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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시대-24화 (2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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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과 평판

24. 업적과 평판

“확장 공사는 언제부터 시작하기로 했나?”

“모레부터 시작합니다.”

“이곳은 너무 협소해서 확장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

“건너편에 조르주 준 남작이 사용하던 사우나가 있습니다. 그곳을 대장간으로 개조하기로 했습니다.”

“사우나?”

“네.”

“아아. 집사가 말한 사우나가 그거였군.”

다니엘이 대장간을 넓힐 공간이 영주성 안에는 사우나밖에 없다고 해 그곳을 대장간으로 개조하라고 했다.

사우나는 조르주 준 남작이 지은 것으로 놈은 가뜩이나 비좁은 영주성에 자기 혼자만 사용하겠다고 커다란 사우나를 만들었다.

대리석과 나무로 만든 사우나는 크기가 100평으로 가운데는 20명은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목욕탕이 있었고, 맥반석 사우나, 옥 사우나, 황토 사우나 등 다양한 사우나도 마련돼 있었다.

또한, 3~4명은 굴러도 될 만큼 커다란 침대가 놓인 아늑한 침실까지 사우나 안에 있어 사우나와 함께 오입질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이런 거지 같은 새... 하아.”

사우나를 내 눈으로 확인하자 욕이 튀어나오려 했다. 욕해봐야 내 입만 더러워진다는 생각에 튀어나오려는 욕을 간신히 참았다.

욕한다고 수도 크라쿠푸스로 도망간 조르주를 잡아다가 주리를 틀 수도 없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욕을 백만 번도 더 할 수 있었다.

영지를 가진 귀족의 힘이 막강해도 황제와 비교하면 남작은 태양 앞에 반딧불 같은 존재였다.

내가 커다란 영지를 가진 상급 귀족이면 모를까 황제가 임명한 관리를 고작 사우나(?) 한 채 지었다고 불러서 두들겨 팰 순 없었다.

강한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The Age of Hero에선 힘이 없으면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야지 깝죽대다간 목이 날아갔다.

“철광석을 녹여 강철을 만들려면 용광로가 필요한데, 사우나만으론 너무 좁은 거 아니야?”

“용광로는 철광석 마을에 있습니다. 거기서 불순물을 제거한 후 이곳으로 가져오면 필요한 무기와 농기구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대비해 이곳에서 작은 용광로를 설치해 운영할 계획입니다.”

“부족하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다니엘에게 말해. 그러면 내가 최대한 들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영주님.”

입맛에 맞게 대장간을 꾸미라는 말을 남기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집무실에 들어서자 레이첼이 쌉쌀한 녹차를 내왔다.

내가 돌아다니는 걸 창문에 매달려 보고 있었는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따뜻한 녹차를 내왔다.

“옥상에도 망루 있지?”

“네.”

“애들 달리는 거 구경하러 가자.”

“네.”

레이첼을 데리고 옥상 망루로 올라가 농노들이 달리는 걸 구경했다. 영주성의 둘레는 대략 500m 정도로 100바퀴면 50km였다.

50km면 마라톤보다 먼 거리로 일반인은 천천히 걷다시피 뛰어도 완주하기가 힘든 거리였다.

이 때문에 30바퀴쯤 돌면 낙오자가 무더기로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50바퀴를 도는 동안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었다.

성벽 외곽은 폭이 1m밖에 안 됐고, 바닥에는 뾰족한 돌도 많았다. 성벽을 넘어오는 적을 대비해 그렇게 만든 것으로 평평한 트랙을 달리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험난한 길이었다.

그리고 가난한 농노는 태어나 한 번도 신발이란 걸 신어본 적이 없어 모두 맨발로 달려 가시밭길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런데도 153명 모두 아주 잘 달렸다. 마라톤 선수라도 되는지 달리는 자세도 안정됐고, 뛰는 보폭도 런닝화를 신은 것처럼 성큼성큼 달렸다.

“생각보다 잘 달리네.”

“시골 영지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일하는 것 빼고 달리는 게 전부죠.”

“달리는 게 전부라고? 왜?”

“잘 달려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자들도 잘 달려요.”

“몬스터 때문에 그런 거야?”

“네.”

열심히 달리고 있는 농노들은 못 먹어서 부실하긴 했지만, 15~16세까지 살아남았다는 건 건장한 청년이라는 뜻이었다.

