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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시대-15화 (1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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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를 발전시키라!

15. 영지를 발전시키라!

“조심해서 들어가.”

“집에 아빠, 엄마, 오빠, 언니, 여동생 다 있어. 이상한 맘 먹고 밤에 몰래 오면 죽여 버린다.”

“하하하하.”

생각지도 못한 하린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제대한 후 한 번도 속 시원하게 웃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뜻하지 않은 만남에 있어 근 2년 만에 배꼽이 빠지도록 웃자 가슴을 억눌렀던 답답함이 조금은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만 웃고 전화번호나 알려줘.”

“전화번호?”

“싫어?”

“아니. 010-5X5X-00XX.”

걸어오는 내내 전화번호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아 머뭇거리기만 할 뿐 물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하린이 먼저 전화번호를 물어오자 기쁨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힘줘 안 그런 척하며 전화번호를 알려주자 휴대폰에 번호를 찍은 하린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따르릉따르릉

“촌스럽게 따르릉이 뭐야?”

“이 소리가 가장 잘 들려.”

“군바리 티 내고 싶지 않으면 벨 소리부터 바꿔. 그 벨 소리 하고 다니면 여자애들이 4년 내내 놀릴 거야. 촌티난다고.”

“알았어. 바꿀게.”

“그럼 나 들어간다.”

“밤에 부을 수도 있으니까 얼음찜질해. 상처가 잘 곪는 체질이면 병원에 가. 항생제 먹는 것보다 그게 나아.”

“나도 육상선수 출신이야. 그 정도는 알아.”

“알았어. 푹 쉬어.”

“아까 한 약속 잊으면 안 돼.”

“어.”

손을 흔들어준 하린이가 현관문을 열고 사라지자 잠시 우두커니 서서 집을 쳐다본 후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하린이의 웃는 얼굴과 함께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은하 얼굴이 떠올랐다.

6개월밖에 사귀지 못했지만, 은하는 내 첫사랑이자 첫 여자로 25년을 살며 가장 행복한 시간을 선물해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은하와 처음 만난 건 한강 고수부지 야외 수영장이었다. 여름 방학을 맞이해 야외 수영장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친구들과 함께 놀러 온 은하를 만났다.

그날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영업이 끝나자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나는 아르바이트생들과 함께 엉망이 된 수영장을 청소하고 정리했다.

수영장은 사람들이 몰래 버리고 간 쓰레기와 잊어버리고 간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그중에는 은하가 친구들과 놀다가 깜빡하고 놓고 간 가방과 핸드폰도 있었다. 손님들이 놓고 간 물건은 찾으러 오는 일이 잦아 물품 보관소에 맡겨두었다.

빨간색 반달 스포츠 가방을 들고 물품 보관소로 가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가방을 잃어버린 손님이 전화한 것일 수도 있어 전화를 받자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가져다줄 수 없냐고 했다.

1분이면 갈 거리라 알았다고 전화를 끊고 정문으로 나가자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은 은하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은하는 감사하다며 연신 인사를 했지만, 괜찮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무심하게 돌아섰다.

168cm의 늘씬하고 예쁜 은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청소를 빨리 끝내야 집에 가서 쉴 수 있어서였다.

수영장 청소 아르바이트는 임금은 매우 짠 대신 일은 산더미같이 많아 청소를 끝내고 집에 가면 밤 10시가 넘었다.

청소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쉴 시간도 줄어들어 내 머릿속에는 청소를 빨리 끝내고 집에 돌아가 자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때 은하가 나를 불러 핸드폰과 가방을 찾아 준 감사의 의미로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바빠서 안 된다고 하자 전화번호를 물었다. 청소 생각밖에 없어 짜증이 났지만, 손님과 승강이를 벌이면 쫓겨날 수도 있어 짜증을 참으며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하린이처럼 벨이 울리는 걸 확인한 은하는 며칠 내로 전화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나는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키 180cm에 몸도 그런대로 괜찮아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여학생이 종종 있었다.

처음에는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10명 중 7명은 전화가 없었고, 만난 여자들도 뜯어먹으려는 속셈으로 접근한 것이지 호감을 느끼고 다가온 것은 아니라서 만날수록 상처만 남았다.

은하도 그런 여자들처럼 나를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은하는 지금껏 만난 여자와는 전혀 달랐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하고 솔직한 여자로 우린 만난 지 하루 만에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일주일 만에 애인으로 발전했다.

애인이 되자 은하는 수시로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아르바이트로 만날 시간이 없자 은하가 자기가 저녁 해놓고 기다리겠다고 했고, 나도 은하가 보고 싶어 그러라고 했다.

집이 목동인 은하는 매일 저녁 놀러 와 밥을 해줬고, 만난 지 두 달 되던 날 우리는 태어난 처음으로 뜨겁게 사랑했다.

둘 다 처음이라 쾌감은 느껴보지도 못한 채 고통만 컸지만, 마음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그렇게 불붙은 사랑은 활활 타올라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200일도 안 돼 나와 은하의 나의 첫사랑은 끝났다.

석 달쯤 되자 내 부모에 대해 궁금해했고, 말하지 않자 화를 냈다. 그리고 부모가 두 분 모두 살아계시는데 혼자 고생하며 사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말다툼이 생길 때쯤 은하의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줄곧 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이 중위권으로 내려가자 은하 엄마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와 학원을 태우고 다녀 만날 수도 없었다.

