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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연
14.
“원한다면 언제든 시합 받아줄게. 그러니 무릎부터 치료하자.”
“내가 부르면 바로바로 나와. 약속할 수 있어?”
“알았어.”
“뒤에 가서 딴소리하면 죽는다.”
“알았어.”
언제든 시합을 받아주겠다고 하자 그제야 잔뜩 힘이 실린 눈을 풀렸다. 하린이는 승부욕이 매우 강한지 지고는 못사는 성격 같았다.
하지만 남에게 화를 전가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성격이었다면 자존심을 만회하기 위해 진 이유를 주저리주저리 대거나 화를 내며 팩 토라져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시합에서 지고 기분 좋은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성인군자도 내기에서 지면 그 순간만큼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 어려웠다.
숨겨둔 인간성이 나오는 순간으로 화를 억누른 채 깨끗하게 승복하고 다음을 기약하면 군자였고, 변명을 늘어놓으며 승복하지 않는 사람은 소인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하린은 나이에 비해 성격이 좋은 편으로 졌다고 패배를 인정하진 않았지만, 치사하게 이유를 대지 않았고, 낙담하거나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다음을 기약했다.
패배를 인정하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20살짜리가 쿨 하게 다음에 또 하자고 말하기는 더욱 쉽지 않았다.
무작정 이기려고만 드는 철없는 계집아이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심지가 굳자 외모가 아닌 인간적인 면에서 호감이 갔다.
“내 손 잡아.”
걷는 게 불편할 것 같아 손을 내밀자 하린이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5초쯤 쳐다본 하린이 내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보드라운 하린이의 손이 거친 내 손바닥에 닿자 백만 볼트 전기에 관통한 것처럼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20살짜리 여자애 손을 잡았다고 이런 느낌을 받았다는 게 황당해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나 5년 만에 잡아본 여자 손이란 걸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더구나 그 여자가 남자라면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정윤희를 닮은 미녀라면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당연했다.
“너 지금 이상한 상상 했지?”
“아니.”
“이상한 상상 했으니까 얼굴이 빨개진 거잖아?”
“여자 손 5년 만에 잡아봐서 그래. 그래서 심장이 떨려 그런 거지 나쁜 생각 해서 그런 거 아니야. 오해하지 마.”
“정말?”
“어.”
“애인 없어?”
“군발이가 무슨 애인이 있었겠어. 장교도 아닌데.”
“제대 언제 했는데?”
“1년 전에.”
“그동안 여자 친구도 안 사귀고 뭐 했어?”
“먹고 살기 바쁜데 여자 친구를 어떻게 사귀어.”
“그럼 여자 사람 친구도 없어?”
“없어.”
“인간성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그런가 보지.”
하린을 부축해 벤치에 앉혀 놓고 원룸촌 입구에 있는 약국에 나는 듯이 달려가 빨간약 포비돈과 마데코솔, 밴드를 사 왔다.
“좀 따가울 거야.”
“내가 애인 줄 알아? 겨우 이런 것에 아파하게.”
피가 흐르는 왼쪽 운동복을 걷어 올리자 육상선수를 했던 여자의 다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날씬하고 하얀 종아리에 시선이 갔다.
그러나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심하게 까져 피가 흐르는 무릎에 눈을 고정했다. 의사는 아니지만, 피가 흐르는 상처를 두고 다리를 쳐다본다는 것은 양아치나 할 짓이었다.
힘이 빠진 상태에서 넘어져 생각보다 상처가 심했다. 많이 쓰라릴 텐데 아프지 않은 척 행동하는 하린의 모습에서 미모에 가려 진실한 모습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윽.”
“많이 따가워?”
“안 따가워.”
“정말?”
“솜으로 막 문지르니까 그런 거야. 그렇게 마구 문지르면 멀쩡한 살도 아프겠다. 너도 당해볼래?”
“알았어. 살살 할게.”
포비돈을 솜에 묻혀 바르자 많이 따가운지 미간을 찌푸리며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해 아프다는 말 대신 세게 문질러서 아프다며 투정을 부렸다.
트랙은 값싼 아스팔트로 만들어 노면이 매우 거칠었다. 이 때문에 넘어지면 심하게 갈려 상처가 심했다.
두꺼운 겨울 운동복을 입고 있어 그나마 이 정도였지 달리는 속도를 죽이지 못하고 넘어져 맨살이었다면 뼈까지 갈렸을 것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그건 창피한 거 아니니까.”
“꼴에 남자라고 잘난 척하기는.”
“잘난 척하는 게 아니라 아플 때 아프다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그러면 작은 상처도 큰 상처가 될 수 있어서 그래.”
“말하는 모양새가 자기 얘기 하는 것 같네. 네 말 맞지?”
“어.”
“혹시... 군대에서 다쳤어?”
“응.”
“많이 다쳤어?”
“아니. 조금.”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를 다쳤어?”
“왼쪽 어깨.”
“달리는 모습은 멀쩡하던데?”
“수술해서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
하린이는 생긴 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성격은 남자로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말했다.
그러나 포비돈를 바르는 내내 아프지 않다고 말하며 윽윽 대는 모습은 누가 봐도 여자로 성격이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보아 선머슴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데코솔 연고를 바르고 넓적한 밴드를 붙이는 것으로 돌팔이 의사의 치료가 끝났다.
