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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시대-21화 (2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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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맥불변(菽麥不辨)

21.

“아침부터 시작했다고 하더니 그새 푹 빠졌나 보네.”

“The Age of Hero 모르면 바보 소리 듣는다고 해서 열심히 하고 있어.”

“내일은 아르바이트 없어?”

“어제부로 잘렸어.”

“게임하려고 아르바이트 그만둔 건 아니고?”

“아니야. 여자 직원으로 바꾼다고 그만 나오라고 했어.”

“무슨 아르바이트 했는데?”

“편의점 아르바이트.”

“열심히 사네.”

“다들 그렇지 뭐.”

열심히 산다는 하린이에 말에 웃음이 나왔다. 정말 열심히 살았다. 죽지 않기 위해, 죽지 않으려고 앞만 보고 달렸다.

돌이켜 생각하면 허무하고 씁쓸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달려왔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고민했다면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까지 하며 버티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비참하고 한심했다.

“남자가 사장이지?”

“어.”

“예쁜 여학생이 아르바이트 하겠다고 왔나 보네. 그렇지?”

“어떻게 알았어?”

“내가 촉이 좋거든. 헤헤헤헤.”

“그런 것 같네. 단번에 맞히는 거 보니까.”

“너무 낙담하지 마. 원래 인생이 그래. 훌훌 털어버려.”

“잊은 지 오래야.”

“오오 아주 쿨한데.”

“쿨한 척하는 거야. 사실은 기분 별로였어.”

“쿨한 척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야. 생각보다 성격 좋은데.”

“고마워.”

“다시 아르바이트 잡아야겠네?”

“학교에서 만난 동생이 The Age of Hero 하는 게 아르바이트하는 것보다 낫다고 해서 한 번 해보려고.”

“장비가 없으면 쉽지 않을 텐데. 지금 어디서 하고 있어?”

“작은 영지에서 하고 있어.”

“수도에서 시작하지 않고 왜 작은 영지를 택했어?”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바보!”

“하하하하.”

바보라는 말에 화가 나긴커녕 기분이 좋았다. 정말 바보라서 그런 게 아니라 하린의 말에서 정이 느껴져서 그랬다.

“수도에서 멀어?”

“어.”

“다음 주 월요일부터 수업인데 학교는 어떻게 오려고?”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갈 수 있어.”

“너 장비 없어서 창피해서 나 피하려 거짓말하는 거지?”

“아니야. 진짜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 말이 맞는 거 같은데. 창피해서 피하는 거. 킥킥킥킥.”

“그래. 맞아. 허접이라 창피해서 피했어.”

영주라고 말할 수 없어 하린이의 말이 맞는다고 했다. 좀 더 친해지면 밝히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내가 도와줄게. 나 이래 봬도 상위 1% 안에 드는 궁수야. 나랑 파티 맺고 40레벨 몬스터 사냥하면 포인트 금방 올릴 수 있어. 장비야 100% 운이라 장담할 수 없지만.”

자신 있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전체는 아니더라도 장비의 절반은 레어 아이템으로 맞춘 게 분명했다.

고급 아이템으로 장비를 모두 맞추면 40레벨 이하 몬스터는 무난히 사냥할 수 있었다.

그러나 40레벨 이상부터는 공격력과 방어력, 움직임이 1.5배 증가해 최소 무기는 레어 아이템으로 맞춰야 사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냥은 몬스터 한 마리를 잡고 끝내는 게 아니었고, 한 마리씩 달려드는 것도 아니라서 오랫동안 사냥하려면 장비 전체를 레어 아이템으로 맞춰야 40레벨 이상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었다.

레어 아이템 가격은 1,000만 원에서 1억 원 사이로 장비의 절반이 레어 아이템이면  싸게 잡아도 억대가 넘었다.

가격도 엄청났지만, 자기 특성에 맞는 아이템 맞추기도 쉽지 않아 상위 1%라는 말처럼 대단한 실력자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어디야? 내가 그리로 갈게.”

“오늘은 그만 자려고. 처음이라 그런지 많이 피곤해.”

“처음에는 머리가 많이 아파. 하지만 며칠 지나면 괜찮아.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았어.”

“그러면 내일 도와줄까?”

“내일은 일 있어서 안 돼. 월요일 수업 끝나고 도와줘.”

“그래. 그런데 캐릭터 이름이 뭐야?”

“모모.”

“모모면... 아동문학에 나오는 꼬마 소녀 모모?”

“맞아.”

“나는 하린. 내 이름 그대로 했어.”

“나도 이름으로 할 걸 그랬나?”

“모모 이름 좋은데 왜 그래?”

“그래?”

“어. 아주 좋아. 마음에 들어. 예뻐!”

“사실은 군대에서 사용하던 콜사인이야.”

“콜사인이 뭐야?”

“작전 때 이름 대신 쓰는 암호야. 가짜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돼.”

“군대 있을 때 위험한 작전도 했어?”

“아니. 편한 보직이라 놀고먹었어.”

“놀고먹는데 콜사인이 있어?”

“재미로 만든 거야.”

놀고먹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중사로 진급하고 1년 넘게 동안 레바논 XX 부대에 있었다. 그곳에서 경호, 수송, 지뢰제거 등 아주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중에는 인질 구출 작전과 테러리스트에게 빼앗긴 기밀문서를 찾아오는 임무도 있었다.