중세 시대 유아 사망률은 경악할 정도로 심각해 신생아의 30%가 태어난 지 1년 안에 사망했다.

수명 역시 매우 짧아 18세기 후반 영국 런던의 평균 수명은 23세, 중국은 26세, 일본은 33세에 불과했다.

이처럼 평균 수명이 30대를 못 넘긴 건 높은 유아사망률과 형편없는 위생관념 때문이었다.

영국보다 중국과 일본의 평균 수명이 긴 건 위생에 기인한 것으로 중국과 일본이 영국보다 목욕횟수가 두 배 가까이 앞섰고, 화장실 역시 7~8가구가 달랑 한 개로 연명할 만큼 영국은 비위생적인 국가였다.

내 영지의 유아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그래도 다른 영지와 비교하면 많이 낮은 편이었다.

그건 영주성 왼쪽을 통과해 남쪽에 커다란 호수를 만든 토리노 강의 지류 덕분으로 물이 풍부해 자주 씻어 병이 덜 걸렸다.

그러나 화장실이 없어 전염병이 생기면 마을 전체에 퍼져 아까운 생명이 허무하게 죽었다.

이 때문에 화장실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깨끗한 화장실만 있어도 병으로 죽는 농노의 수를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었다.

잘 달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레이첼의 말은 가장 안전한 영주성 영역 안에도 몬스터가 자주 출몰해서 한 말이었다. 최소 한 달에 10번은 울타리를 넘어와 농노들을 상하게 했다.

농지와 목장에 둘러싸인 영주성 영역은 튼튼한 성벽으로 보호받는 영주성과 달리 낮은 나무 울타리가 전부였다.

영화에서 보면 엄청나게 넓은 성을 높은 성벽으로 둘러싼 모습이 종종 나온다. 그러나 그런 성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 식으로 성벽을 쌓으려면 수백만을 동원해 수십 년간 성벽을 쌓아야 가능했다. 내 영지처럼 작은 영지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농노들을 죽어라 몰아붙여 성벽을 쌓는다고 해도 지킬 병력이 없었다. 성벽은 알아서 적을 막아주지 않았다. 병사와 무기가 있어야 몬스터와 적을 막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몬스터가 나타나면 일단 도망가고 봐야 했다. 재빨리 도망가 경비대에 알려야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그래도 10레벨 이하 몬스터가 1~2마리 넘어오면 남자 농노들이 사냥했다. 영주성 영역을 둘러싼 숲에서 나오는 몬스터는 대부분 10레벨 이하 몬스터로 울타리를 넘어와도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15~20레벨 늑대와 20~25레벨 흑곰이 넘어오면 얘기가 달라졌다. 이놈들은 경비대가 출동해야 막을 수 있는 놈들로 걸음도 빨라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먹을 것이 부족한 농노들은 건장한 남자 농노들이 숲에 들어가 먹을 것을 구하거나 동물을 사냥하기도 했다.

이럴 때도 위험한 동물과 몬스터가 나오면 믿을 건 달리기밖에 없어 젊은 농노는 대체로 잘 달렸다.

“집사에게 얘기 들었지?”

“네.”

“앞으로 시녀들과 관련된 일은 모두 네 소관이야. 집사에게 말하지 말고, 나에게 보고해.”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무조건 잘해야 한다. 개판 치면 내 꼴 우스워진다.”

“겁주지 마세요. 안 그래도 무서워 죽겠어요.”

“지금처럼만 하면 돼. 그리고 하다가 어려운 일 있으면 내게 말하고.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영주님. 실망시켜 드리지 않게 열심히 할게요.”

“잘할 수 있을 거야. 믿어.”

군대에서 보고 단계가 많을수록 업무 효율은 떨어지고, 잡음만 많다는 걸 겪어봐서 레이첼에게 시녀들과 관련된 일을 모두 맡겼다.

군에 입대하기 전까진 대한민국 군대가 대한민국에서 보고 체계가 가장 빠른 줄 알았다.

그러나 작은 일 하나도 결재 받는데 몇 사람이나 거쳐야 했고, 중간에 확인한다고 다시 되돌아오는 일도 잦아 1~2분이면 처리할 수 있는 일이 며칠이 걸릴 때도 있었다.

그리고 불합리한 절차에 대해 개선을 요구하면 군대만의 원칙이 있다는 말로 요구를 묵살했다.