거기다 고3이라는 불안까지 겹치며 은하는 많이 힘들어했다. 우리는 서로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어린 나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렇게 헤어지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때는 하나하나가 모두 커다란 장벽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샤워했다. 그러자 아련한 추억과 상처가 서서히 사라졌다.

아픈 과거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라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지나간 날을 아파하며,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 그것밖엔 할 수 없었다.

[전형필님, 꿈과 희망이 가득한 The Age of Hero에 접속하셨습니다. 오늘도 마음껏 모험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몇 시야?”

“11시요.”

“이런...”

하린이를 바래다주고 집에 돌아와 씻고 캡슐에 들어가자 2시간이 훌쩍 넘어 영주성이 한창 바쁘게 돌아가는 아침 11시가 돼서야 접속할 수 있었다.

“집사 다니엘과 경비대장 조나단이 세 번씩 다녀갔어요. 불러도 대답이 없어 레이첼만 욕먹었어요.”

“미안해.”

“저에게 미안해하실 거 없어요. 욕은 레이첼이 먹었으니까요. 그리고 이곳은 모모님의 영지에요. 제 영지가 아니에요.”

아란의 말이 맞았다. 영지가 잘 되면 내가 잘되는 것이고, 영지가 망하면 내가 안 되는 것으로 아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아란의 말에는 책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지만, 아란은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레이첼. 들어와.”

“네, 영주님.”

“손에 든 건 뭐야?”

“세숫물이요. 씻으세요.”

“다음부터 이런 거 준비하지 마. 문 하나만 열면 욕실인데 뭐하러 번거롭게 이런 걸 준비해.”

“그래도...”

“하지 마.”

“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레이첼에게 아침부터 나 때문에 욕먹어서 미안하다는 말도, 내일부터는 일찍 일어나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농노에게 이해를 구하거나 미안하다고 말해선 안 된다. 그런 말은 평등한 관계에서 오가는 말이었지 생사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쥔 주인이 노예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권위 의식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는 상대에게 지나친 관심과 친절을 베푸는 건 극도의 공포심을 유발하는 일이라서 그랬다.

The Age of Hero는 분명 게임이지만, NPC들은 슈퍼에고 컴퓨터 환인에 의해 인간과 마찬가지로 인격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다.

인간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사는 생물인 것처럼 NPC들도 The Age of Hero라는 세상에서 사는 생물이었다.

공간은 달랐지만 사는 것은 같은 것으로 NPC들은 자신이 게임 속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게임은 지속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NPC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금지됐고, 환인에 의해 철저하게 필터링 됐다.

레이첼의 성의를 봐서 오늘만 특별히 가져온 세숫물에 얼굴을 씻었다. 투덜대면서도 얼굴을 씻자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다니엘과 조나단을 들어오라고 해.”

“네.”

레이첼이 건네주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집무실로 이동하며 다니엘과 조나단을 불렀다.

레이첼은 시녀 중 막내였다. 전임 영주 대리 조르주 준 남작은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몽둥이를 휘둘러 팔다리와 코뼈가 부러진 시녀가 한둘이 아니었다.

나 역시 조르주와 같을까 봐 나이 먹은 시녀들이 겁을 먹고 가장 막내인 레이첼의 등을 떠밀어 내 곁에 붙여둔 것이었다.

“다니엘 집사.”

“네, 영주님.”

“지금부터 시녀장은 레이첼입니다. 내 침실 옆에 딸린 방을 레이첼에게 주고, 레이첼을 도울 시녀들도 몇 명 붙여주세요.”

“알겠습니다.”

레이첼을 시녀장에 앉히라는 명령에 집사 다니엘이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3,000명을 간신히 넘는 작은 영지였지만, 영지에선 내가 법이자 왕이었다. 내 말을 거역하는 건 반역으로 의견을 논하는 자리가 아닌 한 절대복종해야 했다.

레이첼을 시녀장으로 앉힌 건 마음에 들어서 가 아니었다. 아는 얼굴을 옆에 두는 게 편했고, 나이 든 여우보다는 어린 레이첼을 다루기가 편해서였다.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치른 약아빠진 여자는 친절 따위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과 남자를 모르는 때 묻지 않은 소녀는 작은 관심과 친절에도 사랑을 느껴 상대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레이첼을 이용하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했지만, 영주가 된 이상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충성심 100의 NPC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니콜라스 경과 대장장이 래틀을 보고 싶군요. 같이 점심 먹으면서 얘기할 수 있게 준비해 주세요.”

“니콜라스 경은 기사라 영주님과 같이 식사하는 게 예의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래틀은 비천한 노예입니다. 영주님의 명성에 누가 될까 걱정됩니다.”

다니엘이 래틀과 점심을 같이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한 건 영주인 나를 생각해서 한 말로 의견을 개진한 것이지 명령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명령에 불복종하는 건 징치해야 하지만, 거부가 아닌 의견을 내는 건 권장해야 한다. 그래야 다양한 의견을 내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어디까지 허용하느냐 그것이 문제로 너무 풀어주면 권위가 떨어져 우스운 사람이 될 수 있었고, 너무 억압하면 폭군이 될 수 있었다.

“대장장이로 일가를 이룬 노예라면 기사보다 못할 것이 없습니다.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다니엘이 나가자 조나단 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영지를 발전시키기 위해선 치안이 안정돼야 했다.

치안이 불안하면 도로를 닦고 튼튼한 철제 농기구를 보급해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다.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영지가 발전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크게 다친 건 아니라서 입원해도 글을 계속 올릴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

글을 읽어보신 후 작품서평란에 문제점이 무엇인지, 지난번 작품과는 어떻게 다른지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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