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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맥불변(菽麥不辨)
18. 숙맥불변(菽麥不辨)
허리를 90도로 숙인 다니엘이 힘차게 대답했지만, 표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 역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농노에게 화장실을 만들어준 영주는 아틸라 제국이 건국한 이후 단 한 명도 없었다.
화장실을 만들어 준 것도 최초지만, 문짝을 달아주고 병이 걸리지 않게 신경 써준 영주 역시 내가 처음이었다.
귀족의 눈에만 농노가 가축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었다. 평민도 농노를 가축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다.
귀족이 보기엔 둘 다 다를 것이 없었지만, 평민은 자신들은 자유민으로 농노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다니엘의 머릿속에도 가득 채우고 있어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세 시대는 가난한 평민과 농노는 물로 뒤처리를 한다는 건 생각을 못한 일로 넓적한 풀이나 지푸라기로 지저분한 엉덩이를 닦았다.
종이가 매우 귀한 시대로 종이로 엉덩이를 닦는다는 건 돈 많은 귀족이 아니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또한, 양피지와 질감 나쁜 두꺼운 종이가 대부분으로 고위 귀족은 종이 대신 부드러운 비단이나 천으로 닦았다.
평민과 농노는 풀이 많은 계절에는 풀로 뒤를 닦았다, 풀이 없는 겨울에는 마른 새끼줄을 꼬아 가랑이에 끼고 앞뒤로 비비는 것으로 온 가족이 함께 뒤처리를 해 더럽기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풀과 지푸라기로는 아무리 열심히 닦아도 깨끗이 닦이지 않아 엉덩이에 응가를 항상 묻히고 다녀 냄새나는 것은 기본이었고, 항문이 헐고 병균을 이곳저곳 묻히고 다녀 전염병이 급속도로 퍼졌다.
손발만 잘 씻어도 질병의 80~90%는 예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The Age of Hero는 마법은 발달했지만, 의료 수준은 중세 시대를 벗어나지 못해 귀족 중에서도 청결의 중요성을 모르는 NPC들이 많았다.
“내일 아침 화장실 구조와 시공 방법을 그림으로 자세히 그려줄 테니 그걸 보고 따라 하세요. 그리고 도로포장은 영주성과 마을, 철광석 광산까지 해야 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양쪽을 같이 하기엔 무리가 따라 화장실 공사가 끝나면 시작하겠습니다. 차질 없이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화장실과 도로 공사 계획이 세워지자 세수를 늘릴 방안을 고민했다. 도로는 이동을 용이하게 하고 물동량을 늘려줘 세수를 증대시키는 효과가 있었고, 화장실은 각종 질병을 예방해 장기적으로 인구가 늘어나 세수가 증대됐다.
그러나 둘 다 당장 돈이 들어오는 일은 아니었다. 반대로 공사 기간 내내 돈이 줄줄 나가는 일이었다.
농노의 모든 것이 내 것이라 일 시킨다고 돈 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밥은 줘야 했고, 공사에 필요한 기구와 재료도 내가 내야 했다.
화장실을 만드는 건 농노들을 위한 사업이라 각자 먹을 것을 싸오라고 해도 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것도 밥 인심이 후한 대한민국 사람으로 그런 파렴치한 짓은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배고픈 게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군대에서 5년 동안 뺑이 친 내가 그런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농노는 내 재산으로 아파 일을 못 하면 그만큼 내가 손해 보는 것으로 잘 먹이고 잘 챙겨야 했다.
문제는 돈이 있어야 영지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수를 늘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세금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금이 80%나 돼 더는 올릴 수 없었다. 올리는 게 아니라 내려야 할 상황으로 생산물의 80%를 빼앗긴 농노들은 간신히 굶어 죽지 않을 수준의 음식을 섭취하고 있어 세금을 더 올리면 이들을 죽이자는 것이었다.
철광석과 무기, 철제 농기구를 팔면 되지만, 영지의 발전을 위해선 영지부터 보급해야 해 최소 3년은 팔 수 없었다.
아란의 설명에 따르면 철광석 광산의 매장량은 매우 풍부해 몇 백 년은 족히 파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광산 마을 농노 500명이 전부 채광과 운반에 매달리고 있지만, 채광 기술과 장비 부족으로 채굴량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제련 시설도 미비해 확장하는데 시간이 걸려 원하는 만큼의 질 좋은 철을 얻기까진 최소 6개월은 기다려야 했다.
