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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시대-20화 (2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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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맥불변(菽麥不辨)

20.

“영주님, 물속에 오래 계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그만 나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았어.”

30분쯤 누워있자 아이린이 깨웠다. 로그아웃이라고 말하기 전에는 잠들어도 게임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캡슐에서 자는 사람이 많았다. 캡슐에서 자면 현실에서 자는 시간보다 4배나 많이 잘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으로 자는 동안은 게임에 접속하지 않은 것과 같아 시간은 현실 시간이 적용됐다.

그래도 잠들면 캡슐이 뇌파를 안전하게 유지해줘 밖에서 자는 것보다 피로가 조금 더 빨리 풀렸다.

이 때문에 먹고 마시고 화장실 가는 것만 빼고 캡슐에서 나머지 것을 모두 해결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욕조에서 일어나자 아이린과 아만다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몸에 로션 같은 오일을 발라준 후 하얀 가운을 입혀줬다.

또다시 고운 두 쌍의 손이 온몸을 구석구석 누비자 욕망이 끓어올라 고추가 발딱 섰다.

도둑질도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는다고 발기한 고추도 여러 번 보이고 부드러운 손에 노출되자 창피함도 조금 가셔 정면을 바라볼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영주님.”

“그래. 너희도 어서 가서 쉬어. 고생했어.”

“감사합니다. 영주님.”

가운으로 곤두선 고추를 가리고 아이린과 아만다가 열어준 문을 통해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에 들어서자 무릎을 꿇고 있는 레이첼과 시녀 두 명이 보였다.

천천히 걸어가 침대에 걸터앉자 레이첼이 따뜻한 우유를 건넸다. 갓 짠 소젖에 꿀을 넣고 끓였는지 한 모금 넘기자 고소함과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맛있다.”

“아침마다 올릴까요?”

“그래. 대신 아침에만. 낮에는 오늘 마신 녹차 줘.”

“네.”

The Age of Hero에도 수많은 차(茶)가 있었다. 쌍화차, 생강차, 황기차, 다시마차, 율무차, 칡차, 구기자차, 결명자차 같은 한국적인 차부터 홍차와 커피 등 아주 다양한 차가 있었다.

그러나 차는 귀족들의 기호품으로 가난한 평민과 농노는 비싸서 마실 수도 없었다.

커피만 해도 생산량이 많지 않아 한 잔이면 농노 10명이 하루 세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값에 거래됐다.

녹차 역시 고급 기호품으로 가격이 싸진 않았지만, 영지에서 소량 생산돼 따로 돈을 내지 않아도 됐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차는 녹차가 아니라 구수한 숭늉이었다. 노릇하게 구워진 누룽지로 끓인 숭늉은 값비싼 커피와 녹차보다 100배는 더 고소하고 맛있었다.

그러나 내 영지에선 쌀이 재배되지 않았다. 쌀은 아틸라 제국 남부에서 주로 생산하는 작물로 가격은 밀과 비슷해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쌀을 구하려면 수도 크라쿠푸스에 갔다 와야 했다. 2~3시간이면 쌀을 사 돌아올 수 있지만, 쌀밥 먹겠다고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시녀들이 우유 잔을 들고 침실을 나가자 방에는 나와 레이첼만 남게 됐다. 둘만 있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아란이라도 있으면 조금 덜 어색할 텐데, 아란도 여자라고 내가 다른 여자와 끌어안고 있는 모습은 보기 싫은지 서재를 나서자 모습을 감췄다.

“안마해드릴게요. 똑바로 누우세요.”

“그.그래.”

레이첼이 어색함을 깨기 위해 안마를 해주겠다고 했다. 욕실에서 충분히 받았지만, 싫다고 말하면 분위기가 더 이상해질 것 같아 주문대로 순순히 베개를 베고 누웠다.

내가 침대에 눕자 침대 밑으로 내려간 레이첼이 몸을 돌려 관능적인 메이드 복을 벗었다.

