
완전하지 않다고 하자 하린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내 눈을 바라봤다. 눈물이 고이진 않았지만,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따뜻했다. 누군가 자신을 따뜻한 눈으로,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은하 이후 6년 만에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이 생기자 가슴이 뭉클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아도 돼. 생활하는데 아무런 지장 없어.”
“정말?”
“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
“그런데 어떻게 다쳤는데 자비로 치료하래?”
“국군의 날 행사 연습하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졌어.”
“발을 헛디딘 거야?”
“아니. 밧줄이 끊어졌어.”
“밧줄이 끊어지면 장비 문제잖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잖아?”
“어.”
“그런데 수술도 시켜주지 않고 쫓아내? 그게 말이 되는 짓이야?”
“엄밀히 말해 쫓아낸 건 아니야. 1년 가까이 참으며 훈련하다가 더는 버티지 못해 내 발로 걸어 나왔어.”
“정말 어이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군대에서 훈련하다가 다치면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게 맞는 거잖아. 그렇지?”
“그렇지.”
“그것도 안 해주면서 국방의 의무라고 사람 억지로 끌고 가서 자기들 멋대로 부려먹다가 쫓아내는 게 맞는 짓이야?“
“하아.”
“이래서 엄마들이 아들 군대 안 보내려 기를 쓰는 거였어. 고참이 때려 죽은 것도 은폐하고, 사고로 죽어도 자살로 처리하는데, 어느 부모가 군대에 자식을 보내려고 하겠어. 나라도 안 보네.”
매년 군대에서 죽거나 다치는 병사가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낡은 시설과 안전 불감증, 폭행 등이 주요 원인으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국방부 장관은 입버릇처럼 개선을 약속했다.
그러나 사건이 터졌을 때만 개선하는 척 요란법석을 떨었지, 국민의 관심이 멀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원위치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또다시 사고가 터졌다. 그러면 다시 뻔뻔한 얼굴로 나타나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그런 일이 수십 년째 반복됐지만, 폐쇄적인 군대는 오늘도 변함없이 젊은 청춘의 고귀한 생명을 집어삼켰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나처럼 본인의 과실이 아닌 장비 노화로 생긴 상처도 부대의 강압적인 분위기와 부대장의 자기 몸 챙기기에 급급해 치료도 못 받고 전역하는 장병도 있었다.
설령 본인 과실이라도 관리·감독에 대한 책임은 군에 있었다. 그렇다면 다친 병사가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아낌없이 치료해줘야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은 자식 걱정에 밤잠을 설쳤고, 일부는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불법도 서슴지 않았다.
자기 자식만 귀하게 여겨 병역비리를 저지르는 것도 문제지만,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안전하게 집에 돌아갈 수 있게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대한민국 정부와 국방부도 문제였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죽을 때까지 매일 자식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부모를 생각한다면... 자식을 버린 부모도 있지만... 병사들이 국방의 의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몸 건강히 제대할 수 있게 국가는 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해야 한다.
그래야 부모도 마음 놓고 자식을 군대에 보내도, 젊은 친구들도 자발적으로 군대에 가 국가를 지키는 의무를 다할 수 있었다.
지글지글
“고기 탄다. 어서 먹어.”
“어.”
“식으면 맛없어. 빨리 먹어.”
“알았어.”
삼겹살을 연탄불 위에 올리자 뜨거운 화력에 순식간에 익었다. 능숙하게 고기를 구운 하린이 내 접시에 잘 익은 고기를 올려주었다.
내 접시에 음식을 놓아준 사람은 유모와 헤어진 은하 이후 하린이가 처음이었다. 별것 아닐 수도 있는 행동이지만, 내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람의 정을 느끼게 해주는 가슴 뭉클한 일이었다.
하린이 정성스럽게 구워준 고기를 소금장에 살짝 찍어 입에 넣고 씹자 육즙과 고소함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제대하고 고기 먹어본 날이 손에 꼽혀 소가죽을 씹어도 맛있었다. 그러나 하린의 말처럼 육즙이 가득하고, 냄새도 없고, 씹는 맛도 좋은 게 태어나 먹어본 고기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맛있는 고기였다.
그리고 하린의 정성과 사랑(?)까지 더해지자 평생 먹어본 고기 중 지금 먹은 고기기가 가장 맛있었다.
“어때? 맛있지?”
“어. 정말 맛있다.”
“내가 맛있다고 했잖아. 헤헷.”
“좀 더 좋은 곳으로 가도 됐는데.”
“분위기 별로야?”
“아니. 더 맛있는 거 사주고 싶어서.”
“원래 내가 사야 하는 저녁이었어. 억지를 부려 얻어먹는 건데, 양심은 있어야지. 그리고 나 프랜차이즈 음식 안 좋아해. 느끼하고 달아서 내 입에 맞지 않아. 분위기도 정감 있는 이런 옛날 고깃집이 좋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집만큼 맛있는 고깃집 서울에서 찾기 쉽지 않아. 정말 맛이거든.”
허름한 고깃집을 좋아한다는 하린의 말이 믿지 않았다. 수수하게 입어서 그렇지 꾸미면 누구보다 화려한 미모를 갖고 있었다.
그런 고급스러운 미녀가 연탄불 연기가 자욱한 대폿집 분위기의 삼겹살집을 좋아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그러나 주인아주머니와 친한 모습과 고기 굽는 실력을 보자 거짓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이런 생각을 한 건 내가 하린이를 잘못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예쁜 여자는 허영심이 가득하고, 도도하며, 잘난 맛에 산다는 선입견을 품고 있어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양파처럼 까면 깔수록 때 묻지 않은 깨끗한 속살을 드러내는 하린의 모습에 오랫동안 굳어졌던 선입견이 와르르 무너졌다.
============================ 작품 후기 ============================
가족 모임이 있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게임 소설이냐, 판타지 소설이냐 또다시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독자님들께 묻습니다.
게임 소설이 맞다면 1, 판타지 소설이 맞다면 2 번을 눌러주세요. ^^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