“집이 어디야?”
“우리 집은 왜?”
“혼자 걷기 힘들어. 근처까지 데려다줄게.”
“이긴 사람이 먹고 싶은 거 다 사주기로 했잖아?”
“밥은 다음에 먹어도 돼. 지금은 쉬는 게 우선이야.”
“그러다 내가 오리발 내밀면 어쩌려고?”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 미녀와 밥 먹을 기회를 놓친 거니까.”
“병이라고 할 땐 언제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 약속한 대로 사줄 테니까.”
“무릎 나으면 그때 먹자.”
“마음대로 해. 대신에 나 잘 까먹으니까 기억 못 한다고 울고불고 질질 짜기 없기야.”
“알았어.”
다친 걸 진심으로 걱정하며 집에 데려다준다고 하자 하린이의 말투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살가워졌다.
말 속에 진심이 담기면 듣는 사람도 진심을 이해한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으로 내가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면 상대로 나를 진심으로 대했다.
하지만 내가 음흉한 생각을 품고 말하면 상대도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한다는 걸 알아차리고 멀리하게 된다.
“오른쪽 길 따라 10분만 가면 우리 집이야.”
“부축해 줄게. 잡아.”
절뚝거리는 하린이의 팔과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팔을 어깨에 걸치면 좀 더 편하게 걸을 수 있지만, 지나친 친절은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내가 최대한 접촉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자 내 행동이 마음에 들었는지 하린이 힐끔힐끔 쳐다보며 웃었다.
“너는 어디 살아?”
“왼쪽으로 쭉 가면 나오는 원룸촌에.”
“혼자 사는 거야?”
“어.”
“혼자 사는데도 여자가 없어?”
“여자 없는 게 이상해?”
“당연한 거 아니야. 허우대도 멀쩡하고, 얼굴도 못 봐줄 정도 아니고, 인간성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배려심도 있고, 거기다 집도 혼자 쓰는데 여자가 없다는 게 말이 돼? 너 여자 친구 있으면서 내게 작업 걸려고 속이는 거지?”
“군대 제대한 후 바로 다친 팔 수술하고 재활 치료받았어. 그리고 입시 공부하며 아르바이트했고. 시간도 없고 돈도 없는데 여자를 어떻게 만들겠어.”
“부모님은?”
“어딘가에 잘 살고 계시겠지.”
“내가 괜한 걸 물어본 것 같네.”
“아니야. 괜찮아.”
부모 얘기에 얼굴이 굳어지자 더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려 The Age of Hero에 관한 얘기를 했다.
이런 것이 배려심으로 오늘 처음 봤지만, 보면 볼수록 참 괜찮은 아이란 생각이 들었다.
“직업이 뭐야?”
“백수.”
“그거 말고 The Age of Hero에서 직업이 뭐냐고.”
“아직 없어.”
영주라고 말하면 믿지 않을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Part 2 확장 패치는 다음 주 월요일 10시로 최초의 영주 발표도 그때 했다. 공식적으로는 아직 영주가 없는 것으로 말하면 장난이라고 생각할 게 확실했다.
그리고 영주라고 말하는 것도 잘난 척하는 것 같아 싫었다. 좀 더 친해져 허물없는 사이가 되면 그때 말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했는데?”
“오늘 아침부터 시작했어.”
“진짜?”
“어.”
“다른 게임은?”
“The Age of Hero가 처음이야.”
“게임에 겜자도 모르면서 가상현실 온라인게임 학과에 지원한 거야?”
“어.”
“왜?”
“힘쓰지 않고 살 수 있는 직업을 구해야 했으니까.”
“너도 사는 게 쉽지 않구나.”
“다 그렇지 뭐.”
은은히 풍겨오는 향긋한 머리카락 냄새와 찐한 땀 냄새를 맡으며 30분쯤 걷자 하린이네 집 앞에 도착했다.
건물 평수만 50평쯤 되는 3층 건물로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됐는지 하얀 페인트가 반짝반짝 빛났다.
“여기야.”
“집이 참 예쁘다.”
“그러면 뭐해. 내 집 아닌데.”
“세 들어 사는 거야?”
“아니.”
“그럼 뭐야?”
“엄마·아빠 집이야. 정말 몰라서 물은 거야?”
“어.”
“제대한 지 1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러면 병 아니야?”
“.......”
군대 갔다 온지 얼마 안 된 복학생의 특징은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군대는 사막보다 더 삭막한 곳으로 농담과 유너가 실종된 지 오래로 민간인이 쓰는 용어에도 매우 어두웠다. 이 때문에 수많은 복학생이 한 학기 이상을 왕따 아닌 왕따로 지냈다.
나는 군대 제대한 지 1년이 넘어 지금쯤은 민간인으로 완벽히 넘어갔어야 했다. 그러나 일로 얘기하는 것 외에는 사적으로 만나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아직도 군인 티를 완벽히 떨쳐내지 못했다.
그래서 돌려서 말하는 은유법이나, 암시적인 말, 인터넷 용어 등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글을 읽어보신 후 작품서평란에 문제점이 무엇인지, 지난번 작품과는 어떻게 다른지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교통사고를 당해 밤에 글을 못 올릴 것 같아 내일 올릴 거 미리 올립니다.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