사르륵 사르륵

하얀 블라우스 위에 걸친 검은색 치마와 조끼를 벗자 커다란 가슴과 은밀한 음부를 가린 하얀 속옷이 나왔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입었는지 거친 무명이 아닌 부드러운 하얀 비단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비단 속옷이 레이첼이 평생 처음으로 입은 고급 옷일 것이다.

그러나 내 총애를 받지 못하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농노에게 비단옷은 목숨을 팔아도 구할 수 없는 비싼 옷이었다.

군살 하나 없는 하얀 나신을 끌고 옆에 다가온 레이첼이 부드러운 손으로 나긋나긋 팔을 주물렀다.

사람들에게 예뻐 보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는지 얼굴은 생끗생끗 웃고 있었지만, 몸은 다가올 두려움에 잔뜩 겁을 먹고 움츠려 있었다.

“시.시원하세요?”

“어.어 시원해.”

“다.다리도 주물러 드릴까요?”

“그래.”

레이첼만 긴장한 게 아니었다. 나 역시 몸이 동태처럼 바짝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질 않아 간신히 입만 달싹였다.

레이첼이 종아리와 허벅지를 주무르자 커다란 가슴이 얇은 비단을 뚫고 나올 것처럼 흔들렸고, 작고 통통한 엉덩이도 살랑살랑 눈을 어지럽혔다.

이런 모습은 남자에겐 고문보다 더한 형벌로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입안은 바짝바짝 타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다.

“등도 주물러 드릴게요.”

“그만해도 돼.”

“어제오늘 정말 많은 일을 하셨잖아요. 어깨 주물러 드리면 피로가 조금은 가실 거예요.”

“됐으니까 이리와.”

“그래도...”

“밤새 안마하다 잘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럼 옆에 누워.”

“네.”

옆에 누우란 말에 모기 날갯짓 소리만큼 작게 대답한 레이첼이 바짝 붙지도 못하고 멀리 떨어지지도 못한 엉거주춤한 자세로 누워 고개를 푹 숙였다.

귀엽다 못해 본능을 자극하는 모습에 당장에라도 덮치고 싶었다. 그러나 여자를 마구 대하는 건 짐승이나 할 짓이었다.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팔을 뻗어 팔베개를 해주며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눈이 동그래져 바라봤다.

농노는 귀족의 하룻밤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 욕정 해소용이었다. 그래서 자기 욕심만 채우기 급급했고, 일부는 색다른 쾌락을 맛보기 위해 폭력과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농노들도 익히 아는 내용으로 조르주 준 남작도 아주 거칠게 시녀를 다루고 때리기도 해 레이첼은 악몽 같은 밤이 될 거로 생각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다.

그런데 팔베개를 해주며 부드럽게 품에 안아주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팔베개는 아주 다정한 연인이나 해주는 것으로 귀족이 농노에게 해줄 일은 아니었다.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내려간 손이 등을 쓰다듬자 레이첼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잘록한 허리를 쓰다듬던 손이 배를 타고 넘어와 얇은 비단으로 감싼 가슴을 감싸 쥐자 몸을 바르르 떨어댔다.

가슴을 감싼 비단 끈을 풀자 커다란 가슴이 튀어나왔다. 하얀 가슴 위에 분홍색 작은 젖꼭지가 보였다.

자석에 끌리듯 젖꼭지를 입에 무는 순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부끄러움이 온몸을 지배했다.

레이첼의 몸에서 내려와 처음처럼 품에 안고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갈등하는 마음을 모질게 다그쳐 로그아웃을 외쳤다.

‘로.로그아웃.’

[전형필님, 꿈과 희망이 가득한 The Age of Hero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잘 가라는 말과 함께 눈이 떠지자 캡슐 내부에 달린 모니터가 보였다. 레이첼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 정지화면으로 보였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상념을 깬 후 캡슐 밖으로 나왔다. 찬물을 벌컥 벌컥 마셔도 갈증이 가시질 않았다.

목이 말라 생긴 갈증이 아니라 욕망이 차올라 생긴 갈증으로 물로는 해결이 안 됐다.