“특용작물로 사용한 식물이나 약초, 열매 같은 거 있습니까?”
“열을 내리고 탈수를 막는 약초가 있지만, 그건 다른 영지에도 있어 특용작물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대신 도움이 될 만한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요? 그게 뭡니까?”
“대나무입니다.”
“대나무도 특용작물이 됩니까?”
“대나무는 어구와 화살, 담뱃대, 낚싯대, 부채, 가구, 의자, 바구니 등을 만드는데 사용됩니다. 또한, 치열과 토혈, 고혈압, 치열, 이수 등을 다스리는 약으로도 사용되고요. 그리고 죽순으로 먹을 수도 있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서쪽 농지가 끝나는 지점부터 대나무 바다라고 해도 될 만큼 넓은 지역을 차지한 대나무 숲이 있었다.
이렇듯 엄청나게 큰 대나무 숲이 있는데도 이용하지 못하고 내버려둔 건 대나무 숲을 차지한 40레벨대의 난폭한 자이언트 판다 때문이었다.
자이언트 판다는 귀엽게 대나무를 아작 아작 씹어 먹는 귀여운 동물로 영화 쿵푸 판다(Kung Fu Panda)의 모델이자 중국의 3대 보물이라 불리는 동물이었다.
그러나 그건 지구에서 얘기였고, 내 영지에 있는 난폭한 자이언트 판다는 신장 3m의 커다란 몬스터로 자기 영역을 침범한 생물을 절대 살려두지 않는 철저한 살육자였다.
이 때문에 버릴 것이 없는 대나무가 옆에 지천으로 널려 있지만, 멀리서 구경만 할 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고, 서쪽 경작지도 50년째 늘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레오 영지는 대략 가로세로 길이가 25km로 면적으로 따지면 650㎢쯤 됐다. 이중 영주성과 농노마을, 농지, 목장이 포함된 영주성 영역이 전체 면적의 8분의 1로 철광석 광산과 마을을 합쳐도 80%는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었다.
버려진 땅은 동물과 몬스터들이 득실대는 울창한 숲과 산, 초원으로 중무장한 병력이 없으면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이런 사정은 내 영지만의 일이 아닌 아틸라 제국 전체의 일로 러시아의 2배쯤 되는 아틸라 제국은 영토의 80%를 몬스터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 문제는 경비대장 조나단과 얘기하는 게 낫겠군요. 수고했습니다. 그만 나가보세요.”
“영주님께 충성을! 편히 쉬십시오.”
집사 다니엘이 나가자 시녀 레이첼을 불러 집무실에서 먹을 수 있게 가벼운 저녁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공동화장실을 만들 설계도를 그렸다. 미대생만큼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했지만, 초등학교 때 3년 동안 미술학원에 다녀 사람들이 보면 어떤 그림인지,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인지는 알 수 있게 그릴 수 있었다.
열심히 설계도를 그리고 있자 레이첼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쟁반에 들고 들어왔다.
군침이 도는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은 양고기와 감자, 당근, 양파 등을 듬뿍 넣어 끓인 양고기 스튜와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는 갓 구워낸 따끈따끈한 밀 빵 그리고 포도주 한 병이었다.
“영주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스튜와 빵으로 저녁을 드시는 건 너무 부실해요. 내일부터는 좀 더 나은 식사를 하시는 게 좋겠어요.”
“고기가 이렇게 많이 들어갔는데 뭐가 부실하다는 거야?”
“재료도 나쁘진 않지만, 음식이 적어도 열 가지 이상은 되어야 해요. 남작님의 지위를 생각하면 그것도 매우 적은 수예요.”
“나는 남들에게 내 지위를 보여주자고 아까운 음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허례허식에 아까운 돈 쓰는 것보다 이렇게 소박하게 먹는 게 더 좋아. 그러니 앞으로 이런 일로 신경 쓰게 하지 마.”
매일 라면만 끓여 먹던 가난뱅이에게 고기가 잔뜩 들어간 스튜와 고소한 빵은 만찬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전임 영주 대리 조르주가 3년간 흥청망청 먹고 마신 걸 알고 있는 레이첼이 보기에 내 저녁은 초라해도 너무 초라해 보였다.