이런 모습을 5년 동안 겪자 사회에 나가 회사를 차리면 타부서의 협조를 얻어야 하거나 중간 관리자의 조언이 꼭 필요한 업무가 아니면 다이렉트로 연결해 바로 지시를 내리는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원하던 사장이 아닌 영주가 됐지만, 이때의 다짐은 변하지 않아 복잡한 영주성 보고 체계를 싹 고칠 계획의 신호탄으로 레이첼을 시녀장으로 앉히고 집사에게 있던 시녀에 관한 전권을 레이체에게 넘겼다.

망루에서 내려다보자 저 멀리 1,000명 가까운 농노들이 땅을 파고 흙과 돌을 나르는 모습이 보였다.

화장실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300명씩 나뉘어 세 군데에서 동시에 작업을 진행하자 제법 속도가 났다.

“농노들 점심은 어디서 만드는 거야?”

“성 밖에 솥을 걸고 만들고 있어요.”

“누가 만드는데?”

“주방 시녀 20명이 지원 나갔고, 남은 음식을 싸주는 조건으로 아주머니 100명을 동원했어요.”

“음식 넉넉하게 준비했어? 땅 파고 흙 나르는 거 중노동이야. 밥이라도 잘 먹여야 뒤에 가서 욕을 덜 하지.”

“그러고 있어요. 그리고 아무도 영주님 욕하지 않아요.”

“힘든 일 시키는데 왜 욕을 안 해?”

“화장실 만드는 거 농노들을 위한 일이잖아요. 그리고 점심까지 먹여주고요. 조르주 준 남작님이 있을 땐 상상도 못 한 일이에요. 온종일 일만 시켰지 먹을 건 한 번도 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양을 30마리나 잡아 스튜를 끓이고, 밀가루 빵도 먹게 해주셨잖아요. 농노는 그런 고급 음식 평생 한 번도 먹기 힘들어요. 그래서 모두 감사하고 있어요. 진심으로요.”

“일 시켜서 주는 거야. 공짜로 주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좋은 일 했다는 소리가 부담스러우세요?”

“그만해.”

“호호호호. 알았어요.”

내 영지의 주요 생산품 중 하나가 양털과 양고기로 목장에 있는 가축 대부분이 양이었다.

밭 갈 때 쓰는 귀한 소는 30마리도 안 됐고, 사람과 같은 음식을 먹는 돼지는 50마리, 타고 다니는 말도 20마리가 전부였다.

주요 생산품에 양고기가 들어가지만, 숫자는 2,000여 마리밖에 안 돼 많은 수를 한꺼번에 잡는 일은 없었다.

양고기는 밀과 콩, 보리, 감자와 함께 국경수비대에 보내는 것으로 농노들은 양이 걸어간 국물도 맛볼 수 없었다.

그런 귀한 양을 30마리나 잡자 화장실 공사에 동원된 농노들이 신이 나서 자발적으로 일했다.

더군다나 곱게 갈은 밀가루 빵까지 준다고 하자 굴착기를 동원해 땅을 파는 것처럼 땅이 푹푹 파여 나갔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사람에게 가장 큰 만족감은 먹는 거였다. 먹는 것이 이들에겐 유일한 행복으로 맛있는 음식을 배터지게 먹게 해준다고 하자 없던 힘도 솟아나 슈퍼맨처럼 일하며 한목소리로 나를 칭송했다.

레이첼의 말을 듣자 영화 웰컴 투 동막골(Welcome To Dongmakgol)의 명대사가 떠올랐다.

"촌장동무, 거....고함 한 번 안 치고 부락민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그...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이 뭡네까?"

"머를 마이 멕여야지 머...“

배부르게 많이 먹이는 게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이라고 말한 촌장의 말처럼 평생 배고픔에 허덕인 농노에게 내려준 양고기 스튜와 하얀 밀가루 빵은 단번에 이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축복이었다.

“영주님, 식사하실 시간이세요.”

“그래. 내려가자.”

레이첼을 따라 1층 식당으로 내려가 농노들에게 내려준 것보다 2배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다.

내가 정치인이라면 농노들에게 표를 얻기 위해 앞치마를 두르고 스튜를 떠주며 빵을 나눠주는 마음에도 없는 퍼포먼스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영지의 주인으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 수 있었고, 그런 가식적인 행동이 농노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창 배식 중인 성 밖 천막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내가 나타나면 바닥에 코를 처박아야 하는데, 진창에 코 처박고 맛있게 음식 먹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것이 농노들을 생각하는 행동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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