인질 구출 작전 때 총격전이 벌어져 부대원 3명이 총에 맞았고, 한 명은 과다출혈로 죽었다.

기밀문서를 다시 찾아오는 임무 때는 선임 한 명이 칼에 찔려 죽었고, 두 명은 총을 3발 넘게 맞아 병신이 됐다.

다행히 나는 총에 맞거나 칼에 찔리지 않았지만, 바로 옆에서 수류탄이 터져 죽을 뻔했었다.

재빨리 몸을 날려 목숨은 건졌지만, 날아온 돌과 나무 조각에 온몸이 찢겨 1주일 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지금도 가끔 그날의 악몽을 꿀 만큼 심장 떨리는 일로 꿈을 꾸고 나면 목욕을 한 것처럼 식은땀을 흘렀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하린이에게 말하지 않은 건 두 건 모두 대외비 작전으로 제대 후에도 발설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호감 가는 하린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무릎은 어때?”

“혹시 몰라 병원 가서 주사 한 대 맞았어. 의사가 그러는데 소독 아주 잘했다고 했어. 다시 할 것도 없을 만큼.”

“대충 바른 건데... 잘됐다니 다행이다.”

“너도 참 숫기 없다. 꼼꼼하게 약 바르는 걸 내가 몸으로 겪었는데, 무안해서 대충 발랐다고 말하다니 정말 어이가 없다.”

“.......”

훈련 중 병사들이 다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의무대나 병원에 가기 전에 응급치료 해야 하는 일도 있어 무면허 의사지만, 소독하고 약 바르고 붕대 감는 간단한 치료는 자주 했었다.

그러나 여자 무릎에 약 발라준 건 태어나 하린이 처음이었다. 그 모습을 생각하자 얼굴이 화끈거려 대충 발랐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놨다.

“일요일에도 시간 없어?”

“왜?”

“밥 사기 달리기 시합한 거 잊었어.”

“아 맞다.”

“너 정말 웃긴다. 까먹는 건 내기에서 진 내가 해야 할 일이지, 이긴 네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미안해. 생각할 일이 많아서 깜빡했어.”

“기분 나빠서 같이 밥 못 먹겠다. 내기 없던 거로 해야겠어.”

“내가 살게. 같이 먹자.”

“정말?”

“어.”

“그럼 저녁 6시에 보자. 괜찮지?”

“응.”

“집 앞으로 데리러 와. 늦으면 죽어.”

“알았어.”

통화가 끝나자 침대에 앉아 손에 든 전화기만 하염없이 내려다봤다. 은하와 헤어진 이후 여자와 길게 대화해 본 게 거의 6년 만이었다.

사무적인 일로 여군 장교나 부사관과 장시간 대화한 적은 있지만, 사적인 대화는 한 번도 없었다.

커피나 술자리를 제안하는 여군도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여자를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라 호감이 가는 여자가 없어서 그랬다.

남들은 제복 입은 여자가 멋있다고 하는데, 나는 딱딱하고 정이 없어 보여 의도적으로 피했다. 그렇게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6년 만에 열렸다.

하린이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진 건 아니었다. 같이 달리고 집에 데려다주며 이야기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점점 빠져들었다.

씩씩한 모습도 좋았고, 알게 모르게 나를 배려하는 마음도 좋았다. 그리고 멋지게 달리는 모습도 좋았고, 아름다운 얼굴과 미소, 목소리까지... 무엇 하나 싫은 게 없었다.

“사랑일까?”

그러나 아직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사랑은 같이하는 것이었다.

하린이는 같이 달릴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잠깐 호기심을 느낀 것일 수도 있었다.

“짝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하루 만에 누굴 좋아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에 굶주린 난 마음에 들면... 마음의 문이 열리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은하와도 그랬다. 만난 첫날 좋아하게 됐다. 은하는 3번째 만남부터 연인이 됐다고 생각하겠지만, 첫날 마음의 문을 연 순간 은하를 좋아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마음에 문을 열진 않았다. 정에 굶주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었지만, 또다시 버려질까 두려워 사람 만나는 걸 기피했다.

하린이를 특별하게 생각하자 조금 전 레이첼을 부둥켜안고 뒹군 일이 너무 부끄러웠다.

하지만 NPC와의 섹스는 포르노 동영상을 보며 자위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상대에게 미안해할 일은 아니었다.

The Age of Hero가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은 게임이라고 해도 게임은 게임일 뿐 진짜 여자와 섹스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정신적 간음도 간음이라고 생각하면 도덕적인 부분에선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문제로 많은 사람이 열띤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한쪽은 애인이나 배우자가 있는 유저가 다른 유저 또는 NPC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명백한 외도라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대쪽은 게임은 게임일 뿐 육체적인 관계가 아니라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전자를 따르면 포르노를 본 것만 해도 죄가 됐고, 지나가는 여자를 쳐다봐도 간음이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따지면 간통법이 사라진 지 오래라 처벌할 수 없었고, NPC는 인간이 아닌 허상이라 이 역시도 처벌할 기준이 없었다.

하지만 법적인 문제를 떠나 도덕적인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어 많은 애인과 부부가 결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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