레이첼의 생각처럼 영지를 가진 남작이 스튜와 빵으로 저녁을 때우는 건 정말 어이없는 행동이었다.
영지를 가진 남작이면 매일 밤 연회를 베풀어도 모자람이 없는 신분으로 커다란 식탁에 가득 음식을 쌓아놓고 먹는 게 일반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농노는 내 앞에 있는 스튜와 밀 빵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평민과 농노는 보리와 귀리, 호밀, 메밀, 수수 같은 싸구려 곡물들을 거칠게 도정한 풀보다 질긴 딱딱한 빵을 먹었다.
도정이 잘된 고운 밀가루로 만든 빵은 엄청나게 비싸 귀족이나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빵의 색깔만 봐도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알 수 있었다.
스튜 역시 마찬가지로 하층민은 감자와 몇몇 채소를 넣고 끓인 스튜를 먹었지 양고기가 잔뜩 들어간 스튜는 꿈에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영주님 그러지 마시고 3~4가지만 늘리세요. 네에?”
“그만해.”
“제발요.”
“그런 재미없는 얘기 그만하고 어서 가서 쉬어. 전날 잠도 잘 못 잤을 텐데 피곤하겠다.”
레이첼은 내가 영주성 건물 내에 있으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심부름을 했다. 침실과 집무실, 욕실에 있으면 밖에서 기다렸고, 식당에 있으면 옆에서 세세하게 챙겨줬다.
아침에 시녀장으로 발령 냈는데 아직 언니들을 부리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 눈에 들고 싶어 그런 것인지 모든 일을 자기가 직접 챙기려 떨어지질 않았다.
나야 레이첼이 하나에서 열까지 챙겨줘 편하고 좋았지만, 온종일 쉬지 못한 레이첼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영주님,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어요.”
“또 있어?”
“네.”
“말해봐.”
“오늘 밤부터 마음에 드는 시녀를 한 명 고르셔야 해요.”
“시녀를 고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영주님의 외로운 밤을 채워드릴 여자를 고르셔야 한다는 말이에요.”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아무 말도 못하고 멀뚱멀뚱 레이첼을 바라보기만 했다.
피 끓는 청춘이라 이런 일이 생기기를 은근히 기대했었다. 남작이 되자 귀족 영애와 달달한 로맨스를 떠올렸고, 조르주 준 남작의 만행(?)을 듣자 나도 그런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어제 잠깐 떠올랐다가 산처럼 쌓인 일을 마주하자 언제 사라진 지도 모르게 잊혔다.
기회를 잡자 The Age of Hero에서 가장 번영한 영지를 만들어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성공해서 나를 버린 부모에게 보란 듯이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워 여자 생각은 스치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던 생각에 레이첼이 불을 댕기자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해지며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그런 거 피.필요 없어.”
“하셔야 해요.”
“왜?”
“영주님은 영지의 주인이세요. 혼자 주무시게 할 수 없어요.”
“괘.괞찬다니까.”
계속 괜찮다고 했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은하 이후 여자 냄새도 맡아보지 못해 욕망이 끓어오르다 못해 분출하기 직전이었다.
특전사에 있을 때는 힘든 훈련에 매일 몸이 녹초가 돼 여자 생각할 겨를이 거의 없어 큰 문제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제대 후 치료가 끝나고 일상생활로 돌아가자 짧은 치마를 입은 아가씨만 지나가도 나도 모르게 눈이 따라가며 고추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다고 나쁜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내 좌우명이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자’라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끔찍이 싫어했다.
잘난 부모 덕에 생긴 좌우명으로 우리 부모는 공부하는 재주와 돈 버는 재주만 있을 뿐 이타심과 배려심은 없어 주변 사람을 아주 힘들게 했다.
이 때문에 군대 있을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직접 했지 부하에게 떠넘기지 않았다.
그러나 좌우명과 별개로 여자를 안고 싶다는 생각, 하린이 같은 예쁜 여자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자가도 아닌 좁은 원룸 전세에 살고,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을지도 몰라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글을 읽어보신 후 문제점이 무엇인지, 지난번 작품과는 어떻게 다른지 작품서평란에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