안 되겠다는 생각에 욕실에 들어갔다. 영주성과는 비교도 안 되는 좁은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자 차가운 냉수가 쏟아졌다.

쏴아아아

한겨울 차가운 냉수가 머리를 타고 흘러 몸을 적시자 뜨겁게 달궈졌던 몸과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게임이 현실보다 더 생생한 게 말이 돼? 아직도 손과 입에 레이첼의 부드러운 살과 가슴이 느껴지네. 이러니 사람들이 벗어나질 못하지. 나도 이제 벗어나긴 그른 것 같다. 하아.”

우우우웅 우우우웅

씻고 나와 침대에 앉자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캡슐에 꽂고 들어가야 했는데, 시간이 늦어 깜빡하고 침대에 놓고 들어가 문자 온 걸 몰랐다.

문자는 총 세 통으로 한 통은 ㈜판타스틱에서 캡슐 배송이 완료됐다는 메시지였고, 두 통은 하린이가 보낸 메시지였다.

[나 전화번호 아무나 알려주는 여자 아니거든. 특히 남자에게는 절대~ 안 알려줘. 너에게만 특별히 알려준 거야. 그런데 전화 한 통화 없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너무한 거 아니야?]

[어쭈구리! 문자도 씹네. 내가 먼저 문자 남겼다고 우습게 보는 거지? 만나면 죽을 줄 알아!!!]

시계를 보자 밤 11시 50분이었다. 전화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답장은 하는 게 예의라 간략하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전화해서 무릎 상태 물어보려고 했어. 그리고 문자 늦은 건 캡슐에 전화기를 꽂고 들어가야 했는데 깜빡하고 침대에 놓고 들어가서 그래. 보자마자 문자 보낸 거야. 오해하지 마.]

띠링

문자를 보낸 후 캡슐로 이동해 4시 30분(영지 시간)에 알람을 맞췄다. 캡슐에는 현실 시간과 게임 시간 양쪽 모두 알람을 걸 수 있었고, 안과 밖에 달린 액정 화면을 통해 게임 시간도 수시로 확인할 수 있었다.

4시 30분이면 현실 시간으로 1시간밖에 잘 수 없었다. 1시간으론 피로를 풀 수 없지만, 그거라도 자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았다.

2~3일 밤새우는 건 군대 있을 때 훈련으로 여러 번 해봐 하룻밤 새는 건 어려울 게 없었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밤을 새우면 피로가 쌓여 몸에 해로웠고, 잠을 안 잔만큼 몰아서 자게 돼 결국엔 몸만 축났다.

따르릉따르릉

“여보세요.”

“나야. 송하린.”

“알아.”

“나는 그새 까먹은 줄 알았지.”

“미안해.”

“미안한 줄 알면 다음부터 조심해.”

“알았어. 그런데 아직 안 잤어?”

“시간이 몇 신데 벌써 자?”

“12시 다 돼가잖아.”

“오늘 불타는 금요일이야. 금요일 밤 12시에 자는 사람도 있어? 아저씨도 아니고 왜 이래?”

“미안.”

“그런 주변머리로 학교 잘 다닐 수 있을지 정말 걱정된다.”

“네가 좀 도와줘. 학교 잘 다닐 수 있게.”

“내가 왜?”

“친구니까.”

“웃기고 있네.”

하린이가 어떤 이유로 내게 호감을 느꼈는지 알 수 없지만, 먼저 문자를 남기고 전화를 걸어온 것만 봐도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에게 먼저 문자를 남기거나 전화를 걸지 않았다. 돈 보고 그러는 여자도 있었지만, 나는 돈하고 거리가 먼 원룸 사는 남자였다.

문자와 전화에 이어 도와달라는 도말에 거절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호감 이상의 감정을 느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었다. 달리기로 안면을 익혀 작은 호의를 베푸는 것일 수도 있었다.

괜한 오해로 설레발을 쳐선 안 된다. 그건 좋은 관계로 발전할 기회를 망치는